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을 걷다 / 사람의 가치 / 2014
서현
2018-04-10 23:29
조회
324
세상을 떠난 건축저널리스트 최연숙을 그리는 책에 쓴 원고. 2012년에 쓴 글이 이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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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걷다
이것은 어떤 행동을 서술하는 문장이 아니다. 건축 프로젝트의 제목이었다. 네 개 대학교의 대학원생들이 진행한 건축 프로젝트를 한데 묶어서 부른 이름이 바로 이것이었다. <광화문을 걷다>.
2002년의 여름은 월드컵개최와 본선 4강진출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한국 전체가 들끓던 시기였다. 별로 심심할 틈이 주어지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도 이건 좀처럼 진정이 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터득한 세대의 등장을 과시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회적으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분석도 필요했고 다음 행보가 어찌되어야 하는지도 살펴야 했다.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건축도 의외로 자유롭지 않았다. 이유는 그 열기를 담던 공간이 바로 도시였기 때문이다.
2003년의 여름 언저리에 건축저널인 <건축문화>의 최연숙 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취재자와 취재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로는 별로 만나본 적이 없고, 심심할 때 맥주집에서 만나 쓸데 없는 수다를 안주로 신체와 지갑을 축내던 사이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국민대학교의 장윤규 교수도 항상 함께 있었다.
최연숙 팀장은 여전히 즐겁게 놀 이벤트를 하나 장만하는 중이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네 개 건축전문대학원에서 광화문 앞을 주제로한 공동프로젝트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네 학교는 건국대학교, 경기대학교, 경희대학교, 그리고 한양대학교였다.
내가 전화를 받은 이유가 있었다. 외부에 내건 이유로는 여기에 연관이 있는 한양대학교 교수라는 것이었고 내부에 있는 이유는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술친구라는 것이었겠다. 그러나 나름 다른 근거도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시청앞 광장 현상공모에서 <빛의 광장>이라는 걸 제출하여 덜컥 당선이 되어있던 터였다. 이게 되느니 안되느니 말이 한참 많던 상황이어서 신문, 잡지, 방송에 몇 번 불려나간 일이 있으니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는 주제에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을 것이다.
서울시청앞은 어찌되었건 광장으로 바뀔 것이니 이제 좀더 중요한 공간인 광화문 앞을 갖고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 최연숙씨의 의도였다. 나는 당연히 동의했다. 여기에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내 입장에서도 나름 사연이 있었다.
1999년은 문화부에서 지정한 건축문화의 해였다. 워낙 시의적절하게 뭔가 이벤트를 계속 생산해내야 하는 일간지에서 이 이상한 문화의 해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고 여파는 내게도 밀려왔다. 서울의 길과 공간에 관해 동아일보에 연재를 하게 된 것이다. 일간지의 연재는 시작하는 시점은 있어도 마무리하는 시점은 정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독자의 반응에 따라 연재기간의 신축이 아침드라마의 방영횟수에 뒤지지 않을 정도다. 이미 쓰기로 작심한 것,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첫 주제가 중요했고 나는 첫 공간으로 광화문 앞, 세종로를 짚었다.
노련한 신문사 기자의 조언에 따라 종로가 연재 첫 회에 나가고 세종로가 두 번째 공간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내게 중요한 공간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제안도 아니지만 이곳이 자동차의 공간에서 사람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광화문 앞이 인간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대학교 졸업설계 주제로 가끔 등장하던 것이었으니 내가 첫 제안자라고 주장할 일도 없고, 첫 주장자의 의미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간지 한 면에 나오는 컬럼에서 나는 세종로에서 서태지 사인회도 개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시로서는 아무도 현실적이라고 동의하지 않는 주장을 내걸었다.
학교로 자리를 옮긴 나는 이번에는 한국의 소위 문화적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같은 주장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었다. 광화문 앞을 보행자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은 이후 내가 장비 헌칼 휘두르듯 아무데서나 꺼내놓는 안건이 되었다.
나는 당연히 이 주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다음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를 맡을 계획은 없었다. 결국 당시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튜디오를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께 의사를 타진했다. 몇 해째 시골 읍내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은 이 서울 복판 프로젝트 진행에 흔쾌히 동의를 해주셨다. 당시 경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장윤규 선생 역시 싫다고 뺄 상황이 아니었다. 건국대학교의 제갈엽 선생, 경희대학교의 김찬중 선생께서 모두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꾸려졌다.
팀이 꾸려졌으므로 나는 여기서 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이 구도에 대해 전혀 불만도 아쉬움도 없었지만 최연숙씨는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측은하게 느껴졌는지 코디네이터의 간판을 걸어주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속 편한 코디네이터였다.
스튜디오는 광화문에서 마무리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네 학교의 작업을 전시하고 간단한 심포지움을 가졌다. 그런데 이 심포지움의 주제가 바로 옆 광화문이었으므로 사전 길놀이가 필요했다. 아직 자동차가 씽씽 내달리는 광화문를 실제로 걷기로 했다.
오후 1시에 광화문 앞에서 네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이 모였다. 소집의 일관성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저런 게스트들도 있었다. 장윤규 선생이 특유의 굵직한 필체로 그은 그림을 인쇄한 티셔츠들을 모두 나눠 입었다. 웅성웅성 모인 수십 명의 학생들은 세종로의 서쪽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사박물관이 그 방향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래야 했지만 문제는 시작하는 지점에 정부중앙청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항상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관찰하는 그 건물.
권위주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해도 관공서의 예민한 반응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이 그 앞을 지나면서 지레 더 민감하게 웅크러들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생의 상당부분을 뭔가에 대드는데 사용한 몇 분이 게스트로 참여하고 계셨다. 이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청부청사 앞에서 드러눕고 놀면서 시대가 바뀌었음을 경찰들에게 과시하셨다. 경찰들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 괴상한 집단의 등장과 행진에 대놓고 말은 못해도 꽤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확연했다.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좀 이상해 보이기는 했을지라도 결국 아무런 민폐도, 관폐도 끼치지 않고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심포지움도, 뒤풀이도 끝났다.
나는 광화문 앞이 보행자의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광장이 차도로 나뉘어있다고, 광장의 축이 비틀력 있다고 이야기들을 해도 나는 여전히 이 공간이 기쁘기만 할 따름이다. 다른 문제는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곳이 보행자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역할을 하였고 <광화문을 걷다>라는 이벤트도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최연숙씨의 역할도 거기 묻혀 있다고 믿는다.
내가 최연숙씨를 처음 만난 것이 1996년의 여름이었다. 광복절을 앞 뒤로 한 무더운 여름의 폐교였다. 민족이라는 단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는 지금이지만 당시에는 당당하게 <민족건축인협의회>라는 이름을 내건 집단이 있었고 이 <민건협>이라는 곳에서 주최한 여름건축학교에 학생들과 놀아주는 튜터로 초대가 된 것이다. 당시 월간 <플러스> 기자였던 최연숙씨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인상을 설명하자면 월간지 기자로는 드물게 아직도 뱃심좋게 부산 억양을 고수하고 있는 아가씨였다.
하여간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이후로 한국 건축계의 현실과 미래에 관심과 걱정이 많은 건축월간지 기자와 그런데는 도대체 아무 관심이 없던 건축가인 나, 그리고 좀 더 관심이 없던 또 다른 건축가 장윤규는 대학로 비어할레에서 만나서 공통분모와 별 안주가 없어도 즐겁게 떠들고 노는 술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좀 흘러 나는 한양대학교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최연숙씨는 또 다른 월간지인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에서 나는 건축과에서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학기말의 크리틱이 갑자기 심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자를 초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크리틱이 끝나면 뒤풀이도 중요하므로 나는 대학로를 염두에 두고 간단하게 술친구들을 불렀다. 속으로는 술친구지만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건축가와 기자 초대라는 이런 구도가 별로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세상의 구도가 익숙치 않았던 나는 벽에 붙인 일정공고에서 최연숙씨의 이름 옆에 ‘<공간> 편집장’이라고 써넣었다. 지금은 그 막중한 차이를 이해하지만 당시 내게는 기자나 편집장이나 다 기사 쓰는 사람들이었고 실제 편집장이 아니라면 내가 하루만 편집장에 임명해주면 되는 사안이었다. 당일 크리틱이 끝나고 옮긴 술자리의 안주는 바로 이 ‘편집장’ 사칭으로 본인이 얼마나 사내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의 성토였다. 모든 죄는 내게 있었다. 최연숙씨는 곧 <건축문화>로 자리를 옮겼고 그 여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광화문을 걷자고.
시간이 한참 지났고 나는 국민대학교로 역시 자리를 옮긴 술친구로부터 최연숙씨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수술 후의 병원에서 여전히 부산억양으로 자기 병을 문병 온 남 이야기하듯 하는 환자의 문병을 했다. 그리고 또 한참 뒤 우리는 최연숙씨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 함께 앉아 있었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 했다. 그 옛날은 도시 곳곳에 담겨있을 것이다. 공간이 바뀌면서 옛날도 조금씩 지워지겠다. 대학로의 비어할레에서 지워진 모습은 이제 완성된 광화문광장의 어딘가에 새로 담겨있겠다. 그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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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걷다
이것은 어떤 행동을 서술하는 문장이 아니다. 건축 프로젝트의 제목이었다. 네 개 대학교의 대학원생들이 진행한 건축 프로젝트를 한데 묶어서 부른 이름이 바로 이것이었다. <광화문을 걷다>.
2002년의 여름은 월드컵개최와 본선 4강진출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한국 전체가 들끓던 시기였다. 별로 심심할 틈이 주어지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도 이건 좀처럼 진정이 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터득한 세대의 등장을 과시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회적으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분석도 필요했고 다음 행보가 어찌되어야 하는지도 살펴야 했다.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건축도 의외로 자유롭지 않았다. 이유는 그 열기를 담던 공간이 바로 도시였기 때문이다.
2003년의 여름 언저리에 건축저널인 <건축문화>의 최연숙 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취재자와 취재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로는 별로 만나본 적이 없고, 심심할 때 맥주집에서 만나 쓸데 없는 수다를 안주로 신체와 지갑을 축내던 사이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국민대학교의 장윤규 교수도 항상 함께 있었다.
최연숙 팀장은 여전히 즐겁게 놀 이벤트를 하나 장만하는 중이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네 개 건축전문대학원에서 광화문 앞을 주제로한 공동프로젝트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네 학교는 건국대학교, 경기대학교, 경희대학교, 그리고 한양대학교였다.
