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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19. 06. 07한여름 냉방 제일 빵빵한 곳. 어디긴, 지하철이지. 요즘엔 지하철에서 빵빵한 게 하나 더 늘었는데 와이파이. 당근 공짜지, 여긴 한국이니까. 단군 이래 대한민국의 최고 성취를 꼽을 때 지하철을 빼면 곤란하다. 서울에 지하철이 없었다면 한국 현대사도 달리 쓰였을 것이다. 광화문 촛불집회는 훨씬 비루했을 것이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걷거나 뛰지 말고 두 줄로 서라는 것이 그들의 계도다. 그러나 시민들은 여전히 꿋꿋하게 한 줄로 서서 민의를 표현한다. 가르치려 들지 마라. 대통령도 탄핵한 시민들이다. 지하철이 우리 시대의 광장이다. 일본 지하철에는 핸드폰 들여다보는 일본인들이 숙연하다. 운행소음 빼면 절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핸드폰에 분명 통화기능이 있으매 지하철이라고 이걸 묵히는 것은 교육칙어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 능률과 실질 숭상. 그래서 어제 먹은 김밥 품평과 오늘 만난 거래처 직원 정보를 동승 탑승객들과 기꺼이 공유함이 우리의 일상 미덕이다. 지하철은 공론장이다. 하나님 어쩌자고 이런 것도 만드셨는지요. 지하철에서는 가곡 ‘쥐’의 가사가 새삼스럽다. 구경 중의 최고구경이 사람구경이다. 게다가 요즘은 외국인들도 늘었다. 조물주는 어쩌자고 이렇게 다양한 능력을 지니셨는지요. 그래서 지하철은 열반묵상과 대중설법의 오백나한 합동친견장이기도 하다. 그 외국인들이 문제다. 지하철에 감복한 그들이 덜컥 눌러앉아 살겠다면 어쩔 것인가. 예멘 난민 오백 명에 사회 전복을 우려하던 곳이 한국이다. 슬기로운 민족의 지하철에는 대비가 다 되어있다. 그들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공항연결 지하철은 운영주체가 다르므로 환승하려면 환승게이트를 거쳐야 한다. 요금이 추가되지 않는다는 문장도 친절하다. 단, 한국어로만. 이방 중생 불만 누적에 영문 안내가 추가된 역도 있으나 여전히 한글 안내만 붙은 역이 즐비하다.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이들을 좌절시키는 방어장치는 여러 겹 마련되어 있다. 한글로 ‘을지로입구’인 역이 영문으로 ‘을지로1가’다. 내려야 할 곳이 서로 다른 이름이니 굳이 묻지 말고 너희들이 알아서 생존하면 된다. 우리의 독창적인 표기법도 있다. ‘일원’역의 영문 표기는 ‘Irwon‘이다. 대문자 I와 소문자 l이 이어졌을 때의 혼란을 세심히 고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어드(Illiad)’나 베르디의 오페라 ‘일트로바토레(Il Trovatore)’에 익숙한 자들이 여기서 무사히 내리기는 어렵다. 이런 은밀한 대비가 공개되면 국제사회의 지탄이 쏟아질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을 위한 탐험장치도 공평히 마련되어 있다. 지하철 2호선 순환방향 지칭의 절묘한 방법이 내선순환·외선순환이다. 이건 전동차 우측운행 정보와 거대한 폐곡선 이해의 공간상상력을 동시에 요구한다. 묘미는 서울 지하철에 좌측운행, 좌우측혼용운행이 두서없이 섞여있다는 것이다. 시계방향·반시계방향 지칭은 일반시민 지적수준에 비해 너무 난이도가 낮을 것이다. 플랫폼에는 친절하게 비상탈출 안내도도 있다. 화재 시 공황상태에서 읽어야 하는 도면이다. 그런데 그 입체도는 건축전공 겨우 삼십 년 경력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다. 지하철 이용은 신체건강 외에 공간지각력 증진에도 무척 좋다. 외국지하철에도 사회적 약자 배려석은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곳은 별로 없다. 한국의 권위는 나이다. 지하철 언쟁의 최고 기폭장치가 있으니, 얻다 대고 반말이야. 