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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수험영어, 영어회화, 그리고 실용영어회화. 모두 학교 다니면서 익숙하게 접한 단어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연히 영어에 관계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저자가 설명하는 또 다른 공통점은 거기 일본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라디오방송을 통해 시작된 영어교육의 다양한 면모가 그런 이름들로 지칭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들이 제목만 바뀐 것이 아니고 성취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모조리 달랐다는 것.

 

중고등학교에서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는데 외국인을 만나서 입도 뻥긋 못하더라는 자탄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당황스럽게 그 자탄의 방향이 바뀐다. 지적해야 할 점은 영어교육이 아니고 교육이라는 것. 교육의 목적지가 어디일까. 일본에서 영문학의 목적지는 외국인과의 대화가 아니라 교양의 축적이었다는 것이다. 영어로 쓴 책을 읽는 교양. 질문은 우리 교육이 과연 그 구도를 알고 영문학을 가르쳤냐는 것이겠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수험영어다. 이것의 목표는 영어와 전혀 관계없는 어떤 기호의 이해다. 성실하게 그 기호를 암기하고 이해한 학생들은 추려내기 위한 고난도 수업과목이었지 유창한 의사소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20세기까지 이런 영어교육을 여전히 이어받고 있었던 우리를 돌아보는 순간이다. 우리의 선생들은, 우리는 그런 목적지에 동의하며 학생들을 교육시켰던 것일까.

 

저자가 들춰내는 바 라디오를 통한 일본 영어교육의 방향전환을 들여다보니 기가 막히는 상황이다. 1930년이 되면서 일본 영어회화 교육은 정치적인 야심의 테두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영어를 통해 일본, 즉 Nippon의 존재를 알리고 오해를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로 번역된 제국주의의 맥락이 탁월하게 읽히는 순간이다.

 

우리의 표준어는 교양있는 서울사람이 쓰는 말이라고 규정되었다고 기억한다.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그 교양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1920년대 일본은 그 교양을 위해 영문학을 가르치지 시작했다고 저자는 서술한다. 그 교육의 도구가 바로 라디오방송이었고. 저자는 이런 사회적 매커니즘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항상 그렇듯이 여전히 근대 일본이 쳐놓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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