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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 1994

수영장 / 1994 / 계획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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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운동 중 중력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운동이다. 

수영이 자유롭다면 그 자유로움을 수영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민감한 감각기관인 눈은 수영장 바닥의 파란 타일을 보는 것이 아니고 허공에 떠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여기서는 수영장 바닥재료로 투명한 막이 선택되었다.

수영이 자유롭다면 그 수영을 담는 그릇도 자유로와야 한다. 접었다 폈다 하면서 이동이 가능한 구조체의 형식은 그래서 탐구되었다. 이 수영장이 걸리는 곳은 까마득한 발아래 물이 흐르는 심산 유곡일 수도 있다. 혹은 길 위에 브레이크등이 빨갛게 줄을 선 도심의 건물 사이 어딘가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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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교회

빛의 교회 / 1993 / 계획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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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인간이 신을 만나는 곳이다. 신을 만나기 위한 장치 이외의 것은 모두 부수적인 발명들이다. 

인간이 신을 만나려면 신이 보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그 신은 항상 빛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교회에서는 그 빛의 모습만 보이는 공간이 탐구되었다. 가장 강렬한 형태의 빛이 여기서 보이고자 하는 모습이다.

입구의 벽 뒤에는 물이 담긴 공간이 있어서 시간에 따라 빛은 벽의 위에서, 혹은 아래서 들어오게 된다. 교회의 후면에서 서로 다른 각도로 배치된 핀이 있어서 교회 안에 시간에 따라 다른 색의 빛을 들여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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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거리 읽기2] 너희가 종로를 아느냐

[동아일보 19990112]

턱시도, 산소통, 징, 김밥, 족보. 이들의 공통분모는 뭘까. 여기에 손목시계, 도색잡지, 휠체어, 화분, 오락실을 첨가해도 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무엇이나 집어넣어도 된다. 답은 종로다. 종로에 가면 이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종로의 구석구석에 기쁘고 슬프고 아쉬웠던 추억의 한 부분을 묻어두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서울시민이라고 할 수 없다.

종로는 6백년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왔다. 육의전(六矣廛)에서 모시를 팔던 할아버지는 동대문을 거쳐 들어온 왜장 고니시(小西行長)를 보고 서러운 눈물을 종로에 펑펑 쏟았을 것이다. 마누라에게 설렁탕 한 그릇 사줄 만큼 ‘운수좋은 날’을 찾아 김 첨지의 인력거는 종로를 몇 바퀴나 돌았을 것이다. 아들이 고시에 합격한 날, 남산부터 북촌까지 길어다 주던 물지게를 팽개치고 북청 물장수는 종로를 그렇게 내달았을 것이다. 종로는 이 땅에 살던 무지랭이들의 희노애락을 담아내던 그릇이었다. 종로는 길이면서 마당이면서 좌판이기도 했다. 종루에 매달린 종을 쳐서 도성의 통행금지를 맺고 풀던 심장부였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휘두르던 시전(市廛)상인들이 전국의 경제권을 흔들던 현장이었다.

종로는 예사로운 길이 아니었다. 조선 개국 때 만들어진 계획도로였다. 서대문부터 동대문까지 서울을 가로지르는 혈관이었다. 그러니 모든 길은 당연히 종로로 통했고 종로에서 끝났다.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도 황토마루(黃土峴)에서 종로를 만났다. 남대문길도 종로에서 끝났다. 전차도 지하철도 종로를 지나야 하는 건 당연했다.

일제의 새로운 도시계획은 종로를 토막토막 자르기 시작했다. 좁은 잡길들은 넓혀지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동대문까지 나뉜 여섯 마디는 일본식 이름으로 종로 1정목(丁目), 2정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길은 종로 1가, 2가가 되었다. 그리고 마디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갖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하고 인도가 양분되면서 남북으로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종로는 열 두 개의 막을 지닌 시나리오가 되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작되는 종로 1가는 서울의 한가운데다. 2가와 합쳐서 한국에서 은행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다. 남쪽의 서린동은 재개발이 되어 덩치 큰 건물들이 종로에 면해 자리를 잡고 있다. 반면 북쪽 청진동은 아직 올망졸망한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가게들에는 온갖 먹을 것, 볼 것들이 즐비하고 이면도로는 해장국집으로 대표되는 밥집의 세상이다. 그러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수는 북쪽 길에 압도적으로 많다. 사람 사는 맛, 거리를 걷는 맛을 빼앗아 가는 재개발의 문제를 한눈에 보여주는 거리다.