주민등록증 지참이 필요한 건 불심검문이 아니고 경로석 착석순위 결정근거이기 때문이다. 민쯩 까봐. 그래서 가끔 경험 있고 노련한 자들이 경로석에, 노련하고 약삭빠른 자들이 노약자 보호석에 앉는다. 요즘은 임시로 산달이 된 척 부스스한 여자들도 앉아가는 임산부배려석도 등장했다. 아줌마가 먼저 앉으면 여섯 명, 나중에 앉으면 여덟 명. 장의자 모양 좌석이던 시절 서울 지하철 좌석 한 줄 정원에 대한 학생의 분석이었다. 정답은 럭키 세븐. 그런데 6인용 좌석이 서울에 등장했다. 사회변화의 증거다. 그 전동차의 비상전화 높이가 낮아졌다. 어린이나 휠체어 사용자의 손이 닿는 높이다. 이게 배려다. 누구나 결국 사회적 약자가 된다. 외국인도 약자다. 선진국은 소득수준이 아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로 계측된다. 그 측정공간이 지하철이다. 뉴욕 지하철은 당신을 목적지까지 태워준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시라. 어수룩한 유학생으로 당도했던 뉴욕에서 목도한 이 문장이 안내인지 경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진실이었으니까. 여전히 낮에 냄새 진동하고 밤에 공포 엄습하는 곳이 뉴욕 지하철이다. 그러나 아무리 덜컥거리고 조명 껌뻑거리고 치안문제 생겨도 지하철 이용은 뉴요커의 자존심이다. 지하철이 도시고 도시는 뉴욕이라는. 이에 비해 한국 지하철은 안전도에서도 세계 최고다. 막차 탄 아가씨들이 두려워하는 건 폭력사태가 아니고 몰카촬영이다. 뉴요커들은 이해할 수 없으리. 아참, 혹시 우리 지하철에서 냄새 난다고 했던가? 그건 당신 발냄새지. https://news.joins.com/article/23490376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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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19. 05. 03언어는 오래된 도시와 같다. 좁은 길과 마당이 미로로 얽히고 새집과 헌집이 뒤섞인 도시. 이렇게 중후한 비유를 남긴 이는 건축가가 아니고 철학자였다. 성찰의 퇴적이 두터운 문장이다. 그는 한 줄 덧붙였다. 그 도시 주변을 직선도로와, 똑같은 집들이 둘러싼다. 20세기 초반 그는 유럽의 어떤 도시를 목격했을까. 새로운 도시를 상상한 것은 동시대 건축가들이었다. 당나귀가 비척거리던 길을 걷어내 죽죽 뻗은 길을 내자. 그 위를 새로운 교통기계가 질주하는 빛나는 도시를 만들자. 야심인지 오만인지 알 수 없되 건축가들은 품사별로 나뉘어 정리된 새 언어를 창조하고자 했다. 원칙은 주거와 생산공간의 기능적 분리였다. 그들은 기능도시라고 호칭했다. 분리된 품사의 도시는 신대륙의 꿈이었다. 상업과 주거용지가 구분된 쾌적한 전원도시의 외침이 만든 결과는 처참했다. 가장 많은 교통기계로 간신히 유지되는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선거권에 앞서 운전면허증이 필요한 도시. 증언하거니와 문장은 품사가 섞여야 조립이 되고 언어를 이룬다. 명사, 동사 따로 구획된 그들의 문장은 다만 구호거나 외마디 외침이었다. 불행한 것은 이 국가의 영향력이 세계에 미쳤다는 것이다. 미제 원조 밀가루로 생존하던 한국이 미제 도시계획도 수입했다. 도심을 버리고 신도시를 만들었다. 상업과 주거용지가 분리된 토지이용 계획이 원칙이었다. 교통기계를 전제로 한 신도시가 이 작은 국토를 잠식했다. 더 많은 길이 필요해졌고 길은 승용차로 덮였고 길을 넓히면 더 많은 승용차가 덮었다. 한국의 1인당 에너지소비량은 유럽·일본이 아니라 미국·호주·캐나다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인구밀도로 미국은 한국의 1/16, 호주·캐나다는 1/170이다. 게다가 사회의 정체성을 증언하던 도심은 곧 유령이 배회할 폐허로 쇠락했다. 이제 도시재생이 화두다. 외곽 논밭에 아파트 세워 자동차 타고 다니지 말고 기존의 도심 공간을 손 봐서 고쳐나가자는 것이다. 