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 조선일보 / 당신의 리스트 / 2020. 01. 05
서현
2021-01-05 15:05
조회
271
긴 터널을 벗어나자 눈나라, 아차, 아니고 한강이다. 열차의 밑바닥이 물로 가득해지는 순간이다. 7호선 청담역을 떠난 열차는 뚝섬유원지역을 향해 질주하는 중이다. 완만하고 지루한 오르막길 터널을 지나던 열차가 갑자기 빛 속으로 솟아오른다. 뻥 터지듯, 툭 내쳐지듯, 확 달려들 듯. 그때 펼쳐지는 것이 한강이다. 아니 허공이다, 아니 초현실의 공간이동이다. 암굴벽해(暗窟碧海). 전 세계의 지하철 노선 중 이런 극적 공간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강이 아무 데나 있더냐.
열차의 오른쪽 창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너편 철로를 거치지 않고 더 생생한 한강을 대면할 수 있다. 한강 너머 펼쳐지는 도시 풍경 또한 초현실적이다. 옹기종기 아파트 군락 위로 123층 건물이 생경하게 우뚝하다. 당장 열차에서 뛰어내려 절대반지를 구하러 달려가야 할 듯하다. 지하철 가득 비루한 호빗족들의 일상을 변태 껍데기로 남겨두고. 1250원 찍히는 교통카드로 체험할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변화. 그게 서울의 지하철이다.
지하철은 도시 전경사진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도시의 광장이고 얼굴이다. 그리고 도시 일상의 테마파크다. 세상 구경 중에서 참구경이 사람 구경이라고 했다. 과연 지하철에는 생로병사, 길흉화복의 인생만사를 얼굴에 붙인 군상들이 빼곡하다. 나도 나의 하루 운세를 얼굴에 붙이고 그 무리에 밀려 들어간다.
테마파크의 필수 구비 요소는 궤도가 꼬이는 열차다. 옛날에는 청룡열차라고 통칭했다. 이게 없으면 테마파크라 부르기도 어렵다. 놀랍게 우리의 지하철에도 테마파크답게 마땅히 구비되어 있다. 도시의 기능적 구조물이 이런 장치를 장착했다면 그 연유가 기구할 것이다. 이곳은 단절된 현대사의 매듭이 공간으로 체현되어 묶인 곳이다. 뭐가 그리 기구하기에.
남쪽으로 사당역까지만 연결되었을 때 4호선은 평범한 지하철이었다. 그런데 더 남쪽으로 연장하면서 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연결해야 할 노선은 코레일 구간이었는데 그 코레일은 이전 철도청이었고 이를 더 더듬어 오르면 일제 강점기를 만난다. 그래서 그들은 좌측통행. 그런데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지하철 4호선은 우측통행.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결국 대한민국 여기저기 뿌리 내린 일제강점기의 질곡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통행방향이 다른 두 노선 연결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환승이었겠다.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위대한 엔지니어들은 상상하기 좀 어려운 방식으로 이를 돌파해버렸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방안이었다. 남태령과 선바위역 사이의 동굴 속에서 선로의 좌우를 뒤집었다.
전류공급방식 변경으로 객실 안 일부 전등이 소등되겠다며 안내방송은 담담하다. 하지만 조금 전 왼쪽을 달리던 반대 방향 노선이 문득 오른쪽으로 옮겨와 있는 것은 초현실 체험이다. 전 세계의 희귀 사례일 것이다. 이런 역사를 장착한 도시가 희귀하므로. 분식점 표현으로는 꽈배기, 기하학 표현으로 뫼비우스의 띠가 현실의 공간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건 철마교호(鐵馬交互).
그러나 지하철 탑승은 모험이나 여행 아닌 운송에 가깝다. 우리는 승차하고 하차하면 될 뿐이다. 말하자면 발 달린 짐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승객에게 각각 구비된 눈과 귀는 별 존재 의미가 없다. 열차의 창문 역시 그냥 진화에 뒤처진 흔적기관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가끔 우리의 승차가 기꺼이 여행이 되는 구간이 있다. 승객의 눈이 열리고 짐짝에서 생물체로 순간 변화하는 구간이다. 그 생물체의 서식지는 도시다.
열차가 지상으로 달리는 곳이니 2호선에서는 두 곳이 있다. 북동쪽의 성수구간과 남서쪽의 대림구간이다. 성수구간은 자연지반 위, 대림구간은 도림천 위의 구간이다. 이 차이가 크다. 성수구간은 천문학적 예산이 문제지 마땅히 지하화되어야 할 구간이다. 서울이 이리 바뀔 줄 당시의 누가 내다봤으랴. 그런 애물이니 구간 내내 방음벽이 서 있다. 그러나 대림구간은 방음벽이 없이 도시가 훤히 다 내다보인다. 천변 완충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치로 치면 당연히 대림구간이다.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구간의 참된 가치는 고가 위를 달린다는 점에 있다. 열차가 허공을 주유한다. 이 높이에서 이 속도로 도시구간을 질주하는 경험은 이전 세상의 어느 권력자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다. 그래서 이때 시선을 막는 방음벽의 존재여부가 중요하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창방향은 북쪽이다. 남쪽은 멀리 관악산 전망이 좋지만 햇빛을 마주 봐야 해서 경치가 뿌옇다. 물론 이 구간 풍광이 양쪽 다 두서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고 그런 점에서 항상 더 흥미롭다, 새로운 공사현장과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간판으로 심심할 틈이 없고 그래서 두서없는 도시. 그 도시유람을 제공하는 고상주유(高床周遊).
지하철 여행자에게 좀더 박진감 있는 풍경을 제공하는 지점은 1호선 한강철교 구간이다. 이 구간은 여의도와 노들섬이라는 두 섬 사이를 지난다. 여의도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건물들이 빼곡한 인공구조물의 도시다. 이곳은 고층건물 즐비한 도시의 매력을 철교 구조물 너머 가장 박력 있게 보여주는 곳이다. 최근 정비된 노들섬은 한가한 전원 풍경이니 이 또한 초현실적이다.
이 다리는 한강대교와 원효대교의 사이에 놓여있다. 내 평가로 한강에서 가장 잘생긴 두 다리니 어느 쪽을 보아도 좋다. 간혹 옆 철로로 늘씬한 고속전철이 지나가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나는 저 고속기계가 기계괴음을 내며 철교라는 허공 위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 강철이 만들어낸 도시 풍광이다.
이곳이 특히 더 멋진 시간대가 있으니 여의도 건물군 너머 해가 지는 석양의 순간이다. 최고의 공간과 시간과 속도가 다 맞물리는 지점. 우리 시대에 서울팔경을 뽑는다면 이 경치가 빠질 수 없겠다. 지금 겸재가 살았다면 그는 분명 노들섬에 앉아 한강철교와 여의도의 강철낙조(鋼鐵落照)를 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하철은 어둠을 달리는 숙명을 지닌 물체다. 그래서 이름이 지하철이다. 그런데 그 어둠 속의 질주를 만끽할 수 있는 노선이 있으니 그건 빨간색 신분당선이다. 이 노선이 특별한 것은 기관사의 부재다. 열차 전면이 개방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최고의 자리다. 그래서 신분당선을 타면 굳이 열차의 맨 앞자리로 갈 일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좌석 없다. 그러나 이런 질주에 그런 편의 필요 없다.
터널 속의 열차는 소실점을 향해 내달린다. 초현실적 비례의 초현실적 공간을 초현실적 기계음과 함께 질주, 계속 질주. 벽면의 등간격 조명이 알려주는 노선은 좌우로 휘어 돌며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이건 컴퓨터 모니터의 비디오게임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몰입형 공간감이다. 시속 90 킬로미터의 실제상황이며 실물공간이다. 여전히 질주.
질주무정(疾走無情)의 열차가 속도를 줄여나간다. 터널 너머 빛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달리기만 하는 열차가 어디 있더냐. 캄캄하기만 한 인생은 또 어디 있으랴. 그래도 방심하면 곤란하다. 장미꽃만 만발한 인생은 없다더라. 열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잊지 말지니 아무리 긴 암굴이어도, 얼마나 긴 어둠을 달려도 결국 우리가 내릴 곳은 저 밝은 빛 어디쯤이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1/01/05/NRM32EDJ6ZGAXCZBBNXCCZJBPU/?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
열차의 오른쪽 창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너편 철로를 거치지 않고 더 생생한 한강을 대면할 수 있다. 한강 너머 펼쳐지는 도시 풍경 또한 초현실적이다. 옹기종기 아파트 군락 위로 123층 건물이 생경하게 우뚝하다. 당장 열차에서 뛰어내려 절대반지를 구하러 달려가야 할 듯하다. 지하철 가득 비루한 호빗족들의 일상을 변태 껍데기로 남겨두고. 1250원 찍히는 교통카드로 체험할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변화. 그게 서울의 지하철이다.
지하철은 도시 전경사진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도시의 광장이고 얼굴이다. 그리고 도시 일상의 테마파크다. 세상 구경 중에서 참구경이 사람 구경이라고 했다. 과연 지하철에는 생로병사, 길흉화복의 인생만사를 얼굴에 붙인 군상들이 빼곡하다. 나도 나의 하루 운세를 얼굴에 붙이고 그 무리에 밀려 들어간다.
테마파크의 필수 구비 요소는 궤도가 꼬이는 열차다. 옛날에는 청룡열차라고 통칭했다. 이게 없으면 테마파크라 부르기도 어렵다. 놀랍게 우리의 지하철에도 테마파크답게 마땅히 구비되어 있다. 도시의 기능적 구조물이 이런 장치를 장착했다면 그 연유가 기구할 것이다. 이곳은 단절된 현대사의 매듭이 공간으로 체현되어 묶인 곳이다. 뭐가 그리 기구하기에.
남쪽으로 사당역까지만 연결되었을 때 4호선은 평범한 지하철이었다. 그런데 더 남쪽으로 연장하면서 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연결해야 할 노선은 코레일 구간이었는데 그 코레일은 이전 철도청이었고 이를 더 더듬어 오르면 일제 강점기를 만난다. 그래서 그들은 좌측통행. 그런데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지하철 4호선은 우측통행.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결국 대한민국 여기저기 뿌리 내린 일제강점기의 질곡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통행방향이 다른 두 노선 연결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환승이었겠다.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위대한 엔지니어들은 상상하기 좀 어려운 방식으로 이를 돌파해버렸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방안이었다. 남태령과 선바위역 사이의 동굴 속에서 선로의 좌우를 뒤집었다.