내가 전화를 받은 이유가 있었다. 외부에 내건 이유로는 여기에 연관이 있는 한양대학교 교수라는 것이었고 내부에 있는 이유는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술친구라는 것이었겠다. 그러나 나름 다른 근거도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시청앞 광장 현상공모에서 <빛의 광장>이라는 걸 제출하여 덜컥 당선이 되어있던 터였다. 이게 되느니 안되느니 말이 한참 많던 상황이어서 신문, 잡지, 방송에 몇 번 불려나간 일이 있으니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는 주제에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을 것이다.
서울시청앞은 어찌되었건 광장으로 바뀔 것이니 이제 좀더 중요한 공간인 광화문 앞을 갖고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 최연숙씨의 의도였다. 나는 당연히 동의했다. 여기에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내 입장에서도 나름 사연이 있었다.
1999년은 문화부에서 지정한 건축문화의 해였다. 워낙 시의적절하게 뭔가 이벤트를 계속 생산해내야 하는 일간지에서 이 이상한 문화의 해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고 여파는 내게도 밀려왔다. 서울의 길과 공간에 관해 동아일보에 연재를 하게 된 것이다. 일간지의 연재는 시작하는 시점은 있어도 마무리하는 시점은 정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독자의 반응에 따라 연재기간의 신축이 아침드라마의 방영횟수에 뒤지지 않을 정도다. 이미 쓰기로 작심한 것,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첫 주제가 중요했고 나는 첫 공간으로 광화문 앞, 세종로를 짚었다.
노련한 신문사 기자의 조언에 따라 종로가 연재 첫 회에 나가고 세종로가 두 번째 공간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내게 중요한 공간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제안도 아니지만 이곳이 자동차의 공간에서 사람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광화문 앞이 인간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대학교 졸업설계 주제로 가끔 등장하던 것이었으니 내가 첫 제안자라고 주장할 일도 없고, 첫 주장자의 의미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간지 한 면에 나오는 컬럼에서 나는 세종로에서 서태지 사인회도 개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시로서는 아무도 현실적이라고 동의하지 않는 주장을 내걸었다.
학교로 자리를 옮긴 나는 이번에는 한국의 소위 문화적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같은 주장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었다. 광화문 앞을 보행자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은 이후 내가 장비 헌칼 휘두르듯 아무데서나 꺼내놓는 안건이 되었다.
나는 당연히 이 주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다음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를 맡을 계획은 없었다. 결국 당시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튜디오를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께 의사를 타진했다. 몇 해째 시골 읍내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은 이 서울 복판 프로젝트 진행에 흔쾌히 동의를 해주셨다. 당시 경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장윤규 선생 역시 싫다고 뺄 상황이 아니었다. 건국대학교의 제갈엽 선생, 경희대학교의 김찬중 선생께서 모두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꾸려졌다.
팀이 꾸려졌으므로 나는 여기서 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이 구도에 대해 전혀 불만도 아쉬움도 없었지만 최연숙씨는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측은하게 느껴졌는지 코디네이터의 간판을 걸어주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속 편한 코디네이터였다.
스튜디오는 광화문에서 마무리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네 학교의 작업을 전시하고 간단한 심포지움을 가졌다. 그런데 이 심포지움의 주제가 바로 옆 광화문이었으므로 사전 길놀이가 필요했다. 아직 자동차가 씽씽 내달리는 광화문를 실제로 걷기로 했다.
오후 1시에 광화문 앞에서 네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이 모였다. 소집의 일관성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저런 게스트들도 있었다. 장윤규 선생이 특유의 굵직한 필체로 그은 그림을 인쇄한 티셔츠들을 모두 나눠 입었다. 웅성웅성 모인 수십 명의 학생들은 세종로의 서쪽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사박물관이 그 방향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래야 했지만 문제는 시작하는 지점에 정부중앙청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항상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관찰하는 그 건물.
권위주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해도 관공서의 예민한 반응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이 그 앞을 지나면서 지레 더 민감하게 웅크러들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생의 상당부분을 뭔가에 대드는데 사용한 몇 분이 게스트로 참여하고 계셨다. 이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청부청사 앞에서 드러눕고 놀면서 시대가 바뀌었음을 경찰들에게 과시하셨다. 경찰들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 괴상한 집단의 등장과 행진에 대놓고 말은 못해도 꽤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확연했다.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좀 이상해 보이기는 했을지라도 결국 아무런 민폐도, 관폐도 끼치지 않고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심포지움도, 뒤풀이도 끝났다.
나는 광화문 앞이 보행자의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광장이 차도로 나뉘어있다고, 광장의 축이 비틀력 있다고 이야기들을 해도 나는 여전히 이 공간이 기쁘기만 할 따름이다. 다른 문제는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곳이 보행자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역할을 하였고 <광화문을 걷다>라는 이벤트도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최연숙씨의 역할도 거기 묻혀 있다고 믿는다.
내가 최연숙씨를 처음 만난 것이 1996년의 여름이었다. 광복절을 앞 뒤로 한 무더운 여름의 폐교였다. 민족이라는 단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는 지금이지만 당시에는 당당하게 <민족건축인협의회>라는 이름을 내건 집단이 있었고 이 <민건협>이라는 곳에서 주최한 여름건축학교에 학생들과 놀아주는 튜터로 초대가 된 것이다. 당시 월간 <플러스> 기자였던 최연숙씨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인상을 설명하자면 월간지 기자로는 드물게 아직도 뱃심좋게 부산 억양을 고수하고 있는 아가씨였다.
하여간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이후로 한국 건축계의 현실과 미래에 관심과 걱정이 많은 건축월간지 기자와 그런데는 도대체 아무 관심이 없던 건축가인 나, 그리고 좀 더 관심이 없던 또 다른 건축가 장윤규는 대학로 비어할레에서 만나서 공통분모와 별 안주가 없어도 즐겁게 떠들고 노는 술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좀 흘러 나는 한양대학교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최연숙씨는 또 다른 월간지인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에서 나는 건축과에서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학기말의 크리틱이 갑자기 심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자를 초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크리틱이 끝나면 뒤풀이도 중요하므로 나는 대학로를 염두에 두고 간단하게 술친구들을 불렀다. 속으로는 술친구지만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건축가와 기자 초대라는 이런 구도가 별로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세상의 구도가 익숙치 않았던 나는 벽에 붙인 일정공고에서 최연숙씨의 이름 옆에 ‘<공간> 편집장’이라고 써넣었다. 지금은 그 막중한 차이를 이해하지만 당시 내게는 기자나 편집장이나 다 기사 쓰는 사람들이었고 실제 편집장이 아니라면 내가 하루만 편집장에 임명해주면 되는 사안이었다. 당일 크리틱이 끝나고 옮긴 술자리의 안주는 바로 이 ‘편집장’ 사칭으로 본인이 얼마나 사내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의 성토였다. 모든 죄는 내게 있었다. 최연숙씨는 곧 <건축문화>로 자리를 옮겼고 그 여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광화문을 걷자고.
시간이 한참 지났고 나는 국민대학교로 역시 자리를 옮긴 술친구로부터 최연숙씨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수술 후의 병원에서 여전히 부산억양으로 자기 병을 문병 온 남 이야기하듯 하는 환자의 문병을 했다. 그리고 또 한참 뒤 우리는 최연숙씨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 함께 앉아 있었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 했다. 그 옛날은 도시 곳곳에 담겨있을 것이다. 공간이 바뀌면서 옛날도 조금씩 지워지겠다. 대학로의 비어할레에서 지워진 모습은 이제 완성된 광화문광장의 어딘가에 새로 담겨있겠다. 그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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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 / 중앙일보 / 문화탐색 / 2019. 01. 24옥류관 냉면에서 배우는 용산공원 조성법 냉면이 뜨거웠다. 멀다고 하면 안 될 곳에서 가져온 냉면이 불을 지폈다. 은거암약하던 냉면교도들이 열혈궐기하였고 경향강토에 냉면열국지가 일익전파되었다. 강호협객의 냉면명가 주유방담이 인터넷을 덮었고 냉면취식 순서방법으로 백가가 쟁명하였다. 하여 냉면의 백면서생들이 신조어로 비방조롱하였으니 ‘면스플레인’이다. 그런데 정통원조 옥류관 봉사원들의 입장은 단호했다. 면을 육수 위에 살짝 들고 그 위에 식초를 쳐서 먹어야 합니다. 이 평정된 옥류관 ‘면스플레인’의 근원을 찾아가면 엉뚱한 먹방에 이른다. 옥류관을 친히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냉면 먹는 법까지 하나하나 세심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최고존엄의 식사 이후 옥류관 냉면 취식법은 절대진리로 승천좌정하였다. 이번에는 북한의 공동살림집, 즉 아파트다. 북한 아파트는 평면작성·시공방법이 일괄 수입된 동유럽 제품이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작은 전실로 모든 방이 연결되는 모습이었다. 공동살림방, 즉 거실도 공간위계 상 그냥 방의 하나였다. 들어서면 전면에 거실풍경이 펼쳐지는 남쪽과 전혀 다른 평면이다. 그런데 여기 신기한 변화가 생겼으니 때는 2004년이다. 신축 아파트의 공동살림방이 평면의 중심으로 싹 돌연변모한 것이다. 이 변화 근원에 역시 최고존엄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아들이다. 세계수준에 맞는 살림집을 만들기 위해 공동살림방을 중심에 놓으라고 장군님께서 교시하셨습니다. 최고존엄은 손자에 이르렀다. 평양의 산천풍경은 바뀌었는데 인걸풍습은 의구하다. 최고존엄 앞 고위급 당일꾼들 모두 손바닥만한 수첩을 지참하고 받아적기 바쁘다. 최고존엄 일체 무오류니 질문확인 불요부재. 당이 원하면 우리는 한다. 한편 이웃한 남쪽 어떤 나라 대통령은 최고존엄의 딸이었는데 우주의 기운을 모은 말투가 과연 존엄모호하였다. 그래서 이르고자 할 바 다 이르지 못하는 대통령을 어린 백성들이 조롱비방하였다. 할 수 없이 연설문 눈높이 첨삭지도를 논술강사 아닌 동네 아줌마에게서 몰래 받았는데 하필이면 그게 들통 나 결국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신기하게 당시 뉴스 풍경은 양쪽이 비슷했다. 각료비서들이 모두 머리를 수첩에 넣고 그 대통령의 발언을 열심히 적었다. 창조경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민주주의의 힘은 토론·대꾸·반박·설득에서 나오고 개성만발·취향다양·주관존중으로 표현된다. 대한민국은 최고존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냉면에 식초 치지 않는다. 메밀향 버린다. 주체냉면만세. 냉면이 뜨겁던 광복절 아침에 새 대통령이 선언했다. 용산공원을 뉴욕 센트럴파크 같은 생태자연공원으로 조성하겠습니다. 멋지다. 그런데 의아하다. 왜 용산공원은 세트럴파크 같아야 하는 거지. 센트럴파크는 생태자연공원인가. 용산공원이 생태자연공원이어야 하는 이유는 뭐지. 