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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dtBauwelt] 서울의 군사문화

[StadtBauwelt 2008. 09. 26] 서울의 군사문화

StadtBauwelt는 독일의 도시건축저널. <Die Kultur des Militärs> 라는 제목으로 출간.

I. Introduction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다. 이어 1942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영토인 펄하버를 공습함으로써 세계대전이 확전되었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도 병참기지로 바뀌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남한과 북한이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오늘까지 남북한은 준전쟁상태에 이르고 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쿠테타를 통해 집권했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 암살될 때까지 집권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장군이 쿠테타를 통해 집권했다. 그의 군대 동기인 노태우 대통령이 1993년 2월 25일 임기를 마침으로써 장군출신 대통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20세기의 한국은 전쟁국가였다. 국민들은 전쟁을 직접 경험했거나 전쟁을 대비해야 했다. 군사문화는 한국 사회의 한 부분이 되었다. 군사용어가 일상화되었고, 수많은 사회조직이 군사조직을 닮아갔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속에서 형성된 서울의 도시 풍경은 어떤 것인가. 과연 군사문화는 한국의 도시를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했고 그 흔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II. Japanese Colony

40대 중반을 넘어선 한국 사람들의 중고등학교 졸업사진 앨범을 펼쳐보면 판박이 같은 얼굴들이 가지런하다. 모두 똑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교복을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정된 옷을 입었다는 데 그치지 않았다. 안경테, 허리띠, 양말, 신발까지가 모두 통제가 되는 생활을 의미했다. 심지어는 책을 읽는 자세, 걸어 다니는 자세까지 모두 통제의 대상이었다. 중학교 남학생들의 머리는 모두 스님들처럼 빡빡 깎은 것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은 죽이지 말라’는 불교의 영향이 아니었다. ‘죽이지 않는다면 죽는다’는 군사적인 요구였다. 일본의 식민지 시기가 그 출발점이었다. 그 배경에는 병영으로서의 학교가 있다.

한국은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현대에 영향을 미친 한국의 근대적 대중교육은 바로 이 식민지시기에 시작되었다. 식민지에 시행되는 교육이 억압과 통제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교육의 가치는 자유로운 사고, 창조적인 발상에 있지 않았다. 규범에서 벗어난 복장과 태도는 체벌로 다스려졌다. 한국인들에게 훈육과 체벌은 교육과정의 당연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각인되었다.
그 억압은 일본이 전쟁을 시작함으로써 극단적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에 의해 시행된 대중교육은 병영의 모습을 차용한 것이었다. 복장과 행동은 군대의 기준을 적용하였다. 운동장과 교실은 병영의 연병장과 막사의 모습을 고스란히 따랐다.
일본의 점령은 한국에서 왕정의 붕괴를 의미했다. 서울에 산재한 왕족과 귀족의 저택들은 모두 주인 없는 공간이 되었다. 일본은 이 공간에 근대적 기관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가장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복장과 두발의 규제는 일제 강점기가 종료된 지 40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건물로서 학교의 모습은 그대로 아직도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 세워진 학교들도 모두 이전의 선례를 따라 병영의 모습으로 반복해서 세워졌다.
군대의 병사들은 연병장에 줄 맞춰 서서 지휘관의 통제를 받는다. 학교의 운동장에서 학생들은 매주 조회를 섰다. 이 조회는 군대의 병사들이 사열을 하는 것처럼 줄을 맞춰 서서 진행된다. 운동장 앞의 구령대에서는 군대의 지휘관들이 진행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교사들의 지시와 명령이 전달된다.
매년 한 두 번 운동장에서 진행하는 운동회는 아직도 학교의 가장 큰 행사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시작된 이 행사는 단순히 체육행사가 아니다. 백군과 청군으로 학생들을 나눈 상태로 진행되는 이 행사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대결과 승리라는 군사적 대치방식이 학교 운동회의 구도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시작된 일본의 전쟁은 1945년 원자폭탄의 투하로 종결되었다. 전쟁 막바지의 일본은 서울에 중요한 흔적을 만들어 놓았다. 당시 서울의 주택은 모두 목조였고 도로패턴은 미로와 같았다. 전쟁 말기 미국이 일본을 폭격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식민지인 한국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일본은 미국의 폭격 후 온 시가지로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완충공간을 서울에 만들었다. 건물들을 헐어내고 폭 50m 정도의 긴 띠 모양 공간을 서울의 한복판에 형성하였다. 미로 도시 한복판에 칼로 잘라낸 것처럼 형성된 기하학적인 공간은 기존 도시를 만들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논리의 개입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도시조직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 완충지역은 이후 서울의 도시변화를 증언하는 중요한 공간이 된다.