전류공급방식 변경으로 객실 안 일부 전등이 소등되겠다며 안내방송은 담담하다. 하지만 조금 전 왼쪽을 달리던 반대 방향 노선이 문득 오른쪽으로 옮겨와 있는 것은 초현실 체험이다. 전 세계의 희귀 사례일 것이다. 이런 역사를 장착한 도시가 희귀하므로. 분식점 표현으로는 꽈배기, 기하학 표현으로 뫼비우스의 띠가 현실의 공간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건 철마교호(鐵馬交互).
그러나 지하철 탑승은 모험이나 여행 아닌 운송에 가깝다. 우리는 승차하고 하차하면 될 뿐이다. 말하자면 발 달린 짐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승객에게 각각 구비된 눈과 귀는 별 존재 의미가 없다. 열차의 창문 역시 그냥 진화에 뒤처진 흔적기관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가끔 우리의 승차가 기꺼이 여행이 되는 구간이 있다. 승객의 눈이 열리고 짐짝에서 생물체로 순간 변화하는 구간이다. 그 생물체의 서식지는 도시다.
열차가 지상으로 달리는 곳이니 2호선에서는 두 곳이 있다. 북동쪽의 성수구간과 남서쪽의 대림구간이다. 성수구간은 자연지반 위, 대림구간은 도림천 위의 구간이다. 이 차이가 크다. 성수구간은 천문학적 예산이 문제지 마땅히 지하화되어야 할 구간이다. 서울이 이리 바뀔 줄 당시의 누가 내다봤으랴. 그런 애물이니 구간 내내 방음벽이 서 있다. 그러나 대림구간은 방음벽이 없이 도시가 훤히 다 내다보인다. 천변 완충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치로 치면 당연히 대림구간이다.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구간의 참된 가치는 고가 위를 달린다는 점에 있다. 열차가 허공을 주유한다. 이 높이에서 이 속도로 도시구간을 질주하는 경험은 이전 세상의 어느 권력자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다. 그래서 이때 시선을 막는 방음벽의 존재여부가 중요하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창방향은 북쪽이다. 남쪽은 멀리 관악산 전망이 좋지만 햇빛을 마주 봐야 해서 경치가 뿌옇다. 물론 이 구간 풍광이 양쪽 다 두서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고 그런 점에서 항상 더 흥미롭다, 새로운 공사현장과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간판으로 심심할 틈이 없고 그래서 두서없는 도시. 그 도시유람을 제공하는 고상주유(高床周遊).
지하철 여행자에게 좀더 박진감 있는 풍경을 제공하는 지점은 1호선 한강철교 구간이다. 이 구간은 여의도와 노들섬이라는 두 섬 사이를 지난다. 여의도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건물들이 빼곡한 인공구조물의 도시다. 이곳은 고층건물 즐비한 도시의 매력을 철교 구조물 너머 가장 박력 있게 보여주는 곳이다. 최근 정비된 노들섬은 한가한 전원 풍경이니 이 또한 초현실적이다.
이 다리는 한강대교와 원효대교의 사이에 놓여있다. 내 평가로 한강에서 가장 잘생긴 두 다리니 어느 쪽을 보아도 좋다. 간혹 옆 철로로 늘씬한 고속전철이 지나가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나는 저 고속기계가 기계괴음을 내며 철교라는 허공 위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 강철이 만들어낸 도시 풍광이다.
이곳이 특히 더 멋진 시간대가 있으니 여의도 건물군 너머 해가 지는 석양의 순간이다. 최고의 공간과 시간과 속도가 다 맞물리는 지점. 우리 시대에 서울팔경을 뽑는다면 이 경치가 빠질 수 없겠다. 지금 겸재가 살았다면 그는 분명 노들섬에 앉아 한강철교와 여의도의 강철낙조(鋼鐵落照)를 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하철은 어둠을 달리는 숙명을 지닌 물체다. 그래서 이름이 지하철이다. 그런데 그 어둠 속의 질주를 만끽할 수 있는 노선이 있으니 그건 빨간색 신분당선이다. 이 노선이 특별한 것은 기관사의 부재다. 열차 전면이 개방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최고의 자리다. 그래서 신분당선을 타면 굳이 열차의 맨 앞자리로 갈 일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좌석 없다. 그러나 이런 질주에 그런 편의 필요 없다.
터널 속의 열차는 소실점을 향해 내달린다. 초현실적 비례의 초현실적 공간을 초현실적 기계음과 함께 질주, 계속 질주. 벽면의 등간격 조명이 알려주는 노선은 좌우로 휘어 돌며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이건 컴퓨터 모니터의 비디오게임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몰입형 공간감이다. 시속 90 킬로미터의 실제상황이며 실물공간이다. 여전히 질주.
질주무정(疾走無情)의 열차가 속도를 줄여나간다. 터널 너머 빛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달리기만 하는 열차가 어디 있더냐. 캄캄하기만 한 인생은 또 어디 있으랴. 그래도 방심하면 곤란하다. 장미꽃만 만발한 인생은 없다더라. 열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잊지 말지니 아무리 긴 암굴이어도, 얼마나 긴 어둠을 달려도 결국 우리가 내릴 곳은 저 밝은 빛 어디쯤이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1/01/05/NRM32EDJ6ZGAXCZBBNXCCZJBPU/?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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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10. 04. 08도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는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다. 아무리 석가모니지만 요즘 이런 방식의 수업이면 곤란하다. 학기말 강의평가가 좋지 않을 것이다. 학생공감 능력이 부족하더라, 문장구성 능력이 없는 것 같더라, 묵묵부답을 염화시중으로 포장하고 있더라. 비루한 건축 전공 선생에게 이번 제자는 도가 아니고 도시를 물었다. 어떤 도시가 아름답습니까. 속세의 선생은 연꽃무늬 막걸리잔을 들어 답했다. 공정한 사회가 만드는 도시가 가장 아름다우니라. 그런데 혹시 이건 동문서답은 아닌지. 대중 건축강의에서도 역시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어떤 도시가 아름다운 도시인가요. 그 배경에는 우리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는 경험적 전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선망 대상에는 외국의 어떤 도시들이 있겠다. 그 도시들의 공통점을 모으면 선진국 도시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쩌다 선진국이 되었을까. 지금부터 건축의 영역을 넘으나 답을 추리자면 이들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비슷한 환경에서 시작된 사회를 비교해보자. 아메리카 대륙 남북에 유럽 각지에서 침략자, 이주자들이 각각 정착해나갔다.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이들은 대개 신교도하고도 지독한 골수 칼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종교자유 갈구와 절대가난 도피가 이주의 추동력이었다. 선행하면 천국 가느냐는 질문도 이들은 신과의 무엄한 거래시도로 간주했다. 구원에 관한 신의 뜻을 한낱 너희가 알 길이 없으니 남은 것은 극단적으로 성실·청빈하라는 강령이다. 모두의 성실·청빈한 이승 생활을 위해 이들은 권력 균분의 제도를 고안해냈다. 민주주의 신념으로 무장한 국가를 세운 것이다.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이들의 목적은 물질적 기회 획득이었다. 돈만 있으면 면죄부를 사서 천국도 얻을 수 있는 구교 국가 출신이었고 신 외에 신분도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믿었다. 이들이 새 대륙에서 만든 사회는 인종·종교·신분의 기득권이 충실하게 엮인 유기적 조직체에서 출발했고 공식 이면에 비공식이 깔려있었다. 그게 결국 지금 빈부격차 극심한 중남미의 도시 풍경을 만들었다. 아름다워서가 아니고 신기해서 가본다는 곳. 제자들이 다시 묻는다. 아름다운 도시를 위해 무얼 어찌하오리까. 건축 선생이 다시 답하니 시장을 잘 뽑아야 한다. 석가모니와 비슷한 시대 그리스의 선생은 가장 지혜로운 자(philosophos)가 통치하는 사회를 꿈꿨다. 선거는 입후보자 중 누가 가장 지혜로운지 판단하는 다수의 결정이다. 그러나 선거는 왜곡의 위험이 있으니 다수 이익의 대변자 선택과정으로 몰락하는 것이다. 위대한 현자가 중우정치라고 걱정한 그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선거는 이를 훨씬 지나쳐 입후보자 중 누가 진정 부패·부정·부도덕의 화신인지 결판내자는 결투장이 되어버렸다. 선거의 승자는 지혜의 실현자가 아니고 승전 권력의 행사자가 되었으며 다수의 뜻이라고 소수의견을 묵살하곤 했다. 그래서 공평해졌다고. 다수결 원칙으로만 운영되는 사회의 도시에는 숫자만 남는다. 지금 한국의 사회 화두는 주거이되 그 관심사는 오로지 숫자다. 도시 사안은 참으로 복잡하여 규정방법이 다양무쌍하되 규정방법에 따라 누구든지 소수에 속할 수 있다. 누구든 환호와 절규의 주체가 된다. 대안은 사업단위를 작게 만드는 것이다. 사업이 클수록 소수의 절규가 커진다. 한국의 각종 사회지표는 북아메리카에서 수입한 민주주의를 운전하여 남아메리카의 사회구조에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민주주의 발명국에서도 패거리 정치가 횡행하며 정치인 신뢰도는 자동차딜러 바로 위에 있다는 것 정도겠다. 참고로 미국에서 자동차딜러의 신뢰도가 각종 직업군 중 꼴찌다. 좌절이라면 한국에서는 그 순서마저 뒤집혀 있겠다는 것이고. 대한민국은 스스로 공정하다고 확신한 적도, 도시가 아름답다고 자신한 적도 없다. 그래서 피해의식의 지자체장들이 기이한 거대건축사업을 벌이고는 했다. 그러나 도시의 가치를 사진 속에서 찾으면 곤란하다. 도시는 인공의 유기체다. 도시는 일상의 현실이되 모두에게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휠체어, 유모차가 차별 없이 돌아다닐 수 있으면 그 도시는 아름답다. 속세의 비루한 건축 선생이 단언하건대 나는 사회적 소수가 차별받거나 무시되면서도 아름다운 도시를 본 적이 없다.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선전하는 평양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거기서 장애인 배려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 선거가 끝났다. 지자체장 선거인데 엉뚱하게 정권수호·정권심판이라는 구호의 청룡언월도가 난무했다. 당선의 근거가 덜 부패해서인지, 더 지혜로워서인지 지금 알 길은 없다. 지혜로운 분 석가모니는 기꺼이 전륜성왕의 길을 버린 분이었다. 그는 옥좌가 아니고 돌바닥에 앉은 분이셨고 심판이 아니라 자비의 선생이었다. 우리가 그 지혜에 이를 길은 없겠으나 그를 흠모할 수는 있겠다. 이 아침에 보도되는 당선자가 임기 말에 지혜로운 시장으로 기억되기 바랄 뿐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4030337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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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1. 03. 12교과서에 오자가 있다니. 그걸 내가 발견했다. 