냉면에는 식초를 쳐야 하나. 용산공원은 거대도시 복판에 있다는 점에서 센트럴파크와 같다. 딱 거기까지다. 출생부터 성장까지 다 다르고 미래에도 달라야 한다. 센트럴파크는 있던 자연을 재가공해서 만든 공원이다. 인공호수·잔디밭·동물원·미술관이 버무려져 있는 도시공원이다. 용산은 청국군·대일본제국육군·유에스아미가 차례로 점령주둔한 도시공간이다. <한일의정서>·<한미상호방위조약>·<한미행정협정>이 만들었다. 자연·생태·환경·순환이 아니고 위험·영토·전략·배치라는 단어들이 들어있는 문서다. 다 털고 나면 불평등이라는 단어만 남는다. 용산미군기지는 전투부대 주둔지가 아니었다. 담장 밖 퍽퍽한 서울환경과 비교하면 이미 공원이다. 한가하고 나른한 미국 전원도시의 변형복사본이다. 당황스런 초현실이다. 지하철 4호선과 동작대교를 기형적으로 비튼 대한민국 내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공중도 지하도 한국이 아니었고 우편번호도 미제를 쓰던 곳이다. APO AP 96205. 수도 한복판이 외국군 주둔지였던 나라가 있었다더라. 이렇게 전하면 후대는 엽기적 농담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에 생태공원은 많으나 이런 초현실의 공간은 서울이 유일하다. 센트럴파크가 대한민국 국군 주둔지라고 생각해보면 된다. 생태공원이 없다고 서울에 산소가 부족하지 않다. 생태공원 만든다고 미세먼지가 사라지지 않는다. 서울에서 부족한 것은 역사를 증언하는 공간이다. 도시를 생태자연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첫 작업은 철거다. 꼭 필요한 것 아니면 기존 구조물들을 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용산은 최소보존이 아니고 최대보존이 원칙이어야 한다. 잔재인지 유산인지 아직 모른다. 역사의 판단이 개입해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역사흔적 다 뭉개고 역사도시 간판만 걸어놓은 테마파크가 청계천 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이 남긴 결과물이다.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대통령은 발언을 추스를 수 있다. 철거하고 나무 심으라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센트럴파크처럼 사랑받는 공간을 만들자는 의미였다고. 그런데 공무원들은 입장이 다르다. 그들에게는 대통령 발언이 절대존엄이다. 달을 보든 손가락을 보든 따르는 척이라도 한다. 수첩에 받아 적은 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설계자들을 다그칠 것이다. 대통령 방침이다. 생태자연공원이 되어야 한다. 철거하고 연못 파고 나무 심어라. 냉면에 식초 치기 전에 메밀함량을 알아야 한다. 한국 검색엔진의 위성사진으로 보면 용산미군기지는 단호하다. 너희가 이곳을 알 필요 없다. 결론을 내릴 만큼 이곳을 알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아무도 없다. 정보가 없으니 작전이 무의미하다. 지금 할 일은 관리·관찰·조사·기록이다. 그런 역사가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누워서 쓸개를 빨며 불편해 하더라도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 대한독립만세. 이것이 염원 아닌 성취의 함성이 되었을 때 공원도 완성될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공간이지 개발할 의무가 아니다. 권리도 아니다. 현재를 꼼꼼하게 정리해서 넘겨준다면 미래는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다. 대신 녹음방초 우거져 멋진 생태자연공원을 넘겨준다면 오히려 물을 것이다. 역사에서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https://news.joins.com/article/23317326일간지부정기칼럼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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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택지 부족 / 중앙일보 / 문화탐색 / 2018. 12. 27달을 분양합니다. 헛웃음이 나올 것이다. 어수룩한 백성들 대상의 사기행각인 거지. 광고자를 바꾸자. 개발업자 출신의 미국대통령은 세상 중심에 돈을 놓고 있는 사람이다. 백주에 언론인을 죽인 아라비아왕자라도 무기만 사준다면 거래를 할 셈이다. 그가 연방재정 적자 해소를 위해 달인들 못 팔겠는가. 논리는 간단하겠다. 달은 우리가 접수한 땅이다. 당연히 국제사회가 반발할 것이다. 깃발 먼저 꽂았다고 달이 너희 거냐. 달을 너희가 만들었느냐. 무단점거 획책마라. 대상을 지구로 바꿔 한반도를 들여다보자. 대한민국의 모든 땅은 나뉘어 각각 법적 소유자가 있다. 그들은 이전 소유자에게서 땅을 샀을 것이다. 이전 소유자는 또 전 소유자에게서 샀을 것이고.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예외 없이 달 분양 행각에서 만났던 불편한 진실 하나와 마주치게 된다. 무단점거. 이것이 땅이 갖고 있는 문제다. 자본, 노동과 함께 경제의 기본요소인 토지가 갖고 있는 특이점이다. 그 땅은 만들어지지도 소비되지도 않는다. 처음에 다만 점거되었을 따름이다. 바로 여기가 토지의 공공성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가 시행하는 첫 번째 사업이 토지 몰수다. 점거와 사유화는 인간 본성의 일부다. 그 본성발현을 방치하면 도시는 무법정글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토지 사유와 매매를 허용한다. 점거에서 시작한 토지니 내놓으라고 했을 때 벌어질 혼란을 사회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상태는 다시 무법에 가까워진다. 무단점거의 사적소유 인정 배경에 깔린 것이 법적 안정성이다. 악법보다 큰 사회위협이 무법이다. 그걸 방지하라고 우리는 정부에 권력을 위임한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민주공화국이다. 토지는 이용과 개발 목적으로 매매한다. 세금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면 사유재산이다. 문제는 그 건물이 토지 위에 서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무단점거에서 시작한 그것. 정부가 건축행위에 개입하는 근거다.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행정절차는 신고가 아닌 허가다. 해서 안 되는 일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그 허가권자가 정부다. 서울의 아파트 값이 문제다. 수요와 공급의 가격 결정은 경제학교과서 맨 앞에 나오는 서술이다. 자금이 충분한데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은 당연히 오른다. 그래서 가격이 오르겠다고 짐작되면 더 오른다. 여기부터는 투기라고 부른다. 거듭, 누구도 땅을 마음대로 만들지 못한다. 택지가 부족하니 주택공급이 어렵다. 빈 땅을 찾든지 있는 땅을 재활용해야 한다. 빈 땅을 찾아 지도를 보면 서울에서 가장 큰 것이 그린벨트다. 산업유산, 기피시설 이전적지도 보인다. 이걸 헐어 택지로 개발하면 간단하겠다. 손쉬운 대안이다. 그러나 보이는 빈 땅을 다 채워 넣는다면 다음 세대가 받을 것은 택지로 가득한 도시다. 그것이 공공택지여도 사적으로 점유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남은 방법은 기존 노후 택지 밀도를 높여 재개발, 재건축하는 것이다. 역시 쉽지 않은 길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쟁점으로서 난이도 최고는 입시문제고 그 다음이 주택문제다. 전 국민의 이권이 빼곡하게 얽혀서 어디를 흔들어도 회심의 미소와 절규의 아우성이 부딪힌다. 해결의 원칙은 두 가지다. 작은 단위의 개발과 고밀도 개발. 사업의 최소규모가 10,000m2이던 뉴타운 시대가 있었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소수를 존중하는 다수의 지배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 지배되는 소수의 규모도 커진다. 의견수렴 어렵고 갈등 커지고 사업이 오래 걸린다. 다수의 재산권 행사가 소수의 생존권을 억압한다. 사업 기간 중 고발, 분쟁 없는 사업도, 준공 후 갈등, 소송 없는 사업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역사가 담겼던 도시조직들이 사라진다. 도시는 작은 단위로 유연하게 변화해야 한다. 소규모 도시정비는 예외가 아니고 원칙이 되어야 한다. 서울시가 주거용적률을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방향이 옳다. 서울은 건물들이 빼곡하기는 하나 여전히 용적률이 낮은 도시다. 문제는 여전히 토지다. 높은 건물을 허용하는 대신 건물이 딛고 선 토지 면적을 줄이고 그 부분의 개방을 요구해야 한다. 1층은 주거로 어차피 기피하는 곳이다. 땅은 변수가 많다. 경관이 중요한 곳에 삐죽한 건물을 세울 수는 없다. 단 하나의 숫자로 용적률을 일괄 적용할 수도 없다. 환수와 기부채납의 비율도 위치에 따라 달라야 한다. 그중 말 많은 서울 강남과 한강변은 지금보다 개발밀도를 훨씬 높여야 한다. 주민, 개발업자의 환호성이 나올 일이다. 그러나 끼어있는 중요한 조건은 개발수익에 맞는 기부채납과 공공임대주택 조성이다. 대한민국이 정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증거는 복지다. 최소한의 주거보장은 복지고 사회의 책임이다. 공공임대주택이야말로 논밭 주변 아니고 대중교통수단 가까운 곳에 세워야 한다. 개발수익 생길 테니 본인들의 아들딸 아닌 흙수저 세대를 위해 양보도 하라는 요구다. 양보할 생각 없으면 아침마다 주차장에서 앞차 뒤차 미는 생활 계속해야 한다. 돈만 되면 악당과도 거래를 하겠다는 대통령의 나라로 돌아가자. 뉴욕시 맨해튼은 자본주의로 똘똘 뭉친 공간이다. 거기서 면적별 지주의 순위에 뉴욕시정부, 카톨릭교회, 컬럼비아대학이 줄을 서 있다. 이들의 외부공간은 모두 시민들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끔찍하게 높은 건물들 사이로 공원, 광장이 빼곡한 상황의 설명이 이렇다. 공적 개방과 사적 자유의 공존. 뉴욕이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이름을 올리는 동력이 바로 거기 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240479일간지부정기칼럼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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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도시라는 유령 / 중앙일보 / 문화탐색 / 2018. 11. 01도대체 대통령은 평양에 왜 간 거야. 한반도 평화정착을 떠올리기 전에 물은 자의 수준과 직업을 감안해야 한다.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는 게 적당한 대답이겠다. 조선노동당 위원장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세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다. 수준 낮은 질문자는 다시 물을 것이다. 그냥 전화로 하면 안 되나. 요즘 영상통화도 꽤 쓸 만한데. 정치인은 답할 것이다. 얼굴 맞대고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라고. 그즈음 북쪽 장마당이 관심사가 되었다. 전국 400여 개가 생겼다더라. 여전히 묻는다. 그 장마당은 왜 생겨났을까.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는 대답은 역시 수준이 높다.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서라는 게 적당한 답이겠다. 이 대답들이 도시의 시작을 설명한다. 도시는 교환을 위해 만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보와 물건의 교환을 위해 인간이 모여 사는 공간을 도시라 부른다. 교환할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속셈이거나 핵탄두 개발 정보일 수 있다. 팔 것이 칠보산 송이버섯이고 살 것이 원산구두공장 신발일 수도 있다. 다 얼굴과 물건을 맞대고 교환하고 거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 경쟁력은 교환 용이성에 달려있다. 상품이든 정보든. 교환 용이성은 이동 편의성으로 확보된다. 길을 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이동 거리를 줄이는 것이다. 좁은 데 모여 살면 된다. 거듭, 그래서 도시가 생겼다. 그 도시의 존재이유를 부인하는 정치인들이 종종 등장했다. 도시를 도구로 인식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화끈했다. 그는 권력과 수도를 거래하자는 공약을 걸었다. 당선되면 충청도에 행정수도를 만들겠다. 선물은 공평해야 하니 부산은 해양수도로, 광주는 문화수도로 만들겠다. 섣부른 공약이었으나 당선 후 요구는 당연했다. 공약을 이행하라. 수도 이전은 혁명의 정치변혁이나 사회의 집단야심이 배경에 깔려야 하고 절대 권력의 추동이 필요하다. 대통령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핵심공약이니 덮을 수도, 동력이 부족하니 멈출 수도 없었다. 강행과 반대의 아우성 속에서 행정수도는 행정중심복합도시라고 기이하게 타협되었다. 문화수도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바뀌었다. 나는 당선된 그가 이 땅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통령은 하늘이 책봉한 제왕이 아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라고 그는 앞서서 보여주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검사들이 결국 편의점 알바들과 뭐가 다르냐고 본인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실토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 그의 국토공약은 새만금, 한반도대운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저지르면 건축가들이 추슬러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고 집중해도 벅찼을 정부는 오히려 몇 발 더 나갔다. 