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회지, 2008, 01]1
자탄의 시대다. 자괴의 시대라고도 한다.
대한민국 건축계의 현실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한탄의 목소리가 높다. 비교하는 다른 나라의 예가 많다. 독일 국회의사당 준공식에서는 건축가가 황금열쇠를 총리에게 전해주었다더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준공일지를 보니 서문을 대통령이 썼고 현장 감독하는데 건축가가 대통령을 인도하더라. 이집트 피라밋 준공서적에 파라오 다음으로 알려진 이름이 건축가 혹은 현장소장이던 임호텝이더라 등.
그런데 한국의 건축가들은 준공식에 초대가 되지도 않고 된다한들 박수치는 관객석에 안제 되더라. 화려한 프로젝트의 현상공모에는 외국건축가만 초대되더라. 한국건축가가 초대돼도 들러리밖에는 되지 않더라 등.
불만의 대상은 맞다. 세상이 이상하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외국출장을 너무 많이 다녀서인지 국가상징조형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모든 도시가 관광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관광도시, 관광사업은 대한민국 모든 지방자치단체장의 크고 작은 공약이 되어 있다. 그래서 명품건축이 필요하고 명품건축가가 동원되어야 한다고 한다.
문제인 것도 맞다. 풀어야 한다. 문제는 외부에서 풀어주는 것이 아니고 건축계가 풀어야 한다. 국내의 건축가들이 좋은 건물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문제를 푸는 첫 번째 열쇠다. 좋은 건물을 만들려면 좋은 디자인이 선택되어야 한다. 그 길은 경쟁에 있다.
건축에서 경쟁은 당연히 현상공모를 일컫는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공정한 현상공모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공정한 현상공모심사가 좋은 디자인을 선정하고 좋은 건물을 만드는 출발점이다.
이제 물음은 내부의 것이 된다. 대한민국의 현상공모 심사는 공정한가. 답은 유보적이다. 공정한 심사도 있고 공정하지 않은 심사도 있다. 문제는 중요한 심사일수록 공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설계비가 커지고 공사비가 커지고 사업의 지명도가 높아질수록 심사는 혼탁하고 뒷이야기들로 무성해진다. 건축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폐지의 목소리가 높은 턴키심사의 경우 혼탁도는 더욱 증가한다. 우리가 신문사회면에서 익히 듣던 학연, 지연이 최대한 동원되는 것이 바로 이 경우다.
선수들은 스스로 공정해질 수 없다. 공정한 게임은 심판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선수 중 누군가가 반칙을 해서 이익을 보게 되면 다른 선수들도 반칙을 하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심판이다. 건축에서 심판은 바로 현상공모의 심사위원들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커다란 심사위원 집단은 바로 교수들이다. 중요한 사업의 공모마감 시점에는 학교 복도가 복잡해진다. 수많은 선수들이 심판의 연구실 앞을 서성거린다. 이 선수들은 반칙을 하는 선수들이다. 심사위원 사전 접촉금지는 대개의 발주처가 내거는 요구조건이다. 그래서 수 백 명의 심사위원풀도 만들고 심사장에서 서약도 받는다. 그러나 이 공정한 의지를 앞장서서 훼손하는 것이 바로 건축계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반칙을 해서 이 반칙이 관례화되어 이것이 반칙인지 아닌지도 혼란스러운 것이 건축계의 현실이다. 세상은 밝은 빛 아래 바로 서겠다는데 도도히 그늘을 만들고 담합하고 휘청거리는 것이 건축계의 오늘이다.
반칙을 바로 잡는 것은 심판인 교수들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궁색하지만 변명은 있다. 짧은 심사시간에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으므로 사전에 설명을 하는 것이 심사를 위해서도 좋다고 한다. 그러나 묻자. 심사시간에 도면을 읽고 파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제출한 집단의 표현능력부족이거나 이를 읽는 심사위원의 이해능력부족 둘 중의 하나다. 그 어느 경우도 공모전이라는 경쟁구도에서 변명의 구실이 되지 못한다. 사전에 설명을 하겠다는 주체가 경쟁사의 계획안을 모략하지 않고 공정하게 장단점을 설명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믿는다면 심사위원의 자격이 없다.
더욱 이 변명이 구차한 것은 설명 자료라는 것을 들고 학교를 찾는 이들이 설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회사에서 시켜서 다른 사람의 설계내용을 몇 마디 듣고 학교를 찾는 이들의 설명을 들어야 도면을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는 허구다.
경쟁의 최선의 가치는 공정한 경쟁이다. 그러나 여기서 등장하는 설명, 홍보는 모두 심사위원 사전접촉, 로비와 완전히 동의어들이다. 설명이 부족하다고 하면 비공식적인 학연, 지연의 틀을 빌리지 말고 공개적으로 발주처에게 요구하여 설명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공정한 게임을 하는 방법이다.
사전에 특정업체의 설명을 들어도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좋은 작품을 뽑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보인다. 그러나 현상공모가 설계경기라는 일본식 조어로 대체될 수 없는 이유는 심사위원들이 줄자와 초시계를 들고 심사장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현상공모 심사의 가장 중요한 잣대는 심사위원들의 가치관과 철학이다. 사전에 특정한 설명을 듣고도 심사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가치관과 철학을 지닌 심사위원이 한국건축계의 다수를 점하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복도의 풍경을 보자. 중요한 사업이 걸린 시기에는 전국 설계사무소 소장, 건설사 현장소장들이 현업을 접은 채 설명 자료를 들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교수의 연구실 앞을 배회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건축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일 수 없다.
다른 변명도 있다. 대학동기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어떻게 막느냐고도 한다. 당연히 문을 걸어 잠글 필요가 없다. 다만 커피마시고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면 된다. 굳이 책상 앞에 현상설계, 턴키제출안을 놓고 설명하려는 것만 삼가게 하면 된다. 심판들이 공정한 게임을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면 선수들이 단념하게 된다. 교수들이 설명을 듣지 않는다고 하면 수 많은 소장들이 자리를 비우지 않아도 된다. 설명 자료를 따로 만든다고 엄청난 액수의 유인물을 새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이 사회와 역사는 증언한다. 미술계의 위신을 수시로 땅에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것은 공모전의 심사비리가 드러났다는 보도들이다. 조선시대의 후반부가 혼탁하고 혼미해진 것은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국가의 공정성이 근본적으로 훼손이 되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출발을 보였던 남아메리카가 오늘날 혼돈의 나락에 빠져있는 것은 바로 공정하지 못한 사회체제 때문이다.
근대사에서 건축으로 본 한국의 출발은 일천했다. 일제 강점기에 의해 전통은 단절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토는 황무지가 되었다. 사회를 꿰뚫고 있던 불공정한 가치체계에서 건축이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회가 별하고 있는 만큼 건축계가 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현상공모, 턴키다. 공정하지 못한 건축의 게임은 수많은 재능 있는 젊은 건축가 지망생들을 건축 외부로 밀어냈다.
한국 건축계가 처한 현실에 대한 한탄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보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탄이 아니고 문제를 바로 잡겠다는 의지다. 그 의지의 표명은 가장 좋은 계획안을 뽑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단추를 끼울 집단을 적시하자면 그것은 교수들이다. 공정한 게임을 위한 노력이 없이 건축계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위선이나 무지 둘 중의 하나다. 교수가 건축의 적이 될 때 건축의 미래는 없다. 교수들이 시작해야 한다.
- PDF 화일: 교수, 건축의 적인가.pdf 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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