국사교과서를 펼쳐든 중학생의 사연이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줄문’이거나 ‘줄무늬’로 표기되어야 했을 단어인 ‘즐문’이었다. ‘빗살무늬’로 풀어 표기되는 그것. 물론 그 위대한 발견은 곧 자존심 붕괴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중학생에게 곧 국사는 기이한 단어들만 울창한 단순저급암기과목으로 임의분류되었다. 그러나 그가 훗날 고등창조작업라며 직업으로 선택한 건축인들 국사의 테두리 밖에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땅에 지어진 선사시대의 집 모습은 집이 아니고 토기로 남아있다. 집모양토기를 알현하려면 국립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에 가야 한다. 지금 전시장 한복판을 도도히 점거하고 있는 것이 다시 그것이다. 빗살무늬토기. 선사건축의 탐험자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번에는 표기법이 아니고 형태다. 기이하게 생긴 저것은 과연 무엇이냐. 발레리나도 아닌 그릇 주제에 바닥은 뾰족하여 혼자 서 있을 수도 없다. 길죽 날씬한 비례는 보기 우아해도 뭔가를 담고 꺼내기 불편했겠다. 바깥면에는 바로 그 ‘줄무늬’가 줄 맞춰 새겨져 있다. 게다가 심술 난 중학생이 연필로 분풀이한 듯 아랫단에 구멍도 숭숭 뚫려있다. 곡식을 담으면 술술 새기 십상이니 그릇으로는 치명적 결함이다.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누구냐. 물건이지만 나이가 수천 살이므로 정중히 여쭈자면, 댁은 누구십니까. 선사시대 유물의 정체규명 방법은 문자탐구가 아니고 논리적 추측이다. 그래서 훗날 건축학과 교수가 된 수모의 주인공은 고등하고 창조적인 건축 논리를 이 토기에 들이대기로 했다. 출토지가 모조리 강가라는 공통점에서 출발한다. 강은 백화점이나 마트 식품코너가 아니다. 물고기가 아무 때나 잡혀주지 않는다. 운수 좋은 날은 그날 다 먹기 어려운 양의 물고기가 잡힐 수도 있다. 잉여 발생의 순간이다. 물고기를 보관하는 최선의 방법은 산 채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건 물고기를 강물에 담가 두는 걸 말한다. 이 토기들은 모두 낮은 강물 속에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강바닥은 대개 퇴적연질지반이니 꽂아서 세우려면 바닥이 뾰족해야 한다. 그러면 수심 따라 높이 조절도 가능하다. 수압에 쓰러지지 않으려면 날씬해지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고기를 살려놓으려면 강물이 유통되어야 하는데 아래쪽에 통수구멍이 필요하다. 토기는 수면 위로 상단이 살짝 노출될만한 높이가 되어야 한다. 물에 몸통이 거의 잠긴 토기들을 구분하려면 수면 위의 노출부에 서로 다른 문양들을 새겨넣어야 한다. 토기가 어떤 방향으로 꽂힐지 모르므로 테두리 전체에 새겨야 한다. 그래서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는 수면 높이 따라 모두 수평방향이다. 그 무늬는 사적 소유의 증거일 것이다. 추측이 맞는다면 빗살무늬토기는 국사 외에 미술 교과서에도 실릴 기능주의 미학의 모범 디자인 사례다. 그런데 빗살무늬토기는 멸종했고 밋밋한 토기가 등장했다. 돌의 소진으로 석기시대가 끝난 게 아닌 것처럼 물고기 멸종으로 빗살무늬토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강으로부터 먼 곳에도 살기 시작했다. 농경이 시작되고 토기가 곡물을 담았다. 토기 모양과 출토지가 달라졌다. 놓일 바닥이 달라지자 토기 밑면이 평평해졌다. 물을 담으면서 마구리 모양도 바뀌었고 옆면의 손잡이는 토기의 운송을 설명한다. 거주지가 수원지로부터 멀어진다는 이야기다. 장기보관을 위해 토기 뚜껑도 덮였다. 가야토기 하단의 구멍은 아랫면에 지피던 숯불의 흔적을 유추하게 한다. 합리적 저장과 유연한 유통 요구가 토기의 변화를 요구했다. 그래서 기술적 진보가 필요했는데 그건 토기, 도기, 자기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잉여를 담는 데서 발생한 토기가 건축으로 번역되면 창고가 된다. 창고에 빗장이 채워지고 거기 토기가 보관되면서 소유자 구분의 무늬가 불필요해졌다. 창고의 잉여를 교환하면서 인간의 거처는 서식지에서 도시로 발전했다. 죽은 자들의 알 수 없는 장도를 위해 챙겨줘야 할 것은 충분한 곡식이었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만나는 조그만 집모양토기들은 다 곡식창고 모양 부장품이었을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바꾸는 도시 미래에 관한 질문이 건축계의 유행병인 것 같기도 하다. 바이러스가 도시의 변화방향을 특별히 달리 규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강요된 실험은 더 높은 도시 변화 속도를 요구할 것이다. 미래가 재촉될 뿐이라는 것이다. 잡은 물고기 때문에 강가에 묶여 있던 인간은 물고기를 수조차에 넣어 도시로 운반하는데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 인간은 물고기를 입에 넣으러 횟집에 가는 단계다. 지금은 물고기가 인간의 입으로 좀더 가까이 오기를 요구하는 실험이 진행 중이다. 더 자유로운 저장과 유통의 가능성은 여전히 미래 기술의 가치판단기준이 될 것이다. 예컨데 20세기의 도시를 바꾼 것이 자동차인데 그 자동차의 미래연료가 수소일지 전기일지 빗살무늬토기에게 정중히 묻는다면 조용히 답을 내줄 것 같다. 미래는 과거와 맞닿아 있으니 그 접점을 역사라 부르더라. 그것은 저급암기대상이 아니고 창조의 출발점이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4010198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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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점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1. 01. 15“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네거리에 버린 담배는/내 맘 같이 그대 맘 같이 꺼지지 않더라.” 담배꽁초 무단투기는 과태료 5만 원이라고 지적하면 곤란하다. 1950년의 그는 실연의 우수를 털어내기 위해 도시를 방황 중이다. 이 노래 <서울야곡>의 시작은 이렇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가사 속의 그는 한숨 어린 편지를 찢어버리고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 나온 참이었다. 지척이던 걸음으로 좀더 가면 안국동 네거리다. 그리고 율곡로에 접어들 것이다. 나부끼던 마로니에 잎은 낙엽 되어 떨어지겠다. 그런 계절이 몇 번, 혹은 수십 번 지나가겠다. 그렇게 어떤 공원에 이르러 그는 잠시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가 충무로를 떠났을 때 이곳은 대학캠퍼스였다. 그 대학이 관악산으로 옮기고 남은 터는 주택가로 변했다. 그 일부를 비워 만든 것이 마로니에 공원. 그 구석에 새로 지은 벽돌 건물 두 채의 이름은 <문예회관>. 공원 주변에 맥주집 한두 곳 박혀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곳의 청춘 해방구 돌변 기폭제는 대학로라는 명명에 따른 주말 자동차 통행금지였다. 대학로는 지금 전국 최고의 소극장 밀집 지역이다. 그 공연이라는 방향 설정은 대학로 명명이 아니고 <문예회관>의 존재 덕분이다. 지금 이름은 <아르코예술극장>이다. 이렇게 주변 도시를 바꾸는 핵심건물을 거점시설이라고 부른다. 건물이 잉태하고 잉태하여 도시를 바꾼다. 문화시설이 주변을 문화도시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문 닫힌 신전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면 문화적 허영심 발산·해소처거나. 문화거점시설 성공의 우선 조건은 입지설정이다. 사람들이 어슬렁거릴 주변 환경이 있는 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 성공사례 뒷면에 실패사례가 있다. 초대형문화시설인 <예술의전당> 전면은 왕복 10차선의 남부순환도로고 후면은 우면산이다. 이곳은 변화시킬 주변이 없다. <예술의전당>은 그 내재적 문화폭발력에도 불구하고 밀봉된 문화철옹성, 도시의 폐쇄회로가 되었다. <예술의전당>이 길 건너에 배치되었다면 지금 서초동은 전체가 예술도시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아직 개탄이 이르다. 우리에게는 전 세계가 경이롭게 보아 마땅한 희귀사례가 있으니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의 전면은 과천저수시, 후면은 청계산이다. 템플스테이해야 할 법한 오지에 미술관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미술관에서 굽어보면 오른쪽은 놀이공원, 왼쪽은 동물원이다. 앞뒤로 엄숙하고 좌우로 명랑한 희극적 배치다. 이런 곳에 미술관을 점지한 것은 문화는 고고·우아·고상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산일 것이다. 그래서 문화시설은 근엄·장엄·엄숙해야 하는 신전에 가까운지라 도시에서 멀어졌다. 그 덕에 여름철 애인 동반의 보행방문객들 등에 땀방울이 흘렀다. 그들의 실연 후 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흐르듯. 실연의 방랑자가 더 걷는 동안 세상이 좀 바뀌었다. 문화시설이 접근성 좋은 도심에 있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결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생겼다. 최고의 입지다. 그런데 문화시설이 곧 거점시설이 되지는 않는다. 문화시설의 도시 내 역할은 집객이다. 연주, 관람 전후에 방문객이 먹고 마시고 쉬고 구경해야 하는데 이건 주변의 도시에서 해결할 일이다. 그러면 상권이 살아나고 고고·우아·고상하게 도시가 바뀌기 시작한다. 이때 문화시설은 거점시설이 된다. 거점시설로서 문화시설이 갖춰야 할 요소는, 아니 배제해야 할 요소는 자체 내 소매점이다. 한국에서 정부 투자의 문화시설 건립 이후 요구하는 것이 독자생존이다. 이건 전 세계적으로 성공가능성이 희박한 조건이다. 입장수입 빈궁한 문화시설이 독자생존 압박하에서 선택하는 것은 내부 소매시설 확보다. 그 순간 문화시설은 주변도시와 상권 경쟁관계의 요식업 임대시설이 된다. 고립시설로서 교통체증 유발의 민폐만 주변에 끼친다. 문화시설에서 독자생존 요구보다 중요한 가치는 도시의 변화 가능성이다. 문화시설 지원금 투자보다 훨씬 더 큰 도시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범국민적 가택연금으로 이번 신년·송년음악회 거의 다 취소되었다. 그러나 마로니에잎이 피고 지고 나면 실연(失戀)의 아픔은 잊히고 실연(實演)의 음악당은 다시 활짝 열릴 것이다. 원래 송년음악회에서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필수, 신년음악회에서는 요한슈트라우스의 왈츠가 양념이다. 신년음악회에서 <라데츠키행진곡>에 맞춰 발 구르고 박수 친다고 도시가 바뀌지는 않는다. 매상증가 기대로 주변 상가들도 음악회가 기다려지는 게 중요하다. <합창교향곡>의 감동에 겨운 청중들이 늦은 밤이라도 귀가하지 않고 근처 맥주집으로 향할 수 있어야 하겠다. 맥주집 주인이 그들을 <합창교향곡> 가사처럼 “오 친구여(O Freunde)!”라고 반겨주면 그게 문화도시겠다. 뒤늦게 합석한 바이올린 주자가 맥주집 주인 애창곡 <서울야곡>을 탱고 선율로 들려줄 수도 있겠다. 그때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불 꺼지지 않는 멋진 도시에서 모두 발 구르며 외칠 것이다. 