공평한 선물이 구석구석 필요했으니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공공기관 지방 이전. 이른바 혁신도시였다. 당시 풍경은 가관이었다. 수십만 명의 인생이 매달리고 수천만 명의 생활이 영향 받는 공공기관이 정치인들 공기알로 거래되었다. 큰 것 하나 받으면 작은 것 두 개 양보하고, 맘에 드는 것 던져주면 묵었던 숙원사업 포기해주고. 던져진 공공기관은 지방도심을 살리지 않고 주변 논밭을 파헤쳤다. 국토의 균형발전이라지만 근교 농토의 신도시화였다. 전문용어로 하면 전 국토의 도시연담화다. 지방도시 세수가 늘었지만 자동차 통행도, 길에 쏟는 시간도 늘었다. 멀어진 도시 사이의 산과 계곡을 잘라 새 도로를 냈다. 가족은 갈라졌으며 업무능률은 떨어졌다. 교환 용이성이 부인되었으니 이름은 도시였으나 도시가 아니었다. 기술발달과 화상통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대통령이 왜 평양에 갔는지 지금 다시 묻기 바란다. 통일도 안 되었는데 대박이 난 것은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걱정하던 농부들이었다. 그 논밭이 혁신도시 사업부지에 들어 돈이 된 것이다. 강남 제비다리를 고쳐준 적이 없는데도 갑자기 떼부자가 된 농부들이 상경하여 강남을 기웃거렸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내내 정부의 압박과 협박을 비웃으며 서울 아파트값은 치솟았다. 그 돈은 갑자기 어디서 샘솟았을까.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고층아파트 풍경이 중계화면에 나왔다. 당연히 선택된 소수에게 허용된 공간이다. 중요한 것은 주거선택 자유의 배제다. 지상낙원 사회주의 조국 조선이 배급해 준 집이다. 북향집이어도, 통풍이 안 되어도, 엘리베이터가 안 닿아도 주는 대로 받아라. 경애하는 장군님 은혜에 눈물 흘리며 감격하고 살아라. 공공기관 지방이전이라는 유령이 여전히 국토에 떠돌고 있다. 도시는 개념의 다면체여서 정치로 볼 수도, 공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로만 보았을 때 그 도시는 허물어진다. 도시 정책이 조심스런 것은 실행의 뒷감당이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도시는 사회적 공간이다. 인간은 무, 감자가 아닌지라 논밭에 던져지면 사회적 관계망이 무너진다. 공공기관 직원이라는 이유로 아무데나 던져져야 한다면 남쪽은 북쪽과 무엇이 다르고 얼마나 나은가. 새만금 파묻고 사대강 파헤치겠다고 결정한 자들은 떠났다. 세종시는 사업 완성의 요구와 업무 비효율의 불평이 여전히 맞서 있고 대전, 오송, 조치원과 사안마다 날선 칼을 맞댄다. 갈등의 그 칼을 다음 세대가 맞는다. 혁신도시의 값도 다음 세대가 치러 내야 한다. 그들은 앞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포박된 현재와 낭비될 미래를 향해 내뱉을 것이다, 헬조선. https://news.joins.com/article/23084328일간지부정기칼럼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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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모와 질문 / 아시아도시문화포럼 / 기조강연 / 2018.09.06문화, 음모와 질문 동아시아에서 쓰는 단어, ‘문화(文化)’는 영어 ‘culture’의 번역어다. 이 단어는 일본 메이지시대가 남긴 ‘문화적’ 흔적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문화적’ 차이에 의한 혼란이다. 이 단어의 옆에 역시 ‘culture’로 번역되는, 혹은 이를 번역한 ‘교양(敎養)’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옆에는 ‘manners’에 해당하는 단어가 ‘예절(禮節)’로 번역되어 있다. 문화라는 단어를 잘 들여다보면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중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이고 폭 넓게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집단적 행동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동아시아권은 ‘젓가락문화’를 갖고 있다”는 문장이 이를 보여준다. 이것과 공존하는 의미는 음미해야 할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피카소의 회화를 지칭할 때 동원되는 단어다. 즉 “그는 대단히 높은 ‘문화’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문장이 바로 그 사례다. 이 단어, ‘문화’가 ‘향유할 대상의 차별적 가치’라는 의미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질문은 왜 이 단어는 이런 중첩된 의미를 갖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답을 알기 위해 먼저 들여다볼 단어는 ‘에티켓(etiquette)’이다. 이 단어를 공간으로 구획한다면 당연히 유럽의 궁정(court)이 등장한다. 즉 궁정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courtier)이 갖춰야 할 행동양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행동양식은 왜 필요했을까. 이유는 차별화다. 궁정에 출입할 자격을 갖지 못한 평민들과 차별화되는 자신들의 집단 확인 방법인 것이다. 궁정건물의 시각적 표현이 장식(ornament)이었다면 같은 가치를 갖는 규범적 행동양식이 바로 에티켓이었다. 18세기 유럽의 변화를 주도한 부르주아지에게 에티켓은 자신들을 규정할 수 있는 적절한 사회적 도구가 아니었다. 이들은 과시와 낭비로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결합된 금욕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포착한 단어는 ‘culture’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바, 집단적 생활양식이라는 의미를 자신들의 배타적 표현으로 접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에티켓처럼 차별화된 생활양식이었다. 배우고 음미해야 이를 수 있는 가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맞게 향유의 대상을 가장 금욕적인 감각인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음미할 대상의 구분으로 일곱 개를 규명한 것이 ‘예술(fine arts, beaux-arts)’이다. 부르주아지는 또한 에티켓이라는 단어로 지칭되던 행동거지를 ‘예절(manners)’로 치환하여 차별화를 시작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규정한 문화적 생활을 담아낼 공간도 개발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에 권력을 얻게 된 관료(bureau)들을 담는 공간인 기관(institution)의 모양을 담게 된 것이다. 미술관으로는 루브르궁, 음악당으로는 라이프치히게반트하우스가 부르주아지의 예술을 담는 첫 기관이 되었다. 거기 담긴 것들을 음미하는 것을 문화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아래로는 노동자, 농민들의 행동양식도 차별화했다. 차별화 대상이 농민들일 경우는 민속문화(folk culture), 노동자일 경우는 대중문화(mass culture)로 지칭했다. 문화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대중문화, 대중예술을 문화, 혹은 순수예술의 하부에 배치하면서 설치한 계층구분 도구는 교육이었다. 예술은 음미하는데 교육을 통해 넘어야 할 문턱이 존재했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그런 문턱이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도 음미가 가능한 저급한 것이었다. 향유의 대상으로서 지탱되던 문화는 가치차별적인 것이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미술관과 음악당에 앉아서 매너를 지키면서 생산자의 작업을 음미하는 향유자가 교육되었다. 이 문화가 민주주의의 전파, 제국주의의 정복과 뒤섞이면서 지구 곳곳에 퍼져나갔다. 심지어 동아시아 한국에도 전파되었다. 이제 질문은 스스로를 향한 것이다. 산업화를 추동하던 가치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산업화시대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는 규정하기 어려운 회색계층이 두텁게 존재한다. 고전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음악의 작곡은 20세기 초반 이후 무조음악의 등장과 함께 별 존재감이 없어졌다. 캔버스 앞에서 유화물감을 칠하던 미술은 더 이상 아트페어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예술로 규정되었던 일곱 개의 분야 외에 새로운 분야인 영화, 사진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사회에 행사하기 시작했다. 대학이라는 제도를 통해 생산되던 한국의 가곡은 아무 제도 없이 생산되던 가요에 밀려 존재감이 없는 것이 한국의 음악현실이다. 심지어 그 가요는 K-pop으로 진화하여 사회를 흔드는 산업이 되었다. 이제 질문은 기관화되었던 문화로 향한다. 20세기 이후 놀랍게도 전 세계가 이견 없이 공유하는 정치적 가치는 ‘민주(democracy)’다. 이것은 민주주의 개척지역이었던 미국과 유럽 외에도 지구상 거의 모든 국가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되었다. 이 가치는 구성원들간의 가치 차별을 배제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동등한 권리와 의미를 갖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가치는 당연히 새로운, 차별이 배제된, 제도적 교육의 전제가 불필요한 문화를 요구한다. 지금 이 ‘문화’라는 단어의 의미에 여전히 향유해야 할 가치가 정착되어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18세기에 유럽에서 덧붙인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떼 낸다면 남는 것은 그냥 생활의 방식을 지칭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그 생활의 방식은 무엇이고 거기 남는 가치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21세기, 이 시대의 문화는 기관의 담장을 넘어 거리로 나올 것을 요구한다. 거기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문화는 공공의 공간에서 모두에게 개방된 접속의 형식을 띄어야 한다. 그것은 테두리도 문턱도 없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교육된 특정 계층에게만 개방된 모습을 부인한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파악하고 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새로운 문화의 모습일 따름이다. 그 문화는 집합체로서 우리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일 따름이다. 그래서 이제 문화와 가장 가까운 단어는 교양이나 예절이 아니고 자각일 것이다. 거듭 우리가 과연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드러내는 자각. 문화는 우리의 정체성을 가장 뜨겁고 활기 넘치게 보여주는 사회적 도구일 것이다. The word “mun-hwa(文化)” used in East Asia is a translation of the English word, “culture.” This word is not free from the "cultural" remnants left by the Japanese Meiji era. It causes confusion through “cultural” differences. This is because the word “gyo-yang(敎養)” is also translated into “culture.” Also, next to it is also the word “ye-jeol(禮節)” that is translated into “manners.” When taking a closer look at the word culture, we can see that there’s an overlap of two different definitions. The most common and widely accepted definition is collective behavior. The phrase "East Asian countries have a ‘culture of using chopsticks’" illustrates this idea. The definition which coexists with this idea expresses the value of being appreciated. It is a word used when referring to such things like Beethoven’s symphony or Picasso’s painting. An example of this is how it is used in the phrase, "he is very cultured."