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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담은 공간

[2005. 01. 15]

계절을 담은 공간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알싸한 공기로 코가 매운 계절, 시인의 선언은 건축가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그럼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그러잖아도 경기침체와 시설투자 부진으로 밀린 사무소 임대료 걱정이 높은 판이다. 내일 모레면 전당포 노파라도 찾아 나서야 할 지경인데 이젠 아예 집을 짓지 않는단 말이냐.

건축가들이 긴장하는 이유는 그 발언자가 동네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동방의 등불나라 시골 학교 교과서에까지 이름이 실리는 그런 지명도의 시인이 아닌가.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혹은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수작을 부리기 위해서는 그가 언제 누구에게 연애를 걸었다가 성공하고 실패하였는지를 샅샅이 외우고 있어야 했고 또한 결국 그를 죽인 병명이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기 위한 설전에 언제라도 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던 그런 시인이 아니던가. 그런 위대한 시인이 건축가라는 직종의 존폐문제가 달린 사안에 단호히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대시인의 건축종말 묵시록은 건설경기의 수요에 대한 정확한 경제지표를 근거로 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스럽게 아직도 사람들은 집을 짓고 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집을 갖기 위해, 집이 있는 사람들은 더 좋은 집을 갖기 위해 여전히 집을 짓고 있다. 오히려 건축가들이 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그러므로 집을 덜 지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사회적 비난이 있을 만큼 집은 논두렁 밭두렁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지어지고 있다. 물론 건축가들은 여전히 변화무쌍한 경제풍랑에 휘청거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직종 자체의 존폐가 수 일 내로 가시화 될 것 같지는 않다는 믿음으로 세상에 명함을 돌리고 있다. 

건축에 대한 시인들의 위협은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시인은 마음대로 창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좀더 사려 깊은 시인이었다면 남으로 창을 내달라고 건축가에게 요청할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요청하겠다고 시를 쓸 것이다. 그러면 건축가는 북쪽에 혹시 더 훌륭한 경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옆집에서 창 앞에 차면시설을 하라면서 공사중지요구 민원을 구청에 접수할 조짐은 없는지 알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요구가 행복추구권에 근거한 당연한 권리행사인지, 김치냉장고를 개비해야겠다는 의사의 완곡하고도 과격한 표현인지를 가늠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 창을 냄으로써 건축주에게 불필요한 공사비 증가가 발생하지는 않는지, 건물 외관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지를 면밀히 검토한 후 문제가 없다면 기꺼이 시인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덥석 남쪽으로 창을 내겠다고 한다. 학교 교육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이런 단호한 시인과 그의 시를 기꺼이 수록한 교과서 학교 교육을 통해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모범적으로 이수한 모든 졸업생들은 장성한 후에도 모두 창문 방향 결정은 건축주의 고유권한으로 굳게 믿게 되었다. 게다가 이런 시의 가르침에 의해 모든 중요한 창은 남쪽을 향해야 한다는 신념의 범국민적 공감대는 반석처럼 확고하기만 하다.    

시인들의 핍박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건축가들의 시에 대한 경외심은 경외스럽다. 건물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바로 시에 대한 찬미다. 시적(詩的)이다. 돈 안드는 말이라고 지나가는 한마디로 자신의 건물이 시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건축가는 썰렁한 그의 지갑을 기꺼이 털어 동료들에게 술을 살 것이다. 그날의 감격을 달력에 새겨 기억할 것이다. 혹시 그 발언자가 시인이기라도 했다면 건축가의 감동은 배를 더할 것이다. 