III. Social Militarism

학교에서 교복을 입었던 한국의 남자들은 다시 한번 제복을 입어야 했다. 교복과 달리 지금까지 굳건히 남아있는 이 제복은 바로 군복이다. 아직도 한국은 전쟁 중인 국가다. 남한과 북한은 휴전 상태일 뿐이다. 이 현실은 한국으로 하여금 선택의 여지 없이 징집제도를 고수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의 전쟁이 교복을 남겨놓았다면 한국전쟁은 군복을 남겨놓았다.
20세기 후반 내내 한국은 냉전의 전초기지였다. 문제는 한국이 아닌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그래서 일본이 항복을 했다는 데서 시작한다. 2차대전의 종결 이후 한국의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진주하게 되었다. 냉전 시대의 분단지점이었다는 점에서 한국과 독일은 상황이 같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는 분단 이후 한국은 전쟁을 치르고 그 이후 다시 분단 상황으로 복귀했다는 점이다.
전 국토를 전쟁터로 몰아넣은 한국전쟁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한반도를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전국이 잿더미로 변한 상태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남북한의 관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대립경쟁구도를 넘어 무력적인 적대관계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징집제도는 당연한 것이었고 한국의 남자들은 모두 군사조직의 한 부분이 되었다. 한국의 징집제도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흔적을 사회에 남겨놓고 있다. 하나는 군사문화를 사회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남녀문제의 차별적 접근을 자연스럽게 허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남자들은 20대 초반의 2,3년을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 군사적 경험은 학교 교육보다 훨씬 더 극심한 훈육과 체벌을 자연스런 사회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장교든 사병이든 전역 군인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사회조직이 군사조직을 모방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남성 위주의 조직일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대표적인 것이 건설회사 조직이다.
한국에서 1960년에서 1990년까지는 건설업의 시기였다. 폭격으로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는 것은 바로 건설이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는 이 시기의 것이었다. 건설은 경제적 부흥의 가장 가시적인 성과물이었다. 1970년대 오일 붐에 힘입은 중동 건설에 한국 건설노동력이 참여하면서 건설산업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1961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의 대통령들은 모두 장군출신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한국은 건설국가였다. 서울시장을 비롯한 정부고위관료, 공기업의 최고책임자에 군인출신들이 임명되었다. 한국의 관료조직, 공기업조직은 군사조직과 민간조직의 혼합체가 되었다.
군사조직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목표의 설정과 달성이다. 한국의 건설문화는 휴일과 취침을 고려해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들을 설정했고 이을 달성하기 위해 무자비한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계급에 따른 엄격한 위계조직, 직급에 근거한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 개인의 생활을 희생하는 윤리의식 등은 건설회사를 지탱하는 중요한 군사적 문화였던 것이다. 군사조직체로서의 건설조직체는 한국의 남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문화에서 가치판단은 단 하나, 목표가 이루어졌느냐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방법이 동원되었고 누가 희생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시적 성과를 중시하는 사업의 대표적인 예는 서울 중심가를 관통하는 청계천 복개였다.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서울의 하수망에서 청계천은 오염된 하수로였다. 서울시는 하수망 정비가 아닌 하천 복개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위에 고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문제가 되는 곳은 가리고, 보이지 않는 곳은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이 뚜렷하게 표명된 것이다. 일본이 남긴 띠 모양의 피난공간에는 세계에 보여준다는 이름을 가진 세운상가를 세웠다.
그러나 위계, 보고, 과시로 표현되는 군사문화의 성과 뒷면에서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 노약자 등과 같은 사회 소수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도시조직, 준공 시 화려하나 내구성 없는 구조물, 속도만능의 자동차 중심 도시체계 등은 규모, 형식, 속도에 집착하는 군사문화의 결과인 것이다. 이렇게 만든 건물과 사회기반시설들은 건립 2,30년 만에 철거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몇몇 주요 사회구조물들은 스스로 붕괴가 됨으로써 군사작전처럼 시행한 건설의 결과들을 하나 둘 보여주기도 했다. 경직된 관료조직, 수동적 사회구성원의 양성 등 군사문화가 지탱하는 사회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반성을 요구했다.