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word “culture” started to take on the meaning of the “discriminative value of objects to enjoy.” The question which arises here is why this word has taken on this overlapping meaning. To find the answer to this question, the first word to look at is “etiquette.” If you ponder upon this word, the European courts emerge. In other words, it depicts the behavior that must be possessed by a courtier who can enter the courts. So why is this behavior necessary? It was because there was a need for differentiation. It was the method used to identify and differentiate the courtiers from the commoners who were not qualified to enter the courts. Just as the ornaments on the wall of court buildings were a visual representation of differentiation, etiquette was the normative behavioral form having the same purpose. For the bourgeoisie who led Europe’s transformation in the 18th century, etiquette was not an appropriate societal tool to define them. This is because they were an ascetic group combined with Protestant ethics, prohibiting themselves from the expression based on the ideas of flaunting and squandering. Therefore, the word they captured to use was “culture.” As they started to become generally accepted, they began to accept the significance of collective lifestyle as an expression exclusive to them. Thus, similar to etiquette, this was a differentiated lifestyle of the bourgeoisie. It was a value possible through learning and appreciation. They began to limit the objects of enjoyment to the most ascetic senses of sight and hearing to fit their value system. As a result, the seven objects to be appreciated are encompassed in the word “ye-sul (藝術, fine arts, beaux-arts)”. The bourgeoisie also began to differentiate by replacing all of their behavior previously defined as etiquette, with the word “ye-jeol (manners)”. The bourgeoisie also created a space for the cultural life that they defined. It was in the form of an “institution” which was a space for the various “bureaus” that gained power throughout the new era. The Louvre as an art museum and the Gewandhaus Leipzig as a music hall became the first institutions to represent the art of the bourgeoisie. It started to call the things appreciated there, culture. The bourgeoisie also differentiated the behavioral patterns of workers and peasants. In the case of differentiating farmers, they were referred to as folk culture, and for workers, they were referred to as mass culture. Education was a class-based tool installed by implementing popular culture, popular arts, culture, or fine arts under the vertical classification of culture. Art could only be appreciated through education. However, popular culture was easier to be enjoyed intuitively without requiring such a requirement. The culture sustained as an object to be appreciated was value-based. In the 19th century Europe, people were trained to sit down in an art museum and a music hall to enjoy the work of producers while keeping their manners intact. This cultur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mixed with the spread of democracy and the conquest of imperialism. It even spread to the East Asian countries including Korea. Now you can ask yourself a question. The value which propelled industrialization still exists, but it does not exist as it did in the era of post-industrialization. In this much-complicated society, there is a thick and ambiguous division line hard to cut clear between the capitalist and laborer. Since the early 20th century, classical music played by an orchestra has lost its presence with the emergence of atonal music. Painting on a canvas was no longer visible at art fairs. In addition to the seven fields defined as the conventional fine arts, new fields such as cinema and photography began to exert a much greater influence on society. In Korea, the reality is that the so-called Korean relic songs(歌曲) which were produced through a university system lost its presence to newer Korean pop which was produced through no institutional system at all. Those Korean songs evolved into K-pop which now has an unprecedented impact on society. Now the question goes for institutionalized culture. Surprisingly, since the 20th century, democracy has become a political value that the entire world shares. It has become a value for almost every country in the world on top of the U.S. and Europe, which were the democratic frontiers. This value excludes the discrimination of value among members. All members of society have equal rights and significance. This new value naturally requires a culture that is free of new, discriminatory, institutional and educational principles. Now, it is difficult to argue that the value of the word “culture” still has to be established. If you take away the value of an object to be appreciated from Europe in the 18th century, the only thing that remains is to refer to the way of life. So the question is what the way of life is and what its value is. The culture of the 21st century requires that the meaning of culture go beyond the walls of the institution. This is because that the true and unique meaning of culture is public daily life expressing their collective identity. Culture must be shaped in the public space and be open to everyone. It requires space without edges or limits. It must also not be prevented from being open only to a certain class of educated people. If we understand and express that we coexist in such as this, a new culture will be created. Culture is an answer to the question of who we are as a collective group. So the most similar word to culture is now awareness, not etiquette or manners. We realize over and over again who we are and how we live. Culture will become a societal tool that portrays our identity in the most passionate and active manner.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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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도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 중앙일보/ 사설칼럼 / 2018. 09. 20https://news.joins.com/article/22988414 관광객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관광도시를 만들어 주시오. 이렇게 주문한 사람은 어느 도시 시장이었다. 표현이 달라도 비슷한 시장, 군수들이 있었다. 한낱 건축가를 붙잡고 이렇게 요구하는 건 유명해진 성공사례 때문이었다. 쇠락하던 탄광도시가 관광도시로 바뀌었다더라. 미술관 하나로 전세역전의 잭팟이 터졌다더라. 시장, 군수, 의원들이 스페인의 도시 빌바오에 줄지어 연수를 다녀왔다. 소문의 유명한 도시들이 동반 목적지였겠다. 신문에서 관광성 외유라 의심하는 그것이다. 혈세절약 위해 집약적 체류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절 버스로 돌며 서둘러 사진 찍고 돌아왔을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은 관광객이었고 본 것은 먼 발치의 멋진 구조물들이었다. 파리에 에펠탑이, 뉴욕에 여신상이, 시드니에 오페라하우스가 있더라. 사진 찍으니 멋있고 그걸 보러 나 같은 관광객이 물밀 듯이 밀려오더라. 그런데 우리에게는 없구나. 우리도 랜드마크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강변에 이상한 인공섬 만들고, 용도도 모르는 채 디자인플라자 만들었으며, 한강 복판 외딴 섬에 오페라하우스 만들려고 했다. 그들이 파악한 도시의 정체성은 세트장이나 도박장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젊어서 외국 체험 기회가 없던 세대가 나이 먹고 사회 주역이 되었다. 방문한 도시의 속살을 관찰하거나 가치를 음미할 여유 없이 바쁜 고위직에 덜컥 올라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질주하는 관광버스 유리창 너머로 보고 느낀 대로 건축가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랜드마크 만들어 주시오. 상징조형물 건립합시다. 관광객이 밀려오도록. 옆집 트로피를 구경했으면 땀 흘려 운동하자 다짐해야지 우리도 트로피 만들어 진열하자면 곤란하다. 옆집의 땀은 이렇다. 빌바오는 미술관 건립 훨씬 전에 계획재단으로 <빌바오 메트로폴리 30>, 실행조직으로 <빌바오리아 2000>이라는 개발공사를 만들었다. 임무는 관광자원확보가 아니고 시민들이 살기 좋은 도시조성이었다. 이들은 개발사업으로 번 돈을 재투자해 철도 걷어내서 공원 만들고 흉악한 구조물 철거해서 우아한 가로등으로 도시 어두운 곳을 밝혔다. 석탄 실은 열차가 아니고 걸어다니는 시민들을 위한 도시의 틀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 시장이 던진 승부수가 미술관이었다. 귀띔하거니와 한국에서 책정되는 건축예산으로는 그런 역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싸게 넣고 크게 먹자면 그게 도박장이다. 서울에도 관광객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곳이 있다. 너무 밀려들어 주민들이 분노의 팻말을 써붙이기에 이른 곳이 북촌이다. 한옥이야 남산, 민속촌에도 있다. 그러나 북촌에 관광객이 밀려드는 건 이곳이 세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삶의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지자체장들을 향한다. 당신은 누구에 의해 왜 선출되었습니까. 유권자는 관광객 아닌 시민이다. 선거는 관광주무 부서장 선임과정이 아니고 시민의 권력이양 절차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공평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선거로 권력을 위임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관광버스 불법주정차를 허용할 테니 시민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한다면 그 지자체장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오해하거나 잊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연수 다녀온 도시는 거의 선진국에 있을 것이다. 그 도시는 세트장 운영으로 번 돈을 투전판에 재투자해 이룬 결과물이 아니다. 그 공통점은 랜드마크의 존재가 아니다. 