건축가들의 애틋한 선망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의 일방적인 횡포는 그치지 않는다. 가요의 가사도 시인이 썼을 것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사랑하는 님과 함께 그렇게 오랫동안 살겠다고 하는 희망사항은 어떤 생물학적, 사회학적 근거로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금지된 사과를 몰래 따먹은 아담과 이브 의 공범 사건부터 그러했다. 먹으라는 쑥마늘을 꾸역꾸역 밀어 넣다 갈라선 곰과 호랑이의 배신 사건 때도 그러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건축가에 대한 무시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가사는 건축가의 존재를 존중하여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달라고 건축가에게 요청하겠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사실 현행 건축사법으로 보아 시인이 집을 설계하고 짓지 못한다는 원천봉쇄의 규정은 없다. 산속 마을의 손바닥만한 집은 시인뿐 아니라 농부도 촌장도 설계하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지역구분도 없고 규모에 대한 고려도 없이 무조건 마음대로 집을 짓겠다는 것은 건축법, 건축사법, 주차장법, 도시계획법 등 다양한 법령의 위반 가능성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불법 자행 의지를 공공의 매체를 통해 이처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사회지도층 인사라고 할 시인들에게 요구되는 책임감 있는 자세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특정집단의 존폐가 달린 문제가 이렇게 쉽게 시로 쓰여지는 이유는 도대체 무언가. 사방을 아무리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건 모두 다 콘크리트 빌딩 숲이라고 건축가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무언가. 사실 사방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면 빌딩 숲은 콘크리트보다는 철골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겉모양만 보아서는 그 구조체가 콘크리트인지 철골인지 건축가들도 헛갈려 하는 경우가 많다. 건물의 외장에는 철판, 돌, 유리가 화려하게 포장되어 그 속내 구조를 좀처럼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건물의 구조체에 대한 단호한 예단으로 자신의 건축적 혜안을 과시한 후 건축가들을 맹비난하는 가요가사를 만들어 사회 구석구석에 전파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건축가들을 한낱 망명정부의 지폐 꼴로 파악하는 범세계적이고 유서 깊은 전통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유년기 시절부터 지속된 교육의 결과로밖에는 판단할 수 없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 모두 함께 돌려 읽은 동화 아기돼지 삼형제가 아닌가 한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들을 위해 간단히 발췌하자면 판본마다 다소의 서술 차이가 있어도 근간이 되는 내용은 이렇다. 아기돼지 삼형제가 각각 짚, 나무, 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늑대가 짚과 나무로 집을 지은 돼지는 잡아먹었거나 혼을 내주었으되 벽돌로 지은 돼지 집에서는 무단주거침입 및 건축물강제철거에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낭패를 보았다더라.

돼지는 과연 어떤 동물인가. 모든 하등한 객체를 지칭할 때 접두사로 널리 사용되는 개보다도 심지어는 뒤에 줄을 서야 하는 그런 존재 아닌가.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한다. 또한 열 두 마리의 동물들이 달리기를 해서 십이간지를 정하자고 했을 때도 거꾸로 세서 거뜬히 일등을 차지한 그런 한심한 동물이 아닌가. 이런 앞뒤 가림이 없는 동물도 휘파람을 불어가면서 짚, 나무, 벽돌의 다양한 재료를 구사하여 지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집이라는 그런 메시지를 이 동화는 전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집을 건축가를 통해 짓지는 않는다. 짚과 나무는 철거민 판자촌을 거론할 때 등가로 표현되는 재료니 이런 집이 건축가 없이 지어진다고 해서 굳이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동화 속의 돼지는 분명 확실한 난방시설을 구비하고 굴뚝까지 제대로 달린 그런 벽돌집까지 자유자재로 지어내고 있는 것이다.  

돼지의 건축 구사능력이 이런 상황이니 십이간지 상의 서열로 볼 때 이보다 지적수준이나 근면함에서 훨씬 앞선다는 동물들의 경우에는 그 능력이 더욱 탁월할 것이라고 동화의 어린 독자들은 짐작할 것이다. 또한 동식물 세계의 동의나 공인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어도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능력이 더욱 뛰어난 것이라고 총명한 어린이들은 판단할 것이다. 따라서 건축가는 세상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은 아마 이 유아기 때부터 주입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동화를 읽는 어린이들이 사실 글씨를 깨치기도 전에 강요당하는 놀이로 집짓기, 혹은 벽돌쌓기 놀이가 있다. 창의력을 키워준다는 장사꾼들의 호들갑스런 선전에 힘입어 조그만 블록으로 집을 짓는 놀이, 아니 훈련은 전 세계 어린이들이 엄마 젖을 떼고 나서 바로 접하는 교육이며 훈련이다. 

플라스틱, 나무 조각을 이리저리 옮겨 쌓으며 어떤 조숙한 어린이들은 장차 건축가가 되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어린이들은 결국 증권 트레이더가 되거나 신문사 기자가 되거나 혹은 닭튀김집 주인이 될 것이다. 미이라가 된 명태를 찢어 소주에 말아먹으며 밤 늦게 시를 쓰는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건 이들은 대개 건축과 관계없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집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라는 신념은 언제라도 살려낼 수 있는 유전자처럼 마음속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건축은 정상적인 대학교육을 마치기는 고사하고 유치원 입학 전에 이미 마무리한 허접한 놀이에 지나지 않을 일이다. 또한 이들에게 건축가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서 보탬도 덜어냄도 하지 못하는 잉여직종 종사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건축의 다툼에서 건축이 일방적인 수모를 겪는 역사는 깊다. 방송매체라면 당연히 지체장애인이라고 표현해야 할 단어를 노골적으로 책 제목에 드러내며 교회당 종치기의 기구한 첫사랑을 설파한 소설이 있었다. 소설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책이 교회를 죽이리라는 섬뜩한 계시를 던진다. 여기서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것은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닌 물리적 구조물로서의 교회인 것이다. 문학이 건축을 죽이리라. 