한국의 징집제도는 국민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남자들만을 대상으로 한다. 청년기의 중요한 시기를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희생이라는 점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19세기까지 비대칭적이던 한국의 남녀관계는 이 희생의식과 보상심리를 통해 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해 나갔다. 사회가 남성의 집단적 일탈을 상당부분 묵인하는 것이다.
남성중심의 향락문화는 한국사회만의 특징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도시의 뒷골목 풍경을 이루는 집단적이고 소비적인 남성문화는 다른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그 문화에 한국 남성들을 입문하게 하는 시기가 대체로 군 복무 전후다. 이 문화를 확대재생산하는 중심에는 병역이 있는 것이다.
입대 전후와 휴가기의 일탈에 대해 한국 사회는 관대한 입장을 표명해왔다. 이러한 일탈은 음주에서 성적인 향락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이들을 수용하는 상업시설들은 휴게실, 안마시술소, 이발소, 룸살롱 등 제목만으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의 도시 내 뒷골목 풍경을 발전시켜왔다. 성매매는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지만 공창에 가까운 사창가가 도시 조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군복무에 기반한 피해보상의식, 공동체의식을 배제하고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의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은 남자들의 경우 병역에 기반해서 좀더 강화된다. 도시뒷골목 향락공간의 이용 단위가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는 점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즉 각종 다양한 도시뒷골목 공간을 이용하는 동기를 향락 자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공범의식을 통해 남성공동체를 확인하려는 의미가 배경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현란한 네온사인과 광고판으로 표현되는 한국 뒷골목 풍경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배경에는 이런 군사적 남성공동체 문화가 깔려있다.

군사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배경에서 남한과 북한이 같은 점이 있다. 도시 내에 구호가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남한은 도시에 내거는 구호와 함께 상업시설의 간판이 더해지면서 북한의 경우보다 더 혼잡한 도시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키자, 이루자, 없애자 등과 같은 단어로 끝나는 원칙론적이고 선동적 구호들은 한국의 사회가 군사문화의 연장에 들어서 있다는 모습들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부터 시작된 구호문화는 군대에서 확장되고 학습된다. 도시 내에 혼란하게 내걸렸으되 공허한 구호들은 한국 시민들에게 자연스런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IV. Horror of Invasion from North Korea