종로 2가는 종로의 프리마돈나다. 종각부터 단성사까지의 주인공은 단연 젊은이들이다.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닌 인생이라면 그들이 지금 쉰세대가 되었건, 낀 세대가 되었건 지금의 출퇴근시간 신도림역을 방불케 하던 YMCA부근 학원가에 학창시절의 한 부분이 묻혀있을 것이다. 1980년에 입시학원은 추방되고 재수생은 노량진, 용산으로 흩어졌어도 이 동네의 나이는 아직 젊다. 책방과 외국어 학원과 분식집으로 대변되는 거리의 나이는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이다.

그러나 백전노장의 우리 할아버지들이 호락호락 종로를 내주지는 않는다. 3・1운동의 기개는 탑골공원을 지키고 있다. 종로 2가 관철동에서는 이십대 후반이면 중늙은이가 되고 탑골공원 앞에서는 오십대 후반도 새파란 젊은이가 된다. 하지만 종로는 열려 있다. 자루바지를 입은 열혈남아도 탑골공원 앞 헌혈차에서 나이 어리다고 쫓겨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는 경로석에 앉는 할아버지도 관철동에서 통만두를 주문할 때는 공평히 선불을 내야한다. 중요한 건 주민등록증상의 나이가 아니고 거리를 걷는 마음이다.

종로 3가의 극장가가 끝나면 종로는 다시 바뀐다. 노점상의 취급품목이 전자계산기, 공구로 달라진다. 나이도 열살 넘게 많아진다. 분위기도 착가라앉는다. 걸음을 더 옮기면 한약방, 양약방, 약초상, 화초상이 교대로 등장하고 나이는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는 결국 동대문에 닿는다. 시집갈 딸의 혼수를 위해 동대문시장을 들락거려보지 않은 이 땅의 어머니는 얼마나 될까.

종로는 아름답다. 온갖 세상사가 이리 저리 버무려진 종로에서 무질서를 보는 사람은 종로를 걸으면서도 기쁠 수 없다. 종로는 무질서가 아니고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어둡고 짜증나는 생활이 느껴지면 종로를 걸어 보라. 그대의 인생은 종로 몇 가형인가. 외국인 관광객이 탑승했다고 버스에 써 붙이고 고궁과 민속촌, 남산을 배회하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국 사회는 그런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들끓는 에너지, 지구 위의 다른 어디에서고 찾아 볼 수 없는 그 에너지가 한국의 모습이다. 관광자원이다. 그리스에 가서 시장거리의 수블라키(souvlaki) 대신 기어이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어야겠다고 하는 관광객은 아크로폴리스에 오를 자격이 없다. 호텔 스탠드바에서 마티니를 홀짝거리기 원하는 이는 종로에 나서 봐야 소용이 없다. 적당히 지저분하고 무례하고 시끄럽고 신나는 곳이 우리의 도시다. 어깨가 부딪치고 발을 밟혀도 하하 웃으면서 먹던 붕어빵을 마저 먹으며 지나가는 환한 얼굴을 그들에게 보여 주라. 누구도 외로울 수 없는 우리의 종로를 보여 주라.