장애인, 노약자, 외국인 등의 소수에 대한 차별이 없거나, 없도록 치열하게 노력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마땅히 그것이 시장군수가 꿈꾸는 도시여야 한다. 그때 그 도시는 외국인들이 기어이 방문하겠다는 관광도시가 된다. 그들은 잃어줄 돈지갑 쥔 관광객이 아니고 문화적 호기심 가득한 손님이다. 세상에 운명의 별자리로 정해진 장애인은 없다. 우리는 모두 늙으면 결국 장애인이 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 가면 즉시 장애인이 된다. 한국말 못하는 방문객도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게 배려하는 도시가 당연히 국제화된 도시다. 랜드마크 없어도 관광도시다. 가장 중요한 문화공간은 미술관과 음악당이 아니고 거리와 지하철이다. 값싸게 모집해서, 특혜시비 많은 재벌 면세점 매출 올려주고, 자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 먹고, 이 땅에 쓰레기 던지고 가는 관광객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관광도시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앙정부에서 지역밀착형 생활 SOC를 만들겠다고 한다. 사용된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방향은 확실히 옳다. 정치 뿐 아니라 도시도 생물과 같다. 여기저기 잘라 개발할 대상이 아니다. 혈도를 짚어 최소한의 침을 놓아 그 생명력이 도시에 퍼져나가게 하는 것이 최선의 도시개발 방법이다. 우리에게는 걸어서 갈 수 있는 놀이터와 도서관이 가득 필요하다. 그 벤치에서 이국의 관광객이 안전하고 불편 없이 쉴 수 있으면 그게 관광도시다. 결국 이 사업은 지자체의 몫이다.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지방도시의 시름이 크다. 나이 많은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고 관광객도 함께 즐기는 구조물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 군수도 있었다. 나는 기꺼이 화장실, 안내소, 작은 전망대를 설계했다. 그러나 쇠락하는 도심에 518미터 높이 전망대를 세워 관광명소로 만들어야겠다는 도시가 여전히 존재하는 게 우리 시대다. 그래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물어야 한다. 당신은 누가 선출했는지. 그 도시는 세트장인지 삶의 터전인지.일간지부정기칼럼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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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ile Destination / 두바이엑스포 한국관 공모전 주제 / 2018. 08. 30인간은 교환을 위해 도시를 만들었다. 그들이 교환해야 할 것은 정보지식과 물품이었다. 가장 합리적인 교환을 위해 인간은 모여 살았고 교환의 거리가 최소화되는 공간이 도시였던 것이다. 그 교환의 핵심공간이 시장이었다. 자본으로 치환되는 교환가치는 최소한의 이동, 즉 가장 경제적인 모빌리티를 요구했다. 산업화시대가 이를 위해 만든 답은 엔진과 바퀴를 이용한 운송수단이었다. 인류는 새로운 교환수단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그것은 교환의 목적과 방식을 새롭게 규정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모빌리티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고 사회구조를 다시 정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 지식에서 정보로 이전 시대에는 지식의 배타적 소유가 권력이었다. 그러나 지식소유의 테두리가 모호해지면서 이제 그 지식이 어디 있는지의 정보가 훨씬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지식의 권위보다 정보의 접근성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 공간에서 시간으로 교환을 위해 움직이려면 도시공간을 물리적으로 이동해야 했다. 공간을 이용하고 점유하는 방식에서 가치가 매겨지고 가치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모빌리티로 인해 공간 좌표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다만 그 교환의 대상에 대한 정보의 이동 시간에 훨씬 더 큰 가치가 매겨지기 시작했다. - 도로에서 미로로 이전의 교환은 출발지와 도착지가 명기된 도로를 요구했다. 그러나 새로운 모빌리티의 사회에서 목적지와 도착지의 규정은 무의미해졌다. 어느 위치에서 어느 방향의 어떤 곳으로 이동할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입체미로의 시대가 된 것이다. 어디로나 연결되고 출발과 종착의 규정이 무의미해진 모빌리티의 시대다. 산업화의 후발주자이며 지각수용자였던 한국은 새로운 시대에 가장 기민한 수용자이며 개척자가 되었다. 한국은 인터넷이나 핸드폰 보급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회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그 사회의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 목적지가 존재하는지, 규정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두바이엑스포의 주제, 단어로서의 모빌리티는 결국 움직여서 도착할 목적지의 존재를 전제한다. 분명 한국은 새로운 모빌리티의 엔진을 달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좌표로 지정되거나 문장으로 서술되기 어려운 목적지일 수 있다. 목적지의 규명은 지식과 공간과 도로의 몫이었다. 지금은 미로로 얽힌 정보를 시간으로 판단하는 시대다. 공간으로 번역된 그 모습은 암울한 예언일 수도 있고 화사한 찬가일 수도 있다. 여기서 질문은 한국 사회, 혹은 도시가 새로운 모빌리티를 통해 닿을 꿈을 건축을 통해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 답변의 책임은 당연히 한국의 건축계에 있으니 이를 펼칠 공간으로 국제적 정기시장, 엑스포가 마련될 것이다. 이번에 그 엑스포가 열리는 곳은 사막 너머 신기루 같은 도시, 두바이다. 서현 (한양대 교수, 두바이엑스포 한국관 건축설계공모 PA)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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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 여의나루 설계 국제공모전 취지문 / 2017. 02여의나루, 한강을 향한 교두보 이 땅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수시로 한강을 만난다. 한강은 이 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생명줄이었다. 취수, 조운 그리고 범람이 거기 얽혀있었다. 20세기 후반 치열한 치수(治水)가 있었다. 여의도는 그 과정에서 얻게 된 새로운 도시공간이다. 이 땅에서 실험된 최초의 근대적 계획도시다. 여의도는 대한민국이라는 좌표에서 원점이라는 위치를 획득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미디어의 핵심공간이 된 것이다. 국토의 크기를 가늠해야 할 때는 항상 여의도의 몇 배 크기라고 설명해야 이해가 되었다. 여의도는 시작이고 중심이고 기준이 되었다. 이제 한강은 취수, 조운, 범람으로부터 자유로운, 혹은 멀어진 공간이 되었다. 질문은 그렇다면 지금, 그리고 미래의 한강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한강을 통해 새롭게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생존과 기능의 가치가 아닌 문화의 가치일 것이다. 우리는 한강을 통해 우리가 누구이며 이 도시가 무엇인지를 묻고자한다. 21세기의 여의도는 여전히 계획과 실험의 공간이다. 여의도는 새로운 한강의 모습을 선보일 교두보면서 첨단기지가 될 것이다. 이어질 한강연관 사업은 모두 이 여의나루에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여의나루의 모습을 묻는 이 공모전의 질문은 그래서 정박과 승선에 머물지 않는다. 질문은 한강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승선한 이 배는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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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勸酒) / 중앙일보 / 나를 흔든 시 한 줄 / 2016. 04. 27권주(勸酒) 勸君金屈卮그대에게 이 잔 권하니 滿酌不須辭 잔이 넘친다 사양 말게 花發多風雨 꽃 필 때 비바람 많고 人生足離別 인생에 이별 많으니 - 우무릉(于武陵·810~?) 깡마른 문장이다. 그런데 담긴 감수성이 흥건했다. 한숨이 나왔다. 무장한 논리로는 손톱만큼의 해석도, 이해도 불가능한 세계였다. 글재주 아닌 관조의 적층(積層)이 한 길 넘게 깔려야 가능할 것이다. 거기 꽃잎 하나를 살짝 얹어 피워낸 시였다. 들여다보아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달관의 경지였다. 내게는 감탄의 한숨이 나왔다. 대학원생 시절 만난 중국 당나라 때 시다. 연구실은 옥탑방이었다. 내려다보면 성주암 계곡에도 시절의 부름대로 꽃이 폈다. 해가 지면 서편 산자락이 검어지고 능선 뒤에 노을의 휘장이 펴졌다. 거대한 빛의 향연이고 침묵의 교향시였다. 그때 이 시를 만났다. 천 년 전의 봄날에도 꽃은 피고 노을은 졌구나. 그리고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아야 할 슬픔이 있었구나. 시는 말을 건넸다. 아니 그냥 술 한 잔을 권했다. 먼저 진 꽃이 아직 거기 벌판에 얹혀 있는 꽃잎에게. 무심히, 그리고 서서히 돌고 있는 지구 위에서. 계절이 찬란하다. 하지만 사월의 표지 뒷면에는 피지 못한 꽃의 슬픔이 난만히 묻어 있다. 잔은 술인지, 눈물인지 가득하여 넘친다. 그대에게 이 잔 권하는 지금, 비바람 많은 사월이 가고 있구나. http://news.joins.com/article/19945262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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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 동아일보 / 칼럼 / 2016. 01. 06지구의 궤도에는 눈금이 없다. 지구는 그냥 육중한 몸을 굴리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을 뿐이다. 그 끝에 조물주가 설계한 불의 심판이 있을지, 수소가 들끓는 불구덩이가 있을지 지구도 모를 것이다. 눈금은 그 표면에 기식하는 어떤 생명체들이 자신들이 만든 달력에 새겨 놓았다. 인간들은 폭죽을 터뜨렸다. 눈금이 한 바퀴 돌았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다. 지구가 동시에 그 눈금에 얹힌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는 날이 저물고 있는데 어디에서는 새해가 밝았다고 환호성이었다. 시작은 어디고 끝은 무엇인가. 첫 역사서는 그리스어로 쓰였다. 눈금이 없는 상황을 카오스(chaos)라고 칭했다. 어떤 틈에 끼어 분류되지 못하는 상태를 지칭했고 혼돈이라고 번역했다. 분류하는 능력은 로고스(logos)라고 했다. 눈금의 좌우에 만물이 편안히 놓인 상황은 심메트리아(simmetria)였다. 번역하면 조화였다. 구분의 결과가 조화롭지 못하면 그 도구는 로고스가 아니다. 로고스가 없는 눈금과 구분을 강요할 때 그것은 폭력이다. 한반도를 나눈 것은 폭력이었다. 현재 지구표면에서 가장 이상하게 나뉜 곳이다. 그 구분의 실상인 기이한 희극은 우리가 주인공인 순간 비극으로 바뀐다. 연초면 양쪽에서 모두 연속극 재방송처럼 통일의 대사를 외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옳고 너희는 여전히 그르다는 전제가 덮이면 대사는 독백이다. 앞에 놓인 것은 상대가 아니고 허공이나 봉창이다. 눈금이 넘어갈 즈음 남쪽에서 자행되는 분류폭력의 현장이 대학입시다. 학생들은 인문계, 이공계, 예체능계라는 구분선 안으로 도박패를 던져야한다. 건축은 이공계로 분류된다. 하지만 적지 않은 대학에서 건축학과의 연간성취는 인문계로, 교수들의 연간업적은 예체능계로 나눠 평가한다. 그렇다면 이 분류의 배경에 있는 것이 과연 로고스인가. 학생들을 이 이상한 테두리로 나눠 가두고 그 안에서만 선택을 하라는 건 야만적 폭력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 위반이다. 나눈 자들은 편안하겠으되 나뉜 자들은 고통스럽다. 나뉜 자들은 미래의 지구가 아니고 바로 지금 이곳이 불타는 지옥이라고 경멸하기 시작했다. 참혹하다. 굳이 나눠놓고 융복합에 미래가 달려있다는 국가의 미래는 카오스다. 그 국가의 현재는 희극이다. 지구와 한반도의 미래도 걱정스러우나 내 앞길도 평안해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어찌 구분이 될까. 나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니 건축과 교수다. 건물을 설계하므로 건축가고 책도 몇 권 썼으므로 저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당황스럽게 건축학자나 건축비평가라고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출입국카드작성과 연말정산의 순간에 정부의 분류기준으로 근로자, 교육자, 예술가, 저술가 중 나는 내가 누구인지 고민했다.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자의 뻔한 모습일 것이다.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인문계인가, 자연계인가, 예체능계인가. 대학 교수도 모르는 것을 고등학생들에게 알아오라는 이 사회의 로고스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나는 분류를 거부하는 자유를 얻었다. 나는 떳떳하고 뻔뻔하게 전부에 속하기로 했다. 나는 몇 개의 특허를 갖고 있다. 그 대상은 비닐하우스거나 접고 펴는 구조물들이다. 대상이 건물인지를 구분할 필요도, 건축과 교수가 해야 하는 일인지도 물을 필요가 없다. 나는 눈이 오면 무너지는 비닐하우스에 좌절했으며 재난으로 몇 달 기식할 공간이 없는 이재민들의 처지에 애통해했을 따름이다. 고백하거니와 분류되지 않는 나는 분류하기 어려운 이런 걸 디자인하는 순간 행복했다. 