한국전쟁 이후 남한사회 전체에는 언제 북한이 침략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하게 되었다. 1968년에 북한의 특공암살부대가 청와대의 뒷산까지 침투한 사건은 이 위협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1974년에는 대통령의 암살기도 사건으로 인해 영부인이 시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주변을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있고 그 복판에 한강이 흐른다는 것은 서울의 중요한 경관자원이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서울은 그렇게 한가한 공간이 아니었다. 서울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남한 전체에 끊임없는 불안을 안겨주었다. 서울은 시민들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은 절박한 공간이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울은 전체가 요새가 되어야 했다. 북쪽에서 서울에 이르는 간선도로에는 모두 대전차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한강 하류 북한에 가까운 곳에는 북한의 잠수특공부대의 침입에 대비해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서울 주변의 높은 산과 고층 건물 옥상은 모두 군부대가 주둔하는 공간이 되었다. 당연히 시민들의 접근은 통제되었다. 고층건물을 지을 때도 그 지점에서 청와대를 저격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고려되었다.
아직도 풍수사상이 배후에 널리 깔려있는 한국사회에서 자연은 또 다른 유기체로 인식되곤 한다. 서울 중심부의 남산도 성역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그러기에 남산을 관통하는 굴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신체를 뚫는 것만큼이나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제안이다. 그러나 지하시설이 북한의 폭격에 대비한 방공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남산에 무려 세 개의 터널을 뚫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지하철 역사는 모두 폭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고 신축건물에는 지하실이 설치되어야 했다. 북한의 공격으로 수도공급이 끊겼을 때를 대비해서 건물에는 지하저수조 설치가 의무화되었다. 고속도로는 비상시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될 가능성을 고려했다.
한국전쟁은 학습효과를 갖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던 서울의 한강 다리가 파괴되어 북쪽의 시민들이 피난하는데 막심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 때문에 한강은 골치거리였다. 새로 놓을 다리의 위치는 군사작전과 시민피난을 고려해서 설정되었다. 특히 폭격으로 파손이 되었을 경우 가장 쉽게 복구될 수 있는 다리도 조성되었다. 교각의 높이가 높지 않아 비교적 쉽게 상판을 다시 얹을 수 있는 이 다리는 장마기간 한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잠수교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요새화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서울의 주요 행정기능을 모두 남쪽으로 옮겨서 미사일 사정거리를 벗어난다는 해결책이 등장했다.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로 수도전체를 남쪽으로 옮긴다는 계획은 대통령의 암살로 더 이상 추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행정부의 일부 기능은 서울의 남쪽으로 이전을 했다. 미사일 사정거리를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높은 산을 배경으로 해서 북쪽의 미사일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 위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경쟁대상이었다. 남한과 북한의 경쟁은 닉슨(Nixon)과 후르시체프(Khrushchev)의 키친논쟁(kitchen debate)이 보여주는 입씨름 수준을 넘어 구체적인 것이었다. 국립공연장의 규모를 결정하는 데는 한국의 공연시장규모가 고려되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의 공연장보다 규모가 커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광장도 다리도 북한의 것들보다 크고 넓어야 했다.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으로 성취해낸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일 것이다. 올림픽을 치러낼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자원을 갖추지 못한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하게 된 과정부터 필요한 시설을 제시된 시간 안에 맞춰 건설해 낸 것까지의 경과는 모두 한국 사회를 버티고 있는 군사문화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의 유치는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북한의 위협에 대해 안전하고 유효한 방패막이였다. 아울러 북한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유하게 되었음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도구이기도 했다. 올림픽은 군사문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 건설산업의 정점이기도 하면서 이제 그 효용이 다 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알려주는 기점이 되었다. 가장 상징적인 모습은 한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의 상징인 한강이 올림픽 기간에 피사체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강에는 유람선도 떠 있어야 외국의 강처럼 제대로 된 강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유람선을 운행하기에 지형상 한강의 수심은 너무 낮았다. 한강의 하구에 댐을 세워 수심을 높이자는 제안은 군사문화가 군림하지 않았다면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시적 성과를 위해서는 생태환경의 교란은 아예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낮은 교각으로 조성된 잠수교가 유람선 운행에 걸림돌이 되었다. 유람선이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다리는 활처럼 부풀어 올려졌다. 피난과 생존을 위해 건설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모습이었다.

V. American Forces in Seoul

한국은 미국의 힘으로 일본에게서 해방되었고, 미국의 도움으로 한국전쟁을 치러냈고, 미국의 주둔으로 북한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한국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국가가 되었다. 휴전협정에서 한 가지 더 곤혹스런 점은 이 협정의 주체가 남한과 북한이 아닌 미국과 북한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서울의 도시 모습을 규정하는 중요한 단서들이다.
한국인들에게 양키(Yankee)는 미국인들이 아니고 미군들이었다. 미군들은 강대국 미국인들이면서 별볼일 없는 군인들이기도 했다. 미군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입장은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1970년 대까지 미군부대를 통해 유통되는 군수품은 이국적이고 품질 좋으나 비공식 유통경로로 흘러 든 물건이었다. ‘양키물건’은 특별한 그 무엇이었다.

서울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워커힐(Walker Hill)이라는 이름은 바로 미국의 예외적 위치를 보여준다. 워커는 한국전쟁 중 전사한 주한유엔군 사령관의 이름이다. 워커힐 호텔은 최근까지도 한국에서 카지노가 허용되는 유일한 공간이면서 완벽하게 서양적인 쇼가 진행되는 공간이었다.
서울의 지도를 놓고 보면 한 복판에서 기형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남쪽에서 한강을 건넌 지하철 노선이 갑자기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기존의 노선과 필요 이상으로 인접해서 지나가는 것이다. 한강을 건넌 도로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방향을 바꾼다. 자동차도 지하철도 중심을 비껴가야 하는 공간 때문에 서울은 도넛처럼 가운데가 비어있는 이상한 도시가 되었다.
바로 이곳은 미군이 주둔해 있는 곳이다. 서울의 복판은 한국 대통령도, 서울 시장, 서울 시민도 손을 댈 수 없는 성역이었다. 미군이 주둔한 용산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이었다. 광복 이후에 미군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당연해 보였다. 모든 도시계획은 미군기지를 제외하고 고려되어야 했다.
서울 복판의 미군기지는 도시구조의 왜곡을 가져왔다는 점 외에 독특한 부산물을 낳았다. 미군의 문화가 서울에 도입되는 지점으로서의 이태원이라는 지역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수입된 문화가 미국이 아니고 미군의 문화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군인들의 문화는 소비적이고 향락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문화에서도 소비적이고 순간적인 문화가 한국에서 왜곡되어 미국을 대변하게 되었다. 미군문화를 바탕으로 이태원은 한국과 미국이 혼합된 소비와 향락의 공간으로 변화해나갔다. 한국에서 미국의 문화는 동경과 멸시를 동시에 받는 것이 되었고 이태원이 바로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VI. Militarism Afterward