앵콜! https://news.joins.com/article/23970938?cloc=joongang-home-opinioncolumn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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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 조선일보 / 당신의 리스트 / 2020. 01. 05긴 터널을 벗어나자 눈나라, 아차, 아니고 한강이다. 열차의 밑바닥이 물로 가득해지는 순간이다. 7호선 청담역을 떠난 열차는 뚝섬유원지역을 향해 질주하는 중이다. 완만하고 지루한 오르막길 터널을 지나던 열차가 갑자기 빛 속으로 솟아오른다. 뻥 터지듯, 툭 내쳐지듯, 확 달려들 듯. 그때 펼쳐지는 것이 한강이다. 아니 허공이다, 아니 초현실의 공간이동이다. 암굴벽해(暗窟碧海). 전 세계의 지하철 노선 중 이런 극적 공간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강이 아무 데나 있더냐. 열차의 오른쪽 창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너편 철로를 거치지 않고 더 생생한 한강을 대면할 수 있다. 한강 너머 펼쳐지는 도시 풍경 또한 초현실적이다. 옹기종기 아파트 군락 위로 123층 건물이 생경하게 우뚝하다. 당장 열차에서 뛰어내려 절대반지를 구하러 달려가야 할 듯하다. 지하철 가득 비루한 호빗족들의 일상을 변태 껍데기로 남겨두고. 1250원 찍히는 교통카드로 체험할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변화. 그게 서울의 지하철이다. 지하철은 도시 전경사진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도시의 광장이고 얼굴이다. 그리고 도시 일상의 테마파크다. 세상 구경 중에서 참구경이 사람 구경이라고 했다. 과연 지하철에는 생로병사, 길흉화복의 인생만사를 얼굴에 붙인 군상들이 빼곡하다. 나도 나의 하루 운세를 얼굴에 붙이고 그 무리에 밀려 들어간다. 테마파크의 필수 구비 요소는 궤도가 꼬이는 열차다. 옛날에는 청룡열차라고 통칭했다. 이게 없으면 테마파크라 부르기도 어렵다. 놀랍게 우리의 지하철에도 테마파크답게 마땅히 구비되어 있다. 도시의 기능적 구조물이 이런 장치를 장착했다면 그 연유가 기구할 것이다. 이곳은 단절된 현대사의 매듭이 공간으로 체현되어 묶인 곳이다. 뭐가 그리 기구하기에. 남쪽으로 사당역까지만 연결되었을 때 4호선은 평범한 지하철이었다. 그런데 더 남쪽으로 연장하면서 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연결해야 할 노선은 코레일 구간이었는데 그 코레일은 이전 철도청이었고 이를 더 더듬어 오르면 일제 강점기를 만난다. 그래서 그들은 좌측통행. 그런데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지하철 4호선은 우측통행.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결국 대한민국 여기저기 뿌리 내린 일제강점기의 질곡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통행방향이 다른 두 노선 연결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환승이었겠다.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위대한 엔지니어들은 상상하기 좀 어려운 방식으로 이를 돌파해버렸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방안이었다. 남태령과 선바위역 사이의 동굴 속에서 선로의 좌우를 뒤집었다. 전류공급방식 변경으로 객실 안 일부 전등이 소등되겠다며 안내방송은 담담하다. 하지만 조금 전 왼쪽을 달리던 반대 방향 노선이 문득 오른쪽으로 옮겨와 있는 것은 초현실 체험이다. 전 세계의 희귀 사례일 것이다. 이런 역사를 장착한 도시가 희귀하므로. 분식점 표현으로는 꽈배기, 기하학 표현으로 뫼비우스의 띠가 현실의 공간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건 철마교호(鐵馬交互). 그러나 지하철 탑승은 모험이나 여행 아닌 운송에 가깝다. 우리는 승차하고 하차하면 될 뿐이다. 말하자면 발 달린 짐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승객에게 각각 구비된 눈과 귀는 별 존재 의미가 없다. 열차의 창문 역시 그냥 진화에 뒤처진 흔적기관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가끔 우리의 승차가 기꺼이 여행이 되는 구간이 있다. 승객의 눈이 열리고 짐짝에서 생물체로 순간 변화하는 구간이다. 그 생물체의 서식지는 도시다. 열차가 지상으로 달리는 곳이니 2호선에서는 두 곳이 있다. 북동쪽의 성수구간과 남서쪽의 대림구간이다. 성수구간은 자연지반 위, 대림구간은 도림천 위의 구간이다. 이 차이가 크다. 성수구간은 천문학적 예산이 문제지 마땅히 지하화되어야 할 구간이다. 서울이 이리 바뀔 줄 당시의 누가 내다봤으랴. 그런 애물이니 구간 내내 방음벽이 서 있다. 그러나 대림구간은 방음벽이 없이 도시가 훤히 다 내다보인다. 천변 완충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치로 치면 당연히 대림구간이다.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구간의 참된 가치는 고가 위를 달린다는 점에 있다. 열차가 허공을 주유한다. 이 높이에서 이 속도로 도시구간을 질주하는 경험은 이전 세상의 어느 권력자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다. 그래서 이때 시선을 막는 방음벽의 존재여부가 중요하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창방향은 북쪽이다. 남쪽은 멀리 관악산 전망이 좋지만 햇빛을 마주 봐야 해서 경치가 뿌옇다. 물론 이 구간 풍광이 양쪽 다 두서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고 그런 점에서 항상 더 흥미롭다, 새로운 공사현장과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간판으로 심심할 틈이 없고 그래서 두서없는 도시. 그 도시유람을 제공하는 고상주유(高床周遊). 지하철 여행자에게 좀더 박진감 있는 풍경을 제공하는 지점은 1호선 한강철교 구간이다. 이 구간은 여의도와 노들섬이라는 두 섬 사이를 지난다. 여의도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건물들이 빼곡한 인공구조물의 도시다. 이곳은 고층건물 즐비한 도시의 매력을 철교 구조물 너머 가장 박력 있게 보여주는 곳이다. 최근 정비된 노들섬은 한가한 전원 풍경이니 이 또한 초현실적이다. 이 다리는 한강대교와 원효대교의 사이에 놓여있다. 내 평가로 한강에서 가장 잘생긴 두 다리니 어느 쪽을 보아도 좋다. 간혹 옆 철로로 늘씬한 고속전철이 지나가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나는 저 고속기계가 기계괴음을 내며 철교라는 허공 위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 강철이 만들어낸 도시 풍광이다. 이곳이 특히 더 멋진 시간대가 있으니 여의도 건물군 너머 해가 지는 석양의 순간이다. 최고의 공간과 시간과 속도가 다 맞물리는 지점. 우리 시대에 서울팔경을 뽑는다면 이 경치가 빠질 수 없겠다. 지금 겸재가 살았다면 그는 분명 노들섬에 앉아 한강철교와 여의도의 강철낙조(鋼鐵落照)를 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하철은 어둠을 달리는 숙명을 지닌 물체다. 그래서 이름이 지하철이다. 그런데 그 어둠 속의 질주를 만끽할 수 있는 노선이 있으니 그건 빨간색 신분당선이다. 이 노선이 특별한 것은 기관사의 부재다. 열차 전면이 개방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최고의 자리다. 그래서 신분당선을 타면 굳이 열차의 맨 앞자리로 갈 일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좌석 없다. 그러나 이런 질주에 그런 편의 필요 없다. 터널 속의 열차는 소실점을 향해 내달린다. 초현실적 비례의 초현실적 공간을 초현실적 기계음과 함께 질주, 계속 질주. 벽면의 등간격 조명이 알려주는 노선은 좌우로 휘어 돌며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이건 컴퓨터 모니터의 비디오게임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몰입형 공간감이다. 시속 90 킬로미터의 실제상황이며 실물공간이다. 여전히 질주. 질주무정(疾走無情)의 열차가 속도를 줄여나간다. 터널 너머 빛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달리기만 하는 열차가 어디 있더냐. 캄캄하기만 한 인생은 또 어디 있으랴. 그래도 방심하면 곤란하다. 장미꽃만 만발한 인생은 없다더라. 열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잊지 말지니 아무리 긴 암굴이어도, 얼마나 긴 어둠을 달려도 결국 우리가 내릴 곳은 저 밝은 빛 어디쯤이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1/01/05/NRM32EDJ6ZGAXCZBBNXCCZJBPU/?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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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12. 18“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구성지고 낭랑한 노래다. 서울 가는 열차창 너머에서 경상도 아가씨가 슬피 우는 중이란다. 그런데 이 노래의 탄생배경은 뭘까. 모범답안은 한국전쟁과 피난살이겠다. 그러나 입장이 다른 답도 있을 것이다. 서태지 이후 세대라면 노래 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 맥락 없는 토목엔지니어라면 무미건조하게 대답할 것이다. 경부선 준공. 조선 시대의 지도에서 부산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19세기가 다 끝날 때까지 부산은 동래성 옆의 작은 글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 바닷가 한촌이 대한민국 두 번째 규모의 도시가 되는 기폭제는 철도부설이었다. 그 철도가 지금 나그네를 싣고 떠나는 경부선이었고. 철도 시대 이전에 서양인들이 도착하는 곳은 부산이 아니고 제물포였다. 그들은 우마차에 실려 이어지는 구절양장 진창길에 넌더리를 냈다. 그리고 만난 종착점 도시의 조용한 기괴함에 놀라워했다. 그게 한양이었다. 새 아침이 밝았으니 새벽종을 울리고 새마을을 만들자고 하기 전까지 이 나라는 아침에도 고요했다. 그래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도성의 고요를 처음 흔들어 깨운 건 남대문 밖 기차역의 기적소리였다. 첫 철도를 놓기로 했을 때 그 노선이 경인선이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도대체 어떤 능란한 교섭능력의 소유자였는지 알 수 없으나 미국인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낸 것이 1896년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892년부터 인천이 아닌 부산을 한양과 연결하는 철도 계획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철도의 존재가 절박했던 것은 당연히 일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대륙 진출과 교두보 확보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동치던 대한제국의 역사 따라 철도부설의 주체들도 엎치락뒤치락했다. 신의주를 한양과 연결하는 철도를 처음 구상한 것은 대한제국이었다. 철도는 대한제국에게도 대륙으로 향하는 신작로였겠다. 그러나 1905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일본군부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즉시 경의철도 부설권을 확보했다. 