나는 새해에 기꺼이 발명가의 갈래를 하나 더 얻을 생각이다. 천문학자들이 눈금을 어찌 넣든 지구는 굴러갈 것이고 조류학자들이 뭐라 나누든 새는 알아서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혼돈의 갈래를 나눌 것이고 분류되어야 하는 아이들의 행복은 여전히 유보될 것이다. 나누는 자들은 칼을 든 자들이다. 누군가 조자룡 헌칼 쓰듯 휘두른 칼날에 우리 모두가 베인 상처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 술 취한 망나니처럼 그 칼을 되 집어 다음 세대에게 휘두르고 있다. 우리에게는 자랑스럽다고 강요할 영광보다 보듬고 다독여야 할 상처가 훨씬 많다. 로고스는 말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며 그 실체는 의사소통이다. 이 땅에서 칼은 칼이었고 말도 칼이었다. 설득하지 않고 찌르고 내리치려고만 했다. 그 칼, 새해에는 내려놓자. http://news.donga.com/3/all/20160106/75747624/1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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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꿈섬 / 노들꿈섬 공모 취지문 / 2015. 06도시의 섬 그곳에 섬이 있다, 서울 한복판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의 이름은 중지도(中之島)였다. 우리 기억 속의 그 섬은 조금씩 모습이 다르다. 강수욕을 즐기던 백사장, 연인들의 한적한 데이트 장소, 국군의 날 행진행렬이 통과해야 하는 곳, 서울불꽃놀이축제가 열리면 갑자기 발 디딜 틈이 없어지는 그 섬. 지금 그 섬의 이름은 노들섬이다.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도시의 섬’은 고립된 초현실의 상투적 표현이다. 노들섬은 그 표현에 꼭 맞게 서울 복판에 있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스쳐 지나가는 섬이다. 도시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석양과 원초적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비일상적인 풍경, 때로는 초현실적인 상황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노들섬이다. 시민의 꿈 화산남 한수북(華山南漢水北) 천년승지(千年勝地) 광통교(廣通橋), 운종가(雲鍾街) 건나드러 낙락장송(落落長松) 정정고백(亭亭古柏), 추상오부(秋霜烏府) 위 만고청풍(萬古淸風)ㅅ경(景) 긔엇더니 잇고 권근의 상대별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조선 개국 초기 한양 복판인 청계천 광통교에서 도시의 천년을 내다보는 꿈과 희망의 그림이 여기 그려져 있다. 서울은 여전히 그런 곳이 되어야한다. 우리는 미래를 함께 꿈꾸고 만들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서울에 담고 그런 사회가 서울을 만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서울에 현실과 타협과 좌절에 의한 불만의 공간이 혼재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초현실의 공간, ‘도시의 섬’은 다른 공간이다. 지금 서울의 복판인 한강 노들섬은 우리의 꿈을 그려낼 수 있는 공간, 노들꿈섬이 되고자 한다. 차별받던 서자 홍길동이 건립한 율도국(栗島國)이나 가난한 선비 허생이 꿈꾸던 빈 섬(空島)도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피터팬의 네버랜드(Neverland)도 그런 섬이었을 것이다. 이 섬에 여전히 필요한 주제는 시민과 역사다. 1. 시민 사회가 시민이 모여서 이루는 집단이라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그것은 사회체계 혹은 운영체계를 지칭한다. 노들꿈섬은 창조적 제안자의 독창적인 기획 아이디어로 첫 운영체계가 확립될 것이다. 이 섬의 운영체계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시민사회가 어떤 것일지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가치관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섬을 완성하는 것은 시민의 참여다. 어떤 방식으로 시민이 그 사회의 완성에 참여하고 섬의 모습을 갖춰나갈지를 서술하는 정교한 룰과 시나리오가 포함되어야 한다. 2. 역사 사회와 도시는 위대한 엘리트에 의해 완결되지 않으며 완성되는 순간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섬에 다음 세대들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그들의 흔적을 퇴적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노들꿈섬은 시민의 경험과 기억이 적층되는 곳이어야 한다. 그 기획의 실현에 필요한 공간 및 첫 시설 구상은 적정한 규모로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고 후대 시민의 행태와 요구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그들의 공간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계획을 배경에 깔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공모 민주사회는 결론이 담는 가치를 판단하기보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가치를 판단한다. 건강한 사회는 치열한 경쟁과 공정한 판정을 통해 유지되고 발전한다. 그러한 경쟁과 판정의 제도적 장치가 공모전이다. 노들꿈섬의 미래모습도 공모전을 통해 선정될 것이다. 노들꿈섬 운영기획안, 공간계획안, 그리고 최초 운영자가 모두 공모를 통해 선정될 것이다. 이 공모는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구조물이 아니라 가장 민주적 과정이라는 기념비를 얻고자 한다. 이 사업은 노들섬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획안부터 공모를 통해 결정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물론 그 기획안은 우리의 꿈을 투영한 것이되 현실공간에서의 실천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 공모전이 기존의 건축현상공모 방식과 다른 점은 섬의 기획과 운영방식에 대한 공모가 선행된다는 점이다. 필요한 시설의 성격과 규모는 그 결과에 의해 제시될 것이다. 이 공모전이 기존의 위탁운영자선정공모방식과 다른 점은 구조물을 먼저 지어놓고 제 삼의 운영자를 뽑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기획에 의해 운영방식이 결정되고 그 결과에 맞춰 구조물이 지어질 것이며 그 제안자에게 운영을 맡길 것이다. 선정된 기획안이 구조물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건물이 지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공모전이 기존의 사업자투자공모방식과 다른 점은 서울시 재원으로 필요한 시설과 공간을 조성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익사업을 통해 투자비를 회수해야 하는 사업자가 아니라 적정운영비회수와 공익가치실현의 균형을 잡으며 시민과 역사에 대해 책임의식이 있는 운영자가 선택될 것이다. 공모진행 이 공모는 1단계 운영기획공모, 2단계 운영전략공모 그리고 3단계 환경조성공모의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운영기획공모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기획안을 뽑는데 목적이 있다. 이 단계는 우리가 어떤 사회의 꿈을 그리고 그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이 섬에서 구현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우리 사회가 특정한 직업의 종사자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예선은 인문, 사회, 환경 등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 그리고 그들의 협력조직에게 열려있다. 우리 시대의 허균이나 박지원, 혹은 홍길동이나 허생의 상상력이 필요한 공모단계다. 다음 단계인 운영전략공모에 진출하기 위한 복수의 기획안이 선정될 것이다. 운영전략공모는 운영기획공모에서 선정된 주체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가장 탁월하고도 실현가능한 안과 이를 운영할 운영자를 선발하는 것이 목적이다. 노들섬의 가치를 발굴하고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 현실적으로 작동가능한 조직체계, 재정계획이 제시되어야 한다. 준공 이후의 서울시 재정투입은 없거나 최소화되어야 하므로 재정적으로 자족적이며 지속가능한 기획과 운영방안임이 확인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공간이용 구상방안도 검토,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조직력과 재정관리능력을 갖춘 주체가 하나 선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노들꿈섬의 첫 운영자가 될 것이고 그의 운영전략을 기본으로 환경조성공모의 지침이 작성될 것이다. 환경조성공모는 건축, 조경, 도시전문가가 참여하여 진행하는 전통적인 현상공모형식이다. 운영전략공모에서 당선된 운영전략을 실현하는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이용계획이면서 우리가 도시에서 요구하는 경관기대수준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설계안을 선정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회적 상상력을 공간적 상상력으로 번역해낸 가장 탁월한 계획안이 당선안으로 결정되고 그 설계에 의해 노들섬이 조성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노들꿈섬이 될 것이다. 노들꿈섬공모 이 공모전은 유연하게 변하면서 시대의 흔적과 퇴적을 담을 수 있는 운영전략과 이를 담을 수 있는 환경설계안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완의 계획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섬 전체의 기반시설과 필요한 시설이 추가 사업이 없을 경우에도 충분한 완성도를 갖추고 작동할 수 있는 계획안이어야 한다. 노들꿈섬은 우리의 희망이 되기를 기대한다. 과정과 결과, 가치와 형식의 모든 것이 우리 시대가 펴보이는 야심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거기 세워진 특정한 구조물이나 섬의 일부분이 아니라 섬 전체가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 후대에 평가받기를 기대한다. 이 공모전의 진정한 심사위원은 다음 세대의 시민들이 될 것이다.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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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 한대신문 / 교수칼럼 / 2015. 03. 30이것도 질병의 종류는 아닐까. 아니면 덕후로 표현되어야 하거나. 고등학교 생기부의 희망 진로 여섯 칸이 일관된 경우다. 건축가! 물론 의사, 법관, 소설가, 경영자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런 학생들을 앞다투어 뽑으라고 한다. 전공적합성이라는 명목이다. 건축의 열정을 불태우는 이 학생들은 수시 면접불만을 인터넷에 올려놓는다. 건축과 입시인데 건축에 관한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더라고. 간혹 입학통지를 받으면 또 묻는다. 입학 전에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컴퓨터 프로그램을 공부해야 하냐고. 그리고 입학하면 바로 과내 동아리와 학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불굴의 전투의지로 건축설계스튜디오에서 꼬박꼬박 밤을 새며 건축폐인의 길을 걷는다. 건축에 의한, 건축을 위한, 건축의 대학생활이 시작된다. 조언은 간단하다. 그럴 필요 없다. 건축은 평생 할 공부다. 결연하게 대학시절 전부를 소진할 필요가 없다. 고등학교 때 건축을 공부할 필요는 더욱 없다. 네가 아는 위대한 건축가들 중 태반은 대학건축교육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대학 때 열심히 딴 짓 하던 사람들이다. 바로 그러기에 제대로 된 건축가가 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건축과가 아니고 대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이다. 대학 재학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대학 재학의 흔적은 평생 유지된다. 그러기에 그 전공이 대학생활에 군림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학은 고등학교 시절에 겪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인간들을 모아 놓는다. 대학은 그 사이를 마음대로 헤치고 다닐 온전한 자유를 제공한다. 선택한 전공이 무엇이든 세상이 얼마나 신기한 사고의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결국 더욱 큰 사고의 폭과 자유를 얻게 하는 곳이다. 지적 자유를 얻게 하는 곳. 대한민국은 일본 메이지시대의 도구적 교육관을 이어받았다. 그들은 입학하는 학생을 문과 이과로 나누고 졸업하는 학생들의 가치를 취업률로 재단한다. 그들에게 대학생은 산업체의 요구를 받들어 취업 직후 바로 전선에서 사용되다 소모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 취업생이 이십 년 뒤에 얼마나 무참히 정리해고 되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에 성공해서 위대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없다. 교육부장관이 그래서 훌륭했다는 찬미도 들리지 않는다.