종각 네거리에는 유독 남쪽 모서리들에만 삼각형의 교통섬이 있다. 남대문길이 와서 끝나던 6백년의 자취가 길에 남아있는 것이다. 종로는 강남의 여느 길이 아니다. 종로의 건물들은 길을 향한 뒷 배경들이다. 모두 종로를 면해 경의를 표해야 한다. 다소곳이 줄을 서 있어야 한다. 그 역사의 무게를 내던질 자격이 있는 건축가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던 종로에 도전장이 날아들었다. 종로가 어떤 길인지 관심이 없는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삼성플라자 건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우루과이 태생의 미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이 건물은 유난스런 모습으로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덩치도 큰 친구가 혼자서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하면서 종로를 가리기 시작했다. 개미나라에 날아 온 메뚜기처럼 줄을 흩뜨려 놓기 시작했다. 모든 건물들이 종로 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도열해 있는 것은 종로의 역사에 대한 경배의 표시다. 그런데 삼성플라자는 그렇지 않다. 혼자서만 삐딱하게 서있으니.

이국인 건축가는 잠시 둘러보는 관광객의 눈으로 종로를 스쳐갔을 것이다. 종로에 대한 관심도, 서울에 대한 애정도 없었다. 왜 옆의 제일은행 본점이 다소곳이 종로에 맞춰 줄을 서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거대자본과 오만한 이국 건축가에 의해 종로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남의 눈에 잘 띄어야 광고도 되고 장사도 잘된다는 주판알 너머로는 6백년 역사가 보일 수가 없었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한숨은 흘렀다. 마로니에 잎은 나부끼고 담배만 타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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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거리 읽기1] 세종로 戀歌

[동아일보 19990105]

《우리는 늘 거리를 지나 어딘가로 향한다. 거리는 사람의 공간이다. 거리에는 역사가 있고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99년 ‘건축문화의 해’를 맞아 우리의 거리를 깊이 있게 탐색해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사람이 사라진 서울 광화문 앞 세종로, 역사가 지워져 버린 종로,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달동네 거리, 개항(開港)의 쓰라린 흔적이 남아 있는 인천 군산의 거리, 그리고 해인사 수덕사의 산사(山寺)로 향하는 거리까지. 그 모든 거리는 ‘사람 중심의 거리’가 되어야 한다.그러나 우리의 거리는 어떠한가. 사람보다는 차량이 우선하고 사람보다는 위압적인 건축물이 압도한다. 우리 거리엔 진정 사람의 숨결이 남아 있는가. 젊은 건축학도 서현씨의 새롭고 깊이있는 눈을 통해 우리의 거리에서 사람과 역사를 만나보자.》

세종로에 서면 샹젤리제(avenue des Champs—Elyses)를 생각하게 된다. 파리 시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자부하는 바로 그 거리. 세종로는 샹젤리제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산, 그리고 600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광화문(光化門)이다. 광화문은 개선문보다 아름답다. 개선문처럼 칼바도스 향기나는 이름의 소설은 아직 없어도 그렇다. 콘크리트로 지은 아쉬움은 있어도, 통치자의 한글 현판이 그 깊은 뜻을 덮어도 광화문은 그냥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름답다.

대원군의 중건 때까지 광화문은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궁궐을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개국의 그 순간부터 왕조의 영고성쇠를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유배의 시기도 있었다.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사라지려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로 대표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하여 총독부의 철거의지를 힘겹게 견뎌냈다. 그러나 결국은 경복궁의 동문 건춘문(建春門)의 옆으로 옮겨졌다. 한국전쟁의 포화는 광화문도 비껴가지 않았다. 우리에게 현대사는 그리도 거칠게 시작되었다.

광화문은 그 영욕의 시간을 지나 1968년에야 지금의 자리를 다시 찾았다. 왜적을 맞아 싸우다 돌아가셨다는 이순신 장군과 광화문의 등 뒤에서 조선총독부 청사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주인처럼 웃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 북악산도, 광화문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 건물이 사라진 뒤에야 북악산과 광화문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임금님도 육조의 관리들도 사라진 오늘, 광화문이 굽어보던 육조 거리는 세종로가 되었다. 세종로는 경건한 우리의 신화다. 그 역사가 민초들의 역사가 아니고 제왕의 역사였을지라도 그렇다. 그 길을 걸어보자. 지하철 광화문 역에서 내리자.