그들의 야망은 한반도 너머에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하나로 수렴한다. 경인·경부·경의선 모두 일본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공통점은 교행 시 좌측통행.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 시 오십 분.” 부산만큼 존재도 희미했던 대전이 핵심도시로 등장하게 된 것도 철도 덕이다. 정확히 말하면 역의 설치다. 그런데 부산역과 대전역은 다 역이지만 건축적으로 보면 영어 단어가 다르다. 부산역은 터미널(terminal)이고 대전역은 스테이션(station)이다. 굳이 구분한다면 종착역과 정거장이다. 정거장은 종착역에 이르기 위해 잠시 서는 곳이다. 그래서 서울·대전·평양역이 다 정거장이다. 대륙으로 가기 위해 잠시 서는 곳. 서울역이 정체성 혼란에 빠진 것은 남북분단 때문이다. 신의주 가는 철도가 막히면서 서울역은 정거장이 아니고 종착역이 되었다. 경의선의 종착역은 문산역으로 바뀌었으니 경문선이라 불렸어야 마땅했다. 그 사이 고속철도가 개통하면서 서울역은 아예 대놓고 종착역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을 호령하던 건물로서의 서울역은 엉뚱하게 전시관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서울역은 민자역사라는 제도 덕에 수모스럽게 백화점 부속시설로 몰락했다. 대한민국 수도 중앙역의 체면이 도대체 말이 아니다. 지금 서울역은 종착역과 정거장의 단점을 골고루 골라 담고 있다. 철도의 문제는 도시를 극단적으로 양분한다는 것이다. 철도역사의 전면은 문명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되 후면은 도시의 그늘로 남는다. 그건 서울·대전·평양역이 모두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서울역 고가도로가 <서울로 7017>로 바뀌었을 때 서울역 후면에서 벌어진 도시변화는 그 단절의 폭을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철도가 국토를 바꿨다. 그런데 지난 세기 국토변화의 관점에서 철도부설보다 큰 사건은 분단이었다. 결국 서울역의 미래 모습은 우리가 분단 국토의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는데 달려있다. 그것은 경문선이 아닌 경의선의 가치와 가능성을 묻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토 그림이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둔다면 경부선은 대륙과 대양을 잇는 동맥이겠다. 그 고리가 부산역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부선과 경의선이 바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 고리는 서울역이다. 백 년 전에 깔린 경의선은 당시의 기술 한계에 의해 지형을 따라 구절양장 휘어있다. 우리가 연결해야 할 것은 거의 열 배의 속도로 내달리는 철도다. 경의선의 기존 구간을 버리고 지하로 연결한다면 경부선과 경의선은 이어질 수 있다. 서울역도 지하화한다면 종착역과 정거장의 장점을 골라담은 역이 되겠다. 서울역 주변이 다 바뀔 것이다. 부산역도 육지 끝의 종착역이 아니고 바다를 향한 길의 출발역이 될 수 있다. 대륙과 대양을 잇는 다른 의미의 정거장이 되겠다. 그건 국토 내 어떤 도시도 갖지 못한 가능성이다. 구성지고 낭랑한 노래는 부산역이 종착역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여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https://news.joins.com/article/23948648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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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11. 20덮어놓고 낳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한다. 1963년에 등장했다는 계몽표어다. 화끈하다. 지금의 최저출산율국가 타이틀은 저런 과격한 산아제한의 위대한 성취가 아닐지. 도대체 얼마나 애를 낳았기에 저리 절박한 모습으로 등장했을까. 2백만 명이던 서울인구는 1963년이 되자 갑자기 3백만 명으로 바뀐다. 서울시민들이 합심·작심하여 같은 날 덮어놓고 애들을 백만 명 낳은 건 아니겠다. 서울시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다. 경기도 광주 일부도 지금의 말 많은 서울 강남이 되는 순간이었다. 서울 인구는 1988년에는 1천만 명에 이른다. 25년 동안 7백만 명이 증가했다. 이번에는 행정구역 변화도 아니다. 굳이 따지면 은평구 북쪽 일부가 살짝 더해졌을 따름이다. 계몽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민들은 덮어놓고 저리 아이들을 낳았을까. 서울시의 모든 결혼 세대가 아이 일곱을 골고루 낳았으면 저 숫자가 성취된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의 소위 586세대들은 거의 십 인 가족의 자녀여야 한다. 서울은 거지천국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건 대한민국의 압축성장기로 불리는 시대다. 거지꼴이 된 게 아니고 오히려 졸부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서울의 인구증가가 생물체로서의 자연증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이것은 사회적 증가였다. 그걸 우리는 ‘무작정상경’이라는 단어로 불렀다, 그들이 7백만 명 증가의 대다수를 구성했다는 이야기다. 이 막대한 상경인구가 서울에서 재집결하여 만든 결사체가 재경향우회다. 다른 국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신기한 조직체다. 이들은 떠나온 고향과 도착한 서울에 각각 독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암약하는 정치집단이 되었다. 선거철이면 출마자의 정치적 배경과 공약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고 자신이 속한 향우회와의 친소관계로 투표성향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끝에 물어야 했던 문장이, 우리가 남이가? 막강했던 향우회의 결집력과 영향력 쇠퇴가 하루가 다르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이미 향우회 총회 개최가 무산되는 사례도 등장했다. 그 자리를 재경동문회가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1천만 명 이후 서울 인구집중의 양상변화를 보여준다. 즉 무작정상경이 아니고 대입상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 동력을 보여주는 단어가 대학 입시철이면 등장하는 ‘인서울’이다.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 인터넷 검색으로 줄줄이 엮여나오는 이 암호는 공고하게 자리잡은 대학의 서열이다. 이야기의 요점은 여기 지방대학이 모조리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인서울’이 낳은 것은 결국 지방인구 감소다. 상경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절대 지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서울에서 취업하고 결혼하여 어렵게 생존해나간다. 그리고 거지꼴이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출산을 포기한다. 인구가 감소하니 지방대학은 더 어려워진다. 국가균형발전의 당위성은 충분하고 정부의 의지도 여전히 강력하다. 그래서 온갖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서울인구를 지방으로 뿌리겠다고 한다. 그런데 직장 따라 뿌려져야 할 그 인구가 가족해체의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뿌려지지 않는다. 가장을 제외한 가족이 서울에 남는 이유도 결국 대학이다. 그 자녀가 대입에서 ‘인서울’하려면 결국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이 순환구도가 극복되지 않으면 국토균형발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핵심은 대학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국가균형발전’을 입력하면 죄 토건사업이 나온다. 내년 사회간접자본 예산책정의 배경에 깔린 단어도 국가균형발전이다. 예비타당성 검토도 건너뛰고 덮어놓고 토건사업에 예산을 몰아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치료의 전제는 진단이다. 수도권 인구집중은 증상이되 원인은 교육과 취업이다. 교육이 앞에 있다. 치료법은 지역안배 토건사업이 아니라 지방거점 국립대학 경쟁력강화와 육성이다. 보고서 받고 검증·선정한 후 무늬만 갖춘 사립대학들 눈치도 보면서 공평하게 몇 푼 주겠다고 하지 말고 지방거점 국립대학을 덮어놓고 지원할 일이다. 지방거점 국립대학은 명확한 공공재다. 이들이 균형발전의 거점이고 촉매가 되어야 한다. 대학은 학생·교수·시설의 복합체다. 장학금·연봉·시설비 모두 예산을 요구한다. 여전히 효과여부로 논쟁이 분분한 사대강사업의 예산이면 전국 지방거점 국립대학 대학생 전원에게 25년간 전액장학금을 줄 수 있었다. 젊은 교수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인서울’해야 한다며 연봉만으로는 지방행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은퇴한 교수도 청년들이다. 이들을 석좌교수로 초빙할 수 있고 이들은 여전히 좋은 교육을 시행할 수 있다. 대학이 지역문제를 모두 해결하지 않지만 대학 빼고 한국의 지역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대한민국 압축성장의 동인으로 짚어야 할 것은 전 국민적 교육열기였다. 그 열기가 서울로만 모여 ‘인서울’이 되었다. 오래된 표어가 다시 환생해야 하겠다. 지역이 거지꼴을 면하게 하려면 지방거점대학에 덮어놓고 투자해야 한다. 그 투자는 건설이 아니고 교육이라고 부른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925476?cloc=joongang-home-opinioncolumn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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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10. 23시속 23.8km. 한강공원의 자전거 속도겠다. 변속기어 장착하고 쫄바지를 걸쳤는데 이 속도면 느리다고도 해야겠다. 그런데 이게 백 마리 넘는 말들이 힘을 합쳐 뛴 속도다. 서울시 자동차 평균 주행 속도. 2019년 서울시 등록 자동차는 312만대다. 그중 승용차가 267만대다. 일상으로 접하는 그 승용차의 정체를 가정하자. 배기량 2000cc의 현대 쏘나타라면 큰 무리는 없겠다. 이게 160마력짜리 마차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시에 4억 3천만 마리의 말이 뛰어다니는 중이다. 서울시는 전체 자동차 운행 거리 통계도 알려준다. 이걸로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산수를 하면 알기 쉬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계산하면 승용차 한 대의 연간 주행거리는 1만 1천km를 약간 넘는다. 하루에 평균 31km 주행이다. 쏘나타 마차 값이 3천만 원이라면 말 한 마리 값은 19만 원 정도다. 