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대학전공은 전자공학이고 교육부장관의 전공은 법학이다. 대학은 평생 갖고 살아갈 무기를 갖추는 곳이다. 그것은 현장에 바로 적용 가능한 전공지식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고다. 그리고 좋은 친구들이다. 서로 다른 전공으로 만나서 서로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다 얻은 인연을 만드는 곳이다. 훗날 전공이 무엇이었는지의 기억은 아스라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함께 배운 가치는 여전히 가슴에 담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움이라는.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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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걷다 / 사람의 가치 / 2014세상을 떠난 건축저널리스트 최연숙을 그리는 책에 쓴 원고. 2012년에 쓴 글이 이제 출간. -------- 광화문을 걷다 이것은 어떤 행동을 서술하는 문장이 아니다. 건축 프로젝트의 제목이었다. 네 개 대학교의 대학원생들이 진행한 건축 프로젝트를 한데 묶어서 부른 이름이 바로 이것이었다. <광화문을 걷다>. 2002년의 여름은 월드컵개최와 본선 4강진출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한국 전체가 들끓던 시기였다. 별로 심심할 틈이 주어지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도 이건 좀처럼 진정이 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터득한 세대의 등장을 과시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회적으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분석도 필요했고 다음 행보가 어찌되어야 하는지도 살펴야 했다.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건축도 의외로 자유롭지 않았다. 이유는 그 열기를 담던 공간이 바로 도시였기 때문이다. 2003년의 여름 언저리에 건축저널인 <건축문화>의 최연숙 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취재자와 취재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로는 별로 만나본 적이 없고, 심심할 때 맥주집에서 만나 쓸데 없는 수다를 안주로 신체와 지갑을 축내던 사이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국민대학교의 장윤규 교수도 항상 함께 있었다. 최연숙 팀장은 여전히 즐겁게 놀 이벤트를 하나 장만하는 중이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네 개 건축전문대학원에서 광화문 앞을 주제로한 공동프로젝트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네 학교는 건국대학교, 경기대학교, 경희대학교, 그리고 한양대학교였다. 내가 전화를 받은 이유가 있었다. 외부에 내건 이유로는 여기에 연관이 있는 한양대학교 교수라는 것이었고 내부에 있는 이유는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술친구라는 것이었겠다. 그러나 나름 다른 근거도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시청앞 광장 현상공모에서 <빛의 광장>이라는 걸 제출하여 덜컥 당선이 되어있던 터였다. 이게 되느니 안되느니 말이 한참 많던 상황이어서 신문, 잡지, 방송에 몇 번 불려나간 일이 있으니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는 주제에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을 것이다. 서울시청앞은 어찌되었건 광장으로 바뀔 것이니 이제 좀더 중요한 공간인 광화문 앞을 갖고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 최연숙씨의 의도였다. 나는 당연히 동의했다. 여기에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내 입장에서도 나름 사연이 있었다. 1999년은 문화부에서 지정한 건축문화의 해였다. 워낙 시의적절하게 뭔가 이벤트를 계속 생산해내야 하는 일간지에서 이 이상한 문화의 해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고 여파는 내게도 밀려왔다. 서울의 길과 공간에 관해 동아일보에 연재를 하게 된 것이다. 일간지의 연재는 시작하는 시점은 있어도 마무리하는 시점은 정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독자의 반응에 따라 연재기간의 신축이 아침드라마의 방영횟수에 뒤지지 않을 정도다. 이미 쓰기로 작심한 것,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첫 주제가 중요했고 나는 첫 공간으로 광화문 앞, 세종로를 짚었다. 노련한 신문사 기자의 조언에 따라 종로가 연재 첫 회에 나가고 세종로가 두 번째 공간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내게 중요한 공간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제안도 아니지만 이곳이 자동차의 공간에서 사람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광화문 앞이 인간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대학교 졸업설계 주제로 가끔 등장하던 것이었으니 내가 첫 제안자라고 주장할 일도 없고, 첫 주장자의 의미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간지 한 면에 나오는 컬럼에서 나는 세종로에서 서태지 사인회도 개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시로서는 아무도 현실적이라고 동의하지 않는 주장을 내걸었다. 학교로 자리를 옮긴 나는 이번에는 한국의 소위 문화적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같은 주장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었다. 광화문 앞을 보행자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은 이후 내가 장비 헌칼 휘두르듯 아무데서나 꺼내놓는 안건이 되었다. 나는 당연히 이 주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다음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를 맡을 계획은 없었다. 결국 당시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튜디오를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께 의사를 타진했다. 몇 해째 시골 읍내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은 이 서울 복판 프로젝트 진행에 흔쾌히 동의를 해주셨다. 당시 경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장윤규 선생 역시 싫다고 뺄 상황이 아니었다. 건국대학교의 제갈엽 선생, 경희대학교의 김찬중 선생께서 모두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꾸려졌다. 팀이 꾸려졌으므로 나는 여기서 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이 구도에 대해 전혀 불만도 아쉬움도 없었지만 최연숙씨는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측은하게 느껴졌는지 코디네이터의 간판을 걸어주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속 편한 코디네이터였다. 스튜디오는 광화문에서 마무리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네 학교의 작업을 전시하고 간단한 심포지움을 가졌다. 그런데 이 심포지움의 주제가 바로 옆 광화문이었으므로 사전 길놀이가 필요했다. 아직 자동차가 씽씽 내달리는 광화문를 실제로 걷기로 했다. 오후 1시에 광화문 앞에서 네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이 모였다. 소집의 일관성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저런 게스트들도 있었다. 장윤규 선생이 특유의 굵직한 필체로 그은 그림을 인쇄한 티셔츠들을 모두 나눠 입었다. 웅성웅성 모인 수십 명의 학생들은 세종로의 서쪽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사박물관이 그 방향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래야 했지만 문제는 시작하는 지점에 정부중앙청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항상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관찰하는 그 건물. 권위주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해도 관공서의 예민한 반응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이 그 앞을 지나면서 지레 더 민감하게 웅크러들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생의 상당부분을 뭔가에 대드는데 사용한 몇 분이 게스트로 참여하고 계셨다. 이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청부청사 앞에서 드러눕고 놀면서 시대가 바뀌었음을 경찰들에게 과시하셨다. 경찰들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 괴상한 집단의 등장과 행진에 대놓고 말은 못해도 꽤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확연했다.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좀 이상해 보이기는 했을지라도 결국 아무런 민폐도, 관폐도 끼치지 않고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심포지움도, 뒤풀이도 끝났다. 나는 광화문 앞이 보행자의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광장이 차도로 나뉘어있다고, 광장의 축이 비틀력 있다고 이야기들을 해도 나는 여전히 이 공간이 기쁘기만 할 따름이다. 다른 문제는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곳이 보행자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역할을 하였고 <광화문을 걷다>라는 이벤트도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최연숙씨의 역할도 거기 묻혀 있다고 믿는다. 내가 최연숙씨를 처음 만난 것이 1996년의 여름이었다. 광복절을 앞 뒤로 한 무더운 여름의 폐교였다. 민족이라는 단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는 지금이지만 당시에는 당당하게 <민족건축인협의회>라는 이름을 내건 집단이 있었고 이 <민건협>이라는 곳에서 주최한 여름건축학교에 학생들과 놀아주는 튜터로 초대가 된 것이다. 당시 월간 <플러스> 기자였던 최연숙씨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인상을 설명하자면 월간지 기자로는 드물게 아직도 뱃심좋게 부산 억양을 고수하고 있는 아가씨였다. 하여간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이후로 한국 건축계의 현실과 미래에 관심과 걱정이 많은 건축월간지 기자와 그런데는 도대체 아무 관심이 없던 건축가인 나, 그리고 좀 더 관심이 없던 또 다른 건축가 장윤규는 대학로 비어할레에서 만나서 공통분모와 별 안주가 없어도 즐겁게 떠들고 노는 술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좀 흘러 나는 한양대학교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최연숙씨는 또 다른 월간지인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에서 나는 건축과에서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학기말의 크리틱이 갑자기 심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자를 초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크리틱이 끝나면 뒤풀이도 중요하므로 나는 대학로를 염두에 두고 간단하게 술친구들을 불렀다. 속으로는 술친구지만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건축가와 기자 초대라는 이런 구도가 별로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세상의 구도가 익숙치 않았던 나는 벽에 붙인 일정공고에서 최연숙씨의 이름 옆에 ‘<공간> 편집장’이라고 써넣었다. 지금은 그 막중한 차이를 이해하지만 당시 내게는 기자나 편집장이나 다 기사 쓰는 사람들이었고 실제 편집장이 아니라면 내가 하루만 편집장에 임명해주면 되는 사안이었다. 당일 크리틱이 끝나고 옮긴 술자리의 안주는 바로 이 ‘편집장’ 사칭으로 본인이 얼마나 사내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의 성토였다. 모든 죄는 내게 있었다. 최연숙씨는 곧 <건축문화>로 자리를 옮겼고 그 여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광화문을 걷자고. 시간이 한참 지났고 나는 국민대학교로 역시 자리를 옮긴 술친구로부터 최연숙씨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수술 후의 병원에서 여전히 부산억양으로 자기 병을 문병 온 남 이야기하듯 하는 환자의 문병을 했다. 그리고 또 한참 뒤 우리는 최연숙씨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 함께 앉아 있었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 했다. 그 옛날은 도시 곳곳에 담겨있을 것이다. 공간이 바뀌면서 옛날도 조금씩 지워지겠다. 대학로의 비어할레에서 지워진 모습은 이제 완성된 광화문광장의 어딘가에 새로 담겨있겠다. 그 어딘가에.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