당연하고 옳은 길이다. 도시는 과연 언어와 같으니 창조의 대상이 아니고 진화의 결과여야 한다. 도시의 핵심은 시장이다. 이제 원도심의 전통시장·구멍가게는 대형마트·편의점과 경쟁해야 한다. 전통시장 살리자고 대형마트 격주 휴무제도 강제했다.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인지 의심스러워지는 정책이기는 하다. 전통시장에 지붕 씌우고 노상 주차도 허용했다. 그런데 전통시장과 원도심이 부활 영생의 길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도대체 왜. 흥미로운 시장이 서울에 새로 등장했다. ‘서울책보고(사진)’는 쓰다 버린 창고 뼈대에 껍질 새로 씌우고 책꽂이를 넣은 공간이다. 용도로는 헌책방들의 창고고 판매대행점이다. 헌책방은 도서관·서점과 다른 지식의 유통매체고 지식산업 생태계의 축이다. 그러나 청계천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그 업종은 영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헌책방의 이미지는 책이 빼곡하게 쟁여져 발 디딜 틈 없는 미로다. 빈사 상태인 헌책방의 공간부족 문제부터 공공영역에서 해결해주자는 것이 사업의 발단이었다. 이 정체성 모호한 공간이 인스타그램 성지에 등극했다. 위탁 의뢰 헌책방 주인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중이다. 불쏘시개로 전락할 헌책들이 어떻게 여기서 지식 담은 매체로 회생하고 있을까. 사실 책벌레 자처 시장(市長)이 아니면 불가능한 시장(市場)기획이었다. 수탁운영자의 새로운 세대다운 발랄한 운영도 눈에 띈다. 사진 찍기 좋은 배경공간도 한몫 했을 수 있다. 그 공간을 설계한 자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요소다. 판매자가 구매자 얼굴을 힐끗 보고 값을 부른다면 그건 시장이 아니다. 기존의 헌책방이 그런 곳이었다. 시장이 시장인 것은 가격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시장이 아닌데 시장으로 작동할 수 없다. 헌책방 ‘서울책보고’ 성공의 핵심은 정찰제다. 조선 후기 육의전 상인들의 진정서와 비변사의 답신을 모아놓은 책이 『시폐(市弊)』다. 불만의 대상은 탐관오리지만 문제는 정해지지 않은 가격이었다. 시장에 가격표가 없었다. 지금 한국의 전통시장은 작동방식으로 보면 육의전에서 크게 진화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격표가 없다. 가격을 숨긴 상인의 생존도구는 호객이다. 뱃심으로 방어하고 의심으로 공격하는 것은 복마전 전법이다. 그래서 육의전 거리의 복마상(卜馬床)이 수상하고 궁금하다. 전통시장을 치장하는 상투적 문장이 ‘에누리의 실랑이와 넉넉한 덤의 정겨운 공간’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거래방식을 미화한 공허한 수사일 것이다. 시장이 자비심 아닌 이기심으로 유지된다는 건 애덤 스미스 이래 경제학 교과서 첫 문장이다. 시장 입구 치장하고 덮개 공사하기 전에 상인들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가격표시다. 전통시장이 스스로 먼저 변해야 한다. 진화 의지가 없는 상점은 도태가 당연하고 시장은 환경공사를 해도 재생되지 않는다. 오래된 도시에 살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방문하던 시장은 그 시대에도 상품에 가격표가 붙어있었을 것이다. 그 도시는 지금 도시재생이라는 처방이 필요 없는 곳이고. https://news.joins.com/article/23457767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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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커상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19. 