연비가 리터당 13km정도라니 연간 여물값은 요즘 유가 기준으로 마차당 백만 원, 말 한 마리당 6천 원이 좀 넘는다. 이전 시대에 상상 못 하던 저렴한 호사다. 그런데 이 여물이 화석연료라 재생 불가능하고 죄 이산화탄소로 배출되어 지구를 덮는 게 문제다. 마차당 하루 주행시간은 1.3시간 정도다. 마부들은 일 년이면 이십 일 정도를 마부석에 앉아 보낸다. 문제는 나머지 시간이다. 일 년의 345일간 말들이 할 일 없이 서 있다는 이야기다. 즉 4억 2천만 마리의 말들은 항상 어딘가에서 잠을 자든 여물을 먹든 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건물마다 다르나 주차장법에서는 대개 면적 150m2당 주차장 한 면 설치를 요구한다. 설계를 해보면 건물 지하에 주차장 한 면 설치하는데 35-40m2 정도가 필요하다. 진입로와 기계환기 장치 공간들이 포함된 면적이다. 자동차는 지표면에 가까운 공간을 요구하고 그런 곳은 땅값도 비싸니 마차보다 마구간 값이 훨씬 비싸다. 그래서 건물 만들 때 마구간 설치에 인색해진다. 법규 기준 이상으로 주차장 설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서울시의 주차장 보급률은 136%다. 서울시 전역이 주차문제로 골머리인데 주차장은 저처럼 여유가 있다니. 답은 마차가 이동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몰고 나갔다가 다소곳이 집에 돌아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출발지와 목적지에 주차장이 한 면씩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마차는 하나가 아니라 두 면의 주차장을 요구한다. 그래서 서울의 주차장은 64% 공급 과부족이다. 종로구·중구·용산구 합친 바닥 면적이 주차장으로 추가 필요하다. 마구간 못 찾은 마차들은 결국 길 위 어딘가에 서있어야 한다. 그곳은 후미진 골목이나 인도 위일 가능성이 높다. 인구 천만 명인 도시에서 125만대 마차를 끌던 2억 마리 말들이 마구간도 길도 아닌 어딘가를 배회하는 중이다. 그래서 서울시의 보행환경은 아주 좋지 않다. 자동차 발전은 눈부시다. 블랙박스는 물론이고 온갖 센서로 무장한 상태다. 시간과 에너지 소모를 마른 수건 짜듯 줄여준다. 연비 증진을 위해 정차 중에는 엔진이 꺼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자동차마다 장착한 저 내비게이션은 놀라운 예지로 합리적인 길을 인도한다. 인공위성들이 알려주는 위치 정보를 상대성이론으로 계산하여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최적 알고리즘으로 해석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물건이란다. 그런데 그 최첨단 기계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다 눈을 들면 가끔 엉뚱한 현실을 만난다. 빨간 신호등. 서울시의 신호등들은 시간대 실시간 제어라는 체계로 운용된다고 쓰여있다. 멋진 용어다. 요일과 시간대별로 데이터베이스를 입력하여 정해진 시간에 자동으로 빨간 불이 켜진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실시간 교통상황이 아니라 과거의 교통상황을 근거로 작동한다는 이야기. 지금 운전자들이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이 지난 통계에만 근거해 최적의 경로라고 알려준다면 그 업체는 이미 도산했을 것이다. 지난 세기 국토의 구조를 바꾼 것이 기차다. 개항 후 제물포 노량진 간 시속 20km였던 기차 속도는 300km가 되었다. 도시의 구조를 바꾼 것은 자동차다. 자동차 덕분에 도시가 커졌고 자동차 없이 도시가 작동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의 도시는 좀 이상하다. 다음 세대의 자동차는 배설물 없는 말이 끌고 마부도 필요없다고 한다. 그런데 저런 첨단 기계들이 결국 마차 속도로 돌아다니는 도시라면 구조적인 문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 도시가 불합리하고 비능률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겠다. 텅 빈 길에서도 빨간 신호등은 껌뻑껌뻑 켜진다. 악법도 법이다. 테스형이 툭 내뱉고 간 말에 수 많은 마부들은 브레이크를 밟는다. 그래서 시속 19.6km. 이건 서울시 중구의 평균 자동차 속도다. 스마트시티가 화두고 정보화에 미래가 있다는 세상이다. 과거형 자동점멸 신호시스템이 자동차 공회전 부추기고 이산화탄소발생 높인다. 백 마리 말을 몰아도 여전히 마차 속도를 내는 도시라면 테스형, 도시는 왜 이래. https://news.joins.com/article/23901621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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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09. 25여름이 지났다. 참으로 기이했던 계절이다. 전례 없는 비를 쏟았다. 그래서 전례 없는 더위를 예보했던 기상청이 전례 없이 뻘쭘해졌다. 그래서 뻘쭘해진 건 선풍기도 마찬가지였다. 날개 몇 바퀴 돌려보지도 못한 채 시름시름 어딘가에 처박혔겠다. 그 선풍기를 들여다보면 의아한 것이 눈에 띈다. 왜 스위치들이 죄 바닥에 붙어있는 것이냐. 물론 리모콘 구동의 제품들도 있다. 하지만 거의 다. 그 위치를 이해하려면 우선 사용자의 자세부터 보아야 한다. 그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던 참이었겠다. 우리는 이를 좌식생활이라 부른다. 그 배경에 온돌이 있었다. 일본이라면 다다미겠다. 그들은 바닥에 붙어있던 엉덩이를 떼지 않고 끌고 가서 선풍기의 스위치를 누르고 돌렸던 것이다. 한국 주거의 방을 규정하는 것은 유서 깊은 온돌이다. 온 민족의 엉덩이나 등이 거기 밀착된 생활이었다. 아파트도 처음에는 연탄 아궁이가 있는 온돌방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서양에서 들여온 이 고급진 주거가 연탄 아궁이와 잘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곧 아파트의 조심스런 실험이 시작되었으니 거실과 주방에는 스팀 라디에이터가 설치된 것이다. 방만 온돌이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거실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바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게 곧 판명되었다. 라디에이터가 퇴출되고 거실에도 온돌이 들어왔다. 지금 대한민국의 주거 난방은 온수파이프 깐 온돌이 평정했다.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건축가들에게 선택 고민이 필요 없는 사안이다. ‘보일러’로 작동하는 ‘라디에이터’가 들어오던 딱 그 시기에 부엌에는 ‘싱크’, 거실에는 ‘소파’가 들어왔다. 이들은 이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물건임을 그 이름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방에 침대가 밀고 들어왔다. 공간과 가구의 부정교합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침대가 바닥에서 마땅히 올라올 복사열을 막기 때문이다. 이상한 조합이다. 그래서 침대와 온돌이 함께 그리운 이들을 위해 발명된 것이 돌침대니 이건 사실 논리모순의 기이한 물건이다. 기이한 현상은 거실에서도 발견된다. 진공관 시대의 라디오는 가구 크기였고 당연히 주택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놓였다. 그 주위에 가족이 반원형으로 모여 앉았다. 티비가 등장하면서 가족의 배치가 바뀌었다. 티비를 마주 보고 횡대로 앉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전 세계 공통 풍경이다. 우리에게도 아파트 거실에서 티비의 반대쪽에 소파가 놓이는 풍경이 수입되었다. 다음부터 기이하다. 소파는 분명 좌식 가구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한국인의 자세는 좀 복잡하다. 그들의 태반은 소파를 등받이로 사용한다. 방바닥에 내려와 정형외과 의사들이 혐오하는 다양한 자세로 앉는 것이다. 그러다 불편해지면 다시 소파 위로 올라가며 자세 교체를 시도한다. 게다가 한국의 소파는 앉기보다 눕는 가구에 훨씬 가깝다. 입적을 앞둔 부처님 자세로 제자들 아닌 티비를 보고 누워 열반을 꿈꾼다. 아파트에서 태어난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침대에서 자고 식탁에서 먹던 세대들이 방바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온돌 난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좌식생활을 거부하는 것이다. 게다가 밥상 위에 밥그릇을 실어나르던 세대들까지 점점 식탁에서 밥을 먹더니 이제 좌식생활의 관절염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아파트 밖에서 확연하다. 세계의 문화사가 증명하되 가장 변화저항이 강한 것이 장례문화다. 그런데 한국은 매장이 화장으로 바뀌는데 한 세대도 필요치 않았다. 게다가 장례식장 접객식당도 순식간에 입식으로 변해나갔다. 민감하고 민첩한 변화가 생존의 길인지라 바닥에 앉아 먹던 시장 식당들도 모두 식탁과 의자를 들여놓았다. 선풍기 스위치를 보면 여전히 당황스럽다. 늘어선 그것들은 각각 정지, 속도, 회전을 규정하는 다른 용도를 갖지만 그냥 같은 모양들이다. 각각의 용도를 알려면 그 아래 글자를 읽어야 한다.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맹렬히 비판하는 사례들이다. 변화한 한국인들은 변치 않는 방바닥의 선풍기 스위치를 손가락 아니라 발가락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가락이 진화한 게 아니고 생활이 입식으로 변했을 따름이다. 날개 없는 선풍기와 에어컨이 바람을 뿜는 시대다. 지난 여름 아직도 바닥에 스위치를 놓고 버티던 선풍기들의 고집이 놀랍다. 아궁이에 연탄 갈던 시대의 가치로 도도히 버텨 보겠다는 듯 보여서다. 가을이다. 계절이 바뀌었으므로 우리는 옷을 바꿔입는다. 사용자가 변하므로 아파트도 달라지겠다. 지금도 대개 거실의 설계 도면은 티비와 소파의 대면 상태로 그려지지만 현실 풍경은 다양하게 다르다. 궁금해진다. 한번 침실에 들어간 침대가 다시 나오지는 않겠고 그 생활자들이 방바닥으로 다시 내려오지도 않겠다. 그렇다고 바닥난방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파트는 미분양의 폭발력이 큰 시장이라 실험이 어렵다. 아주 느린 진화만 가능한 건물형식이다. 그럼에도 부정교합의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는 공급자들은 결국 도태될 것이다. 스위치로 표현되는 선풍기 운명처럼 그 변화가 궁금할 따름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880731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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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08. 28발바닥은 좁되 엉덩이는 넓적하고 등이 편편하다. 인간은 걷기보다 누우려 한다. 인간은 게으르며 더욱 게을러지고자 한다. 오늘의 게으름을 내일로 미루지도 않는다. 더 게을러질 수 있는 내일 대신 그냥 오늘의 게으름을 선택한다. 바꾸는 게 더 귀찮은 것이다. 인간은 모일수록 더 게을러진다. 그래서 사회는 잘 바뀌지 않는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자판을 들여다보자. 영문자판 왼쪽 위에 QWERTY가 가지런히 모여있다. 사연은 기계식 타자기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초기 타자수들은 당연히 속도가 경쟁력이었다. 