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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영화를 한 편 보고난 느낌이다. 비슷한 종류라면 20세기 초반 인도차이나 반도 배경의 유럽인 주인공 영화겠다. 색으로 치면 세피아겠고 화면으로 보면 고즈넉한 자연과 무질서한 도시가 시간별로 업치락뒤치락 등장하는 그런 영화. 아련한 기억의 영화. 그런데 이 영화의 배경은 한국이다. 주인공은 서대문구 행촌동에 자리잡은 대저택 딜쿠샤의 주인아주머니.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사교계에서 귀부인으로 살도록 예정되었던 인생을 거부한다. 세상 넓은데 거기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며 살겠다며 선택한 직업은 연극배우고 일본에서 만난 남자와 인도에서 결혼한다. 그런데 그 남편은 한국의 미국인 금광사업자였으니 우리의 주인공에게 점지된 귀착지는 서울이었다. 1917년부터 시작된 서울살이의 이야기다.

 

이후는 원산, 금강산은 물론 끊임없이 세계 어딘가를 돌아다닌 아주머니의 모험담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것은 여전히 그 본거지가 서울이기 떄문이다. 그간 사진과 역사책에서 보고 읽었던 어떤 내용보다 이 책은 3.1운동을 더 선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바로 코앞에서 목도한 목격담인 것이다. 1942년, 일본의 진주만공격으로 미국인들이 추방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공이 목격한 서울과 이 땅의 모습은 사진의 풍경보다 훨씬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1990년대 후반부터 서울구석을 돌아다니다 행촌동의 딜큐샤라는 정체불명의 건물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이없어 했던 것은 그 거대한 주택의 이력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황당한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2006년 주인공의 아들이 서울을 방문하면서였다. 주인공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나은 아들이다. 그리고 그녀가 남겨놓았던 유고가 그 아들에 의해 이 책으로 엮인 것이고.

 

책의 사진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그리고 그 은행나무와 딜큐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언덕 위에 홀로 서있던 건물 주위에 지금 다세대주택이 빼곡하니 세월은 분명 흘렀다. 주인공은 1948년 남편의 유해를 양화진에 묻기 위해 한국을 다시 방문했고 다시 딜쿠샤를 만난다. 그리고 그 이후는 한국을 다시 보지 못하고 198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책과 건물이 호기심많고 긍정적인 심성을 지녔던 주인공의 모습을 지금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궁금해진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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