세종로에서 가장 북적대는 거리는 광화문 지하도다. 그 길은 작은 시장이다. 수출길이 막혀 할 수 없이 들고 나왔다는 사진첩도 있고, 사랑하는 부인들을 위해 아저씨들도 하나씩 구입하라는 마늘까개도 등장한다. 잉크만 겨우 마른 신문으로 세상 소식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배달되기도 한다. 거리에는 이렇게 기웃거릴만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들어가서 뭔가를 사들고 나올 수 있는 김밥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종로에서 소매점들은 세종문화회관에 이르기 전에 끝난다. 거기까지가 ‘우리’의 거리다. 나머지는 권력과 자동차가 장악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는 설 수 없던 시절도 있었다. 음악회에 앞서서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울려 퍼져야 했다. ‘황국신민서사’를 연상시키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울 수 있는 모범생만 그 문화의 주인공이었다. 그 때까지도 세종문화회관의 주인은 모든 시민이 아니었다.

이제 시민의 모습도 세종문화회관에 새롭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훈아의 콘서트는 공연을 보름도 훨씬 넘게 앞 둔 무렵 이미 ‘완전매진’이라고 써 붙여야 했다. ‘우리’의 문화가 무엇인지 명쾌히 보여 주었다.

세종문화회관에는 널찍한 계단도 있다. 이 계단은 올라가기보다 걸터앉기 더 좋은 곳이다. 길거리 극장의 열린 객석이다. 객석에 앉으면 뭔가 신나는 것, 뭔가 재미있는 것이 보여야 한다. 구경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단연 사람구경이다. 여기서 북적거리며 오가는 사람들이 앞에 보인다면 이 자리는 극장안의 것 보다 더 신나는 객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의 길거리 객석에서는 을씨년스런 차량의 행렬만 가득히 보인다.

좀 더 걸어보자. 옛 사헌부 자리는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지상은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을씨년스럽기만 하고 지하에는 자동차가 가득하다. 세종로에 주차장을 만드는 사고는 더 많은 자동차를 타고 이 곳의 건물들에 오겠다는 오만한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의 신화에 대한 모욕이다. 보행인은 구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중앙 지하도를 건너온 이들을 위해 마련된 인도의 폭은 1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세종로의 건물들은 노골적으로 오만하다. 정부종합청사, 문화관광부, 주한 미국대사관은 모두 세종로 앞에 벽을 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을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무총리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어도 세종로에 주차장을 들이대고 있을 수는 없다. 문화관광부장관과 미국의 대사가 있다고 해도 그렇다. 이 건물들이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면적만 빼내도 세종로의 한가운데는 시민의 거리가 될 수 있다. 자동차는 옆으로 비껴가도 된다. 지하로 다녀도 된다.

시민들이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광화문은 정녕 가치가 있다. 이순신 장군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할 수 있는 세종로가 아름답다. 

지속적인 노력의 흔적은 분명 있다. 새로운 시대답게 새로운 신문고를 설치한 공원도 광화문 앞에 자리 잡았다. 마당놀이나 야외공연을 위한 열린 마당도 있다. 그러나 자동차가 만드는 소음이 70데시벨을 넘는 거리에서 공연은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선발된 모범생들이 전시용 농악놀이나 할만한 도시공원만으로 거리는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는 맛있는 군밤과 햄버거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거리여야 ‘우리’의 거리다.

광화문 앞의 서태지 팬사인회 때문에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보도도 나오는, 그런 거리가 아름답다. 어린 아이의 웃음이 햇살처럼 번지는 광화문. 그들이 더 나이를 먹었을 때도 첫눈은 올 것이다. 그 때 만나자고 연인과 약속하는 그 곳으로 광화문을 만들자. 그러면 ‘낙엽은 지고 눈보라쳐도 변함없는’ 우리의 사랑으로 서울은 남게 될 것이다. 그 때 햇빛 아래 빛나는 광화문은 라비크가 어둠 너머로 바라보던 음울한 개선문보다 정녕 더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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