그런데 자판을 빨리 두드리면 먼저 친 활자와 다음 활자가 꼬이는 사태가 빈발했다. 제조업체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치기 어려운 자판 글자 배열. 그래서 모음은 좌우 분산배치되었고 연속 사용빈도가 특히 높은 ER은 고약하게 왼손하고도 저 위에 붙어 자리를 잡았다. 쿼티자판의 탄생설화다. 기계식 타자기가 전자식으로 바뀌고 컴퓨터, 핸드폰으로 진화했다. 타자수가 사라지고 독수리타법족·엄지족이 등장해도 불편한 자판배열은 굳건하다. 편리한 자판보다 익숙한 자판을 계속 쓰겠다는 게으름이다. 이걸 사회적 관성이라 부를 것이다. ‘자판’은 무엇인가. 문자를 입력하는 도구다. 그래서 쿼티자판은 자판이다. 그렇다면 ‘좋은 자판’은 무엇인가. 문자를 편하고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 도구다. 이때 쿼티자판은 좋은 자판은 아니다. 게으른 인간의 등을 떠밀어 사회혁신을 강요하는 기제가 있으니 전쟁과 역병이다. 지금 역병 창궐로 전 세계가 사회적 실험에 돌입했다. 외출억제·이동억제·집회억제. 이 덕분에 사회와 도시의 근본을 성찰하는 기회도 생겼다. 다시는 이전 사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일부는 그럴 것이다. 유럽의 흑사병이 낳은 부산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다. 세계관이 바뀐 것은 틀림없다. 콜레라로 사회의 위생관이 바뀌고 도시의 상수원이 정리된 것도 맞다. 지금 전 세계 여행·운항·이동 업체가 도산위기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미국 몇 기업의 가치상승이다. 아마존·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애플·테슬라 등이다. 이들 기업을 묶어 교집합을 추리면 이렇게 수렴한다. 이동의 대안. 운반이거나 전송일 수도 있다. 물품·정보를 더 싸고 편하고 빠르게 옮겨주는 회사들. 게으른 인간을 더욱 게으르게 해줄 유통대안을 내세운 기업들이다. 인간이 이동해야 하는 산업이 대체되는 실험 중이다. 산이 다가오지 않자 산에게 걸어간 것은 마호멧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 기업 덕에 이제는 기어이 산이 인간에게 오길 기대하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몇몇 기관과 제도의 실상과 가치도 엿보게 되었다. 어떤 종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을 만나는 게 목적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경기장은 경기를 보는 게 아니고 모여 아우성치는 곳이었다. 음악당은 더 좋은 음향의 음악을 듣는 게 아니고 어떤 연주자·공연자의 팬을 자임하러 가는 곳이었다. 본질상 경험을 요구하는 것들은 코로나 이후에도 변할 수 없다. 마호멧 시대가 지났어도 여행은 우리가 결국 거기 가야하는 것이므로 여행은 다시 여행이 될 것이다. 진료카드는 전송되어도 모니터에 주사바늘을 꽂지는 못할 일이다. 큰 티비로 영화를 보던 사람들도 초대형 화면의 경험을 찾아 기어이 영화관으로 나설 것이다. 비대면강의 실험으로 대학의 존재가치 의심도 생겼다. 그러나 대학은 학원이나 교습소가 아니다. 대학은 아테네학당과 볼로냐대학 시대부터 지금까지 다음 세대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체험하고 형성하는 기관이었다. 그 가치는 여전히 굳건하며 지식전달은 그중 일부일 뿐이다. 뉴턴이 대학에서 축적한 지적 관계망이 없었다면 <프린키피아>도 없었다. 대학 공간은 강의실 외에 도서관·동아리방·식당·벤치 등으로 이루어진다. 대학은 코로나 이후에도 오프라인 공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건강하다. 마지막 질문은 도시로 향한다. ‘도시’는 무엇인가. 도시는 이동이 귀찮은 게으른 인간들이 게으름 구현 극대화를 위해 만든 초대형 구조물이다. 그래서 도시는 인간이 모여사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좋은 도시’는 무엇인가. 게으른 인간들이 가장 쉽고 빠르고 편하게 자신들의 물품·정보를 교환하며 사는 공간이다. 그래서 좋은 도시는 더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더 빽빽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사회구성원의 집합적 게으름은 극복할 대상이 아니고 따라야 할 목표다. 그 결과를 표현하는 단어가 경제성·생산성·효율성 등이다. 지구와 한반도가 두루마리 휴지가 아니기에 개구리 뜀뛰듯 만드는 도시계획은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 이해로 여기저기 뿌려 도시를 만들었고 그 계획도시의 모델은 미국에서 배운 교외형 도시들이었다. 전 세계 대비 4%의 인구가 20%의 석유를 소비하는 나라의 도시. 널찍한 땅에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을 구분하여 배치한 도시. 불편한 교환 때문에 불필요한 이동이 강요되고 결국 화석연료를 불태워야 하고 기후변화를 부추기는 도시. 그런 도시를 이렇게 부를 것이다. 나쁜 도시. https://news.joins.com/article/23858877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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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발전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07. 31사소한 잡음이 있어도 원안대로 추진하라. 이렇게 단호하게 지시한 사람은 사령관이 아니고 대통령이었다. 1971년 7월 30일 건설부고시 447호. 그린벨트의 탄생 통보다. 사소한 잡음은 사유재산권 침해논란이었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절대 권력의 권력 남용 순간이었다. 다음 해에는 전국 대도시 주변에 그린벨트가 확장 지정되었다. 그린벨트 지정취지의 하나는 ‘안보상 장애 제거’였다. 적 공격 시 피난과 방어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시기다. 그린벨트는 방어부대 은닉지가 도시를 둘러싸는 최적의 도구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성곽이 대한민국 서울의 규모로 확장구현된 것이다. 아파트값과 맞물려 시끄럽던 그린벨트 논란이 수그러들었다. 논란 쟁점의 출발지는 단어의 오해였다. 녹색이 아닌 그린벨트를 풀어서 아파트를 짓자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통칭이 그린벨트지만 정확한 단어는 개발제한구역이다. 나무가 아니라 비닐하우스가 있어도 개발제한구역인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말 없는 구조물도 시간이 지나면 새 존재의미를 얻는다. 서울성곽은 군사구조물이 아니고 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린벨트도 절대권력 남용으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유산이다. 이 논란이 남긴 진정한 유산은 그린벨트 자체가 아니었다. 다음 세대에 넘겨줄 유산확보의 공감대 확인이었다. 희귀한 사안이다. 돈이 되면 유산이든 유적이든 어디든 파헤쳐 온 한국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균형발전과 수도권 집중 억제. 그린벨트 지정 당시 내건 다른 취지였다. 균형발전은 부인할 수 없는 가치지만 이게 강제 균형도시화로 번역되는 순간 문제가 된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번역이 된다. 국토 전반을 건물과 아스팔트의 도시구조물로 균등 도포해야 한다는 이야기. 잊을 만하면 균형발전론이 거론되는 때는 선거철이나 국면전환기다. 표가 되면 악마와도 거래하는 것이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균형발전론의 문제는 실체와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방이 충분히 도시화되었다고 지방에서 인정할 때까지 도시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남는다. 대도시 인구집중은 전 세계 근대산업국가의 공통현상이다. 문제는 균형발전을 거론하기에 한국국토는 턱없이 작다는 것이다. 국토균형발전이 필요하다는 나라가 코리아고, 그래서 새 수도를 만들겠다기에 이르렀고, 그 위치는 고속철도로 30분 거리라면 바다 건너 도시학자들은 농담으로 이해할 것이다. 국토계획의 목표가 도시국가 조성이냐고 물을 것이다. 미국·캐나다부터 독일·프랑스·영국·네덜란드의 수도가 국토복판에 없어서 문제냐고. 국영기업체 본사는 지방으로 이전시켜라. 이 역시 그린벨트 지정 당시 사령관, 아니 대통령의 국무회의 지시 내용이다. 국민기본권이 하찮던 시대의 모습이다. 짜르나 주석이나 국방위원장이 내릴 명령이다. 그러나 이런 계획경제·전체주의로 중무장한 사회가 계획대로 작동할 것이라 믿는다면 그런 사회의 도시들을 보아야 한다. 자애로운 인민사랑으로 가득한 천출명장·절대존엄이 밤잠 못 자고 고민하여 스키장·혁명성지·닭공장까지 손수 계획·조성·현장지도 하신다는 사회주의 인민낙원도 있다. 그 낙원도시들이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지 제발 볼 일이다. 공공기관·공기업 지방 이전이라는 단어는 완곡표현일 뿐 결국 근로자 강제이주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연상되는 그 단어다. 사회주의를 부인하는 한국에서 사회주의적 공기업 강제이주 계획시행이 시행되었다. 현실은 강제를 거부하는 정부기관·공기업 근로자들의 보부상·신기료장수·방물장수화다. 인구 밀집의 결과가 도시형성이다. 거꾸로 도시조성의 결과가 인구유입이라면 곤란하다. 도시는 플라스틱 레고블럭이 아니고 유연한 유기체다. 머리를 잘라 나눠 어깨와 엉덩이에 이식한다고 인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전 신체가 모두 머리로 바뀐 유기체라면 생존여부가 더욱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국회의원들이 합심하고 대통령이 결심하여 굳이 자신들 청사를 옮기겠다면 반대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목적지가 세종시면 곤란하다. 주제가 세종시의 배타적 발전이 아니고 국토의 균형발전이기 때문이다. 하여 지화자, 의사당의 입지로는 새만금이 최적이다 균형발전 대선공약 새만금에 시작하여 땅만덮은 미완성지 오도가도 못하는데 떠난자에 침뱉은들 메운땅이 바다되랴 흙에깔려 절규하던 물짐승들 거름되어 문전옥답 기름지고 지기발원 충만하리 민의전당 국회의원 식솔가축 거둬모아 뜬세상에 부초인생 어디간들 못살겠나 길지라고 믿고가면 만세도읍 예아니랴 청와대도 옮기려니 균형발전 지엄하다 세종시가 웬말이뇨 가덕도가 적지로다 행정수도 공약시에 해양수도 약속한바 청와대가 이주하니 백년대계 구현일세 공항신설 부산민심 백가쟁명 번잡하니 평지풍파 제번하여 다스릴바 기회로다 주적포격 사정거리 천리밖에 벗어나고 사위팔방 죄바다니 경호근심 설곳없다 지도깔고 굽어보니 아름답다 삼각구도 균형발전 머지않고 태평성시 곧오리라 새만금과 가덕도에 서쪽하늘 바라보면 노을지는 풍광이라 바다너머 지는해가 밝은미래 틀림 없다. 아, 어쩌면 정말로 거기서 세상이 곧 밝아올 수도 있겠다. 지구가 거꾸로 돌기 시작한다면. https://news.joins.com/article/23837828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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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적률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07. 03 (2)빨대 꽂힌 세대. 듣는 순간 앞이 캄캄해진 말이다. 