한국전쟁 이후 한국이 이루어낸 경제적 성과는 한국인들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것이다. 그 결과는 한국의 발전상을 과시하기 위해 그림엽서에 등장하는 서울의 전경이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이 경제규모 13위에 이르는 국가가 되는 데에는 군사적인 동원문화가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올림픽을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북한에 대한 비교우위를 확인하게 되었다. 북한은 무력이라는 점에서는 위협요소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더 이상 경쟁상대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군사 문화에 힘입은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유보된 민주사회와 희생된 개인, 계층을 무시할 수 없다. 경제성장의 배경에 군사문화가 유일한 힘으로 깔려있던 것도 아니다. 근면한 윤리의식, 유교적 교육열 등이 모두 지목이 될만한 내용들이다. 그리고 경제성장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달성해야 할 사회의 유일한 가치도 아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분명 가장 중요한 가치의 하나다. 특히 절대빈곤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전쟁 직후의 사회가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원동력의 하나였던 군사적 동원문화의 흔적을 오늘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도 공정한 평가는 분명 아니다.

문제는 미래에 있다. 남북한의 대결구도가 달라지고 있다. 남한의 대통령이 북한의 수도 평양을 방문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울도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실상부하게 환경이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신속한 의사결정보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지닌 가치가 인정되고 사회적 소수의 존재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우선 청와대 근처의 산에 등산이 허용되었다. 청와대를 내려다보는 것이 허용된 것이다. 도로를 막아서던 대전차 장애물도 철거되기 시작했다. 미술작품으로 바꾸는 방식을 찾아보자는 제안도 등장했다.
1970년대의 경제성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진은 청계천고가도로와 31빌딩이었다. 우리도 남들처럼 도시 내에 고속도로와 고층건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근대화, 산업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2002년 서울시민들은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를 시장으로 당선시켰다. 그리고 2005년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청계천이 복원되었다. 경제가 아닌 환경이 도시의 화두라는 데 시민들이 동의한 것이다. 물론 철거를 진행하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 역시 급박한 일정을 정하고 그에 맞춰 사업을 진행했다는 점에서는 군사문화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개발과 성장으로 도시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방향 전환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제는 세운상가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수립되었다. 폭격에 대비한 피난처도, 군용활주로로 쓰려던 광장도 공원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잠수교 위에는 새로운 다리를 놓았다. 잠수교도 새로운 청사진으로 그려졌다. 이제 잠수교를 보행자 전용교량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한강을 따라 서울을 가로지르면서 더 빨리, 더 많은 자동차를 실어 나르던 한강변 고속도로들이 시민들의 한강접근을 막는다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도 변화의 모습이다. 행정부를 옮기기 위한 계획이 다시 수립되었지만 이번의 계획은 북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중심의 국토계획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국토계획을 수립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서울의 복판을 점유하고 있던 미군부대도 2011년경까지 지방으로 이주하는데 동의했다. 미국의 점유로 인해 역설적으로 개발압력의 진공지대로 남아있던 이 공간을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것은 2000년대 초반 한국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군사적 동원문화로 만든 도시는 건설만큼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시민 개인의 생활에 투입된 군사적 흔적은 쉽게 희석되지 않고 있다. 통일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아직도 징병제도는 시행되고 있다. 병역은 아직 논리적인 접근이 쉽지 않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도시뒷골목에 자리잡은 남성중심의 향락적 소비시설도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 한국이 군사문화를 과거형으로 회상하게 되는 것은 아마 통일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통일은 한국과 한국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의 예가 보여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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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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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inuing the Discussion

  1. pix's me2DAY linked to this post on 2008-11-23

    pix의 생각…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속에서 형성된 서울의 도시 풍경은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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