경기 전력이 일방적일 때 날아드는 최후의 결정타는 선수 빼가기다. 그러잖아도 휘청거리는 전력에서 연봉이 적다는 이유로, 인격적인 대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혹은 감독과의 불화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이유로 주전선수들이 이적해 버린다면 팀은 해체를 심각히 고려해야 할 지경에 이른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사건은 시작되었다. 건축계의 촉망받던 젊은이 김해경을 빼돌려서 이상이라는 번호판을 붙여주고 간판스타라고 만든 것이 바로 문학계다. 전대미문의 현상금을 내걸고 소설을 공모하여 회전목마라는 소설을 당선시킴으로써 또 다른 건축계의 기대주를 빼가려던 음모도 있었다. 다행히 이 당선자가 건축계의 읍소를 받아들여 고액연봉, 주전선수 보장 등의 유혹을 결연히 뿌리치고 아직 건축계의 대소사에 헌신하고 있음은 건축계의 한줌 자존심을 보전하는 전설이 되어 있다. 건축 구단은 그렇게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

이처럼 건축계가 겪어온 수모의 역사는 길고도 기구하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건축가들은 전업과 항복의 예정 없이 업보 같은 건축의 굴레를 안고 지고 살고 있다. 해탈의 시편(詩片)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들에게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시인은 훌륭한 건축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건물 얹힐 땅을 골라내는 혜안이 있다. 자고로 집을 지을 때 기본이 되는 땅의 형상은 배산임수(背山臨水)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갈잎 우거진 산자락이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땅이 이런 조건을 갖고 있지는 않다. 도시의 대지는 거의 모두 강은 커녕 도랑도 보이지 않는 형국에 있다. 그러나  거친 자연환경, 도시환경을 극복하고 훌륭한 주거환경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건축가의 책임이다. 어찌되었건 시인이 택한 대지의 조건은 교과서에서 추천하는 바 그대로다.

기능적 요구조건은 명쾌하다. 식구는 엄마, 누나, 그리고 나다. 아빠는 있더라도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잔소리만 하고 있으니 없는 것이 낫고, 있다 한들 엄마와 같은 방을 사용하겠다고 할 것이다. 일단 방은 세 개면 된다. 마루 혹은 거실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이 거주함으로 필요한 공간 즉 부엌과 화장실, 창고 등의 존재는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물리적 요구조건은 이처럼 명확할수록 좋다.

다음으로 시인이 요구한 것은 무작정 특정한 방향으로 창은 내겠다는 둥, 언덕 위의 빨간 기와집이어야 한다는 둥, 지중해풍의 하얀색 회벽이어야 한다는 둥 건축가의 창조력 발휘를 가로막는 내용이 아니다. 금모래가 보이고 갈잎의 노래가 들려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떻게 보여주고 들려주는가 하는 것은 건축가가 고민할 몫이다. 즐거운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건축가의 창의적인 사고가 빛을 내기 시작한다. 

건축가는 태양의 궤적을 가늠하기도 하고 계절에 따른 잎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할 것이다. 시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드는 사이비 예언자의 방언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데나 창을 뚫어 댄다고 건축이 시가 되지 않는다. 강물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이 방에 가득하게 하기 위해, 물소리 같은 바람소리가 갈숲을 지나 방안 가득 번지게 하기 위해 건축가는 도면의 창을 그리고 지우고 할 것이다. 모형의 창을 뚫었다 막았다 할 것이다. 대개는 실패할 것이다. 미흡하나마 쓸만한 정도의 결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우아한 공간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벽돌과 콘크리트가 아니고 빛과 소리가 만드는 그런 공간이. 건축이 시가 되려고 하는 때가 이런 때다. 언어가 아닌 공간으로 쓰인 시를 건축이 보여주는 것이다.

가끔 질문을 받는다. 어떤 집을 짓고 싶으세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마음 구석에서 흡수지에 물이 스며들 듯 무언가가 번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대답은 이렇다. 내가 지어준 집의 주인이 자리에 누웠을 때 아, 가을이 왔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집. 금모래 빛이 낙엽처럼 눈발처럼 방안 가득 번져있었을까. 갈잎을 헤치고 나온 바람소리가 물결처럼 문지방을 쓸고 지나갔었을까. 아, 가을이 왔구나. 이 집을 만든 그가 이 빛과 소리를 내게 담아주었구나 하고 문득 느낄 수 있는 집. 그런 집이라면 집에 사는 이와 집을 만든 이는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언어로 치환되지 않고 공간으로 이루어진 대화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시는 척박한 땅에서 아직도 건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축가들의 존재의미를 확인시켜 주는 가치일 것이다. 

외로운 자들이 불안스레 가로수길을 헤맨다는 시절, 나의 집이 가을을 담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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