그들은 졸업한 내 제자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끔찍한 단어로 자신들을 지칭하게 만들었을까. 그 배경에 집이 놓여있다, 아파트로 통칭되는. 여전히 ‘인서울’이라는 단어로 대학입학의 성패가 평가된다. 그러나 그 대학교들의 기숙사 수용인원 사정은 대체로 형편없다. 그나마 대학교가 기숙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이를 막아선 집단이 대학가 원룸 주택 소유자들이다. 겨우 집 하나 가진 노년층인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지 말라고 했다. 방을 쪼개고 갈라내 불법 증축한 비루한 공간으로 최대한의 월세를 빨아내던 이들이다. 학생들에게 사회적 약자 행세하던 이들은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였다. 꿋꿋하게 졸업한 제자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좋은 직장 얻었다. 그런 직장은 대개 도심에 있다. 그러나 주거지는 노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통근시간 3시간을 빼곡한 지하철이나 도로에서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임금을 모아서는 집을 마련할 길도 없다는 좌절이 그들의 몫이었다. 영원히 전세와 월세를 빨리며 살아야 한다는 구조에 대한 분노의 단어였다. 빨대 세대. 만발하는 대책을 비웃으며 아파트값은 여전히 올랐고 미소와 절규가 교차한다. 아파트값이 오르는 건 아파트값이 오르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속적 공급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백약이 무효하다. 그래서 부족하다는 택지공급을 위해 신도시 개발안을 꺼내놓는다. 특정한 곳의 집값이 앞장서 오르는 이유는 살기 좋기 때문이다. 주거지 평가에서 교육경쟁력은 한국의 특이변수고 짧은 통근거리는 세계의 공통변수다. 두 변수의 교집합을 그리면 한국에서는 서울 강남이 나온다. 왜 여기 집값이 오르는지는 지하철 노선도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이 강남의 출생 근원을 찾으려면 산업혁명까지 거슬러 올라야 한다. 인클로저운동으로 토지 잃은 농민들이 결국 도시로 몰려들어 노동자가 되었다는 영국 이야기다. 도시과밀이 문제가 되자 산업혁명의 주역이자 수혜자인 중산층, 혹은 중간계층이 도시를 버리고 교외로 향했다. 햇빛 충만하고 텃밭·녹지로 둘러싸인 이 저밀도 주거지를 영국에서 전원도시라 불렀다. 새 도시의 블록 크기는 초등학교의 보행거리 단위로 계획하자는 제안은 미국에서 나왔다. 근린주구이론이라 부른다. 한국의 계획도시들은 영국과 미국의 두 이론을 강령으로 삼았다. 서울의 강남에서 출발했다. 일조량 절대확보는 전원도시의 원칙이고 도시블록 복판에 자리 잡은 학교들은 근린주구이론의 증거다. 그런데 지금 강남은 교외가 아니고 도시를 넘어 초거대도시, 즉 메트로폴리스의 한복판으로 변했다. 강남은 뉴욕이나 런던에 가깝다. 질문은 메트로폴리스 복판의 전원도시 유지가 옳으냐는 것이다. 용적률이 변수다. 용적률 제한으로 도시밀도 규제를 시작한 것은 뉴욕이다. 그런데 지금 뉴욕 중심부의 용적률은 1,800%를 넘고 구도심 주거지도 500%를 넘는다. 런던은 몇 곳 예외 빼고 도시 전체의 용적률 상한이 일괄 500%다. 전면도로 면적도 기준에 포함한 것이니 우리 계산으로 치면 훨씬 높다. 300%를 넘지 못하는 서울의 주거지보다 훨씬 고밀도시들이다. 원래 도시는 이렇게 모여 사는 곳이다. 얽힌 실타래를 푸는 방법은 가끔 전복적 사고다. 용적률 상한제가 아니고 용적률 하한제. 지금보다 훨씬 고밀한 아파트단지로 더 많은 공급을 보장하지 않으면 아파트 재건축을 불허하는 것이다. 용적률 상승의 발목을 잡는 것은 일조권이다. 거실에 4시간 직접 태양빛을 받아야 한다는 금과옥조. 이건 전원도시에서는 가치지만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사치다. 기성세대가 확보하려는 일조시간이 그만큼 긴 시간의 지옥철 통근을 다음 세대들에게 요구한다면 공평한 사회 아니다. 원도심과 산지 주변을 제외한 서울의 용적률은 높여야 한다. 고밀주거의 실험은 이미 상업용지의 주상복합 아파트와 주거용 오피스텔에서 충분히 시행되었다. 고밀주거가 불편하면 그 공간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고 전원도시로 이주하면 된다. 용적률 증가로 추가공급되는 아파트 물량을 일반분양 몫으로 생각하면 이것도 곤란하다. 최소 사업성 확보를 위한 분량 외에는 공공임대주택으로 당연히 환수되어야 한다. 황금분할의 구분선은 사안마다 다르겠다. 한국은 주거 상속으로 금이 그어진 계급사회에 진입했고 금 너머 계급구성원을 금수저라 표현한다. 두 계급 사이에 다리는 무너졌고 사다리는 넘어졌으니 오직 빨대만 빽빽이 가로지르더라고 분개한 것이 내 제자들이다. 건강한 전원도시가 건강하지 않은 사회불만을 키우는 텃밭이라면 우리는 전원도시를 포기해야 한다. 역병창궐로 세상이 어수선하다. 코로나 확산에 영향을 미치는 건 대인밀도지 주거밀도가 아니다. 위험한 건 잦은 이동인데 낮은 주거밀도는 이동거리를 증가시킨다. 신도시개발은 다음 세대에 넘겨줄 녹지에 꽂는 빨대다. 더 많은 도로와 자동차와 화석연료를 그 빨대가 빨아들인다. 그리고 소중한 시간을 빨아 길 위에 뿌린다. 우리는 좁은 땅에 더 빽빽이 모여 살아야 한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816430?cloc=joongang-home-opinioncolumn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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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06. 04육군공병대 불도저가 남산 중턱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국회의사당 건립부지 조성사업이었다. 1959년의 일이다. 그런데 어떤 모양의 건물이 들어설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부지 조성공사 공정률 60%가 넘은 후에 건물설계의 현상공모 당선작이 결정되었다. 다음에는 남산에 국회의사당이 들어서는 게 옳은지 토론이 벌어졌다. 건설사업이 시공·설계·기획의 순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좋은 건물 얻는 묘법이 무어냐. 답은 간단하다. 그런 묘법 없다. 건축은 주택 하나 짓는데도 수십 명이 투입되는 복잡한 사업이다. 그런 과정에 묘법이 있다면 그건 사기거나 꼼수다. 정공법이 있을 뿐이다. 좋은 건물이 필요한 건 사용자가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공건물은 건립에 공공자금이 투입되고 대개 불특정 시민이 사용자다. 그래서 좋은 건물은 더 절실해진다. 거기 이르는 정공법을 짚어보자. 남산 국회의사당 사업의 역순이다. 기획·설계·시공. 먼저 그 건물이 필요한지, 건물 얹기에 이 땅이 적당한지 판단해야 한다. 공공건물 건립의 일반적 비극은 지자체장·기관장이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남산 국회의사당도 당시 대통령의 뜻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항상 전문성이다. 지금은 대규모 공공사업이면 예비타당성검토의 검증절차를 거친다. 이 절차는 모든 걸 돈으로만 계량한다는 게 문제다. 하여간 아무리 작은 사업이라도 건물과 땅의 합리성을 보는 건축전문가의 자문이 반드시 필요하다. 최종 결정은 물론 정치행위고 그런 결정을 위해 지자체장을 뽑은 것이다. 대개 다음은 설계발주로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빼놓으면 사업을 그르치는 과정이 기획이다. 기획의 첫 단계는 그 건물이 무엇인지, 그 건물의 존재가치가 무엇인지의 규명이다. 법인설립 작업이라면 정관 맨 앞의 설립목적을 쓰는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도 그 첫 조문에 대한민국이 무엇인지 규정해 놓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세종대왕도 훈민정음 첫 머리에 이 새로운 글자의 존재가치를 풀어 놓았다. 백성들이 쉽게 쓸 수 있는 글자. 명쾌하게 서술된 이런 문장이 없으면 이후 작업은 모두 좌충우돌의 험로로 들어선다. 사업지연과 예산낭비 후에 엉뚱한 건물이 등장한다. 존재가치를 규명하는 첫 문장을 만들려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 국회의사당이 무엇이고, 학교가 무엇이고 도서관이 무엇인가. 이에 대답하고 문장으로 서술하려면 역사에 대한 성찰과 사회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건축은 인문학으로 출발해서 공학으로 완성되며 예술작품으로 남기를 열망하는 작업이다. 다음 단계는 조건서술이다. 헌법이라면 권력 주체라는 국민을 규정하는 단계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 서술이다. 훈민정음 제정에서는 제자원리의 규정이었다. 백성들이 더 쉽게 쓰려면 소리글자여야 하고 혀·입·이·목구멍의 모양을 따른다는 것. 건설사업이면 문장으로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다. 당연히 아직 형태는 없다. 이 작업을 거치면 필요한 공간의 크기와 성격이 드러난다. 여기까지가 기획이다. 사업의 방향과 성패가 결국 이 기획에 의해 규명된다. 사실 대지는 이 뒤에 골라도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건너뛰는 사업이 숱하다. 출발 이후 목적지를 찾는 것이다. 많은 공공건물이 건립과정의 갈등을 겪는다. 특히 기피시설의 경우 갈등이 극심하다. 찬성쪽은 최선을, 반대쪽은 최악을 머리 속에 그리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그림으로 논의하면 오해와 갈등이 커진다. 이를 줄이려면 기획에 근거해 개략적 건물 그림을 그려 공유하는 게 효과적이다. 실제로 지을 모양은 아니다. 이것을 기획설계라고 부른다. 이렇게 기획방향을 공유하면 대화가 가능하고 그 방향이 옳다는 확신도 얻을 수 있다. 좋은 기획은 이후 개입충돌하는 수많은 이해관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이 된다. 제시되는 대안들에 대한 일관되고 신속한 판단근거다. 갈등의제의 경중판단이 가능하므로 사업진행은 오히려 유연해지고 예측 가능해진다. 훈민정음 설계에서도 글자모양의 다양한 대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 평가와 판단은 모두 첫 문장에 근거했을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백성들이 더 쉽게 쓸 수 있는 모양인가. ㄱ·ㄴ·ㄷ이 모습을 드러나는 순간이다. 건축에서도 기획 이후에 좋은 건축가 선발해 실제 건물에 쓸 설계발주에 들어가면 된다. 다음이 시공이다. 물론 후속 과정들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좋은 기획은 좋은 건물을 얻는 전제조건이고 정공법의 출발점이다. 아, 국회의사당은 결국 어찌 되었을까.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사업은 백지화되었다. 입법부가 남산 중턱에서 행정부를 내려다보는 게 불쾌해서였다고 당시 신문기사는 보도했다. 대체부지로 사직공원, 종묘를 배회하던 국회의사당은 1975년에야 여의도에 준공되었다. 대한민국 최고 흉물건축으로 여전히 수위를 다투는 존재다. 이유는 민주주의가 뭐냐는 존재가치의 질문 없이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럼 남산부지는? 파놓은 땅은 백범광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사업명은 이렇다, 원형복원. https://news.joins.com/article/23793913?cloc=joongang-home-opinioncolumn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