04. 05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 일본인 건축가다. 2019년 프리츠커상 수상자. 상투적 표현으로 건축의 노벨상이다. 지명도로 보아 그가 41회 수상자가 되는데 이견을 달기 어렵다. 그래서 올해는 화제였다. 일본 수상자가 모두 8명이 되었다. 가장 객관적 잣대로 일본은 세계 최고의 건축강국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여기 항상 묻어오는 불편한 문장이 하나 있다. 한국 건축가는 없다더라. 이것은 서술이 아니고 힐난이다. 도대체 너희는 뭐가 잘못된 거니. 옆집 애들은 우등상도 척척 타온다는데. 좀더 비교해보자. 건축의 0:8은 오히려 덜 부끄럽다. 노벨상은 1:24다. 그런데 평창올림픽 금메달 수는 5:4였다. 과연 뭐가 잘못된 걸까. 프리츠커상은 건축가의 계획안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뤄진 건물을 보고 판단한다. 도면이 아니고 성취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가 대표로 수상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 관여한 사회의 가치를 칭찬하는 것이다. 노벨상도 배경에 사회가 있다. 잘못을 찾으려면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을 좀 들여다 봐야한다. 건물은 건축주가 제시하는 일정·예산·용도·대지의 조건 안에서 시작한다. 건축가는 이를 만족시키는 창조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 계획이 건물로 도시에 구현되는 것은 사회적 과정이다. 인허가를 포함하고 설계단계보다 훨씬 많은 인원의 시공자가 개입한다. 모두 집합적으로 역할을 다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건물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목숨 걸린 사안이었던 듯 삼수해서 유치하여 5:4의 쾌거를 이룬 평창올림픽 현장으로 가보자. 개막식장, 각종 경기장 그리고 한국 홍보공간인 코리아하우스도 지었다. 코리아하우스 짓는데 발주처가 내건 문장은 “전 세계인들이 모이는 축제의 장인 올림픽에서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디자인을 개발하여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기간 동안 코리아하우스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함”이었다. 철학·역사의식·세계관은 없고 피해의식·과시욕·승부욕만 담긴 문장이라고 아쉬워할 일이 아니다. 다중이용 건물이면 설계·시공·운영점검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랜드마크 설계할 건축가가 결정된 것은 개막 4개월이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내 경험으로 주택 설계만 해도 6개월이면 일정이 빠듯하다. 그런데 설계 착수 후 15일 안에 3개의 계획안을 제출해 승인받고 45일 안에 설계 마무리해 세계인에게 ‘어필’하고 대한민국 대표 ‘랜드마크’를 만들어야 하는 과업조건이었다. 게다가 랜드마크 설계할 건축가 선정방식은 설계비 입찰이었다. 올림픽 대표선수를 추첨으로 뽑는 나라도 있더라. 낙찰 받은 인근 지역의 건축가가 어떤 초인적 능력으로 과업조건이었던 심의·지질조사·모형제작까지 다 거치고 만들어 작업을 완수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랜드마크 주문하는 공공기관은 많다. 그러나 그들의 공사예산은 프리츠커상 받는 국가의 절반을 넘지 않고 책정하는 건축설계비는 그 공사비 대비 다시 절반이다. 창의력에 투자하는 금액이 1/4 이하다. 서울과 토쿄의 물가 수준은 거의 1:1이므로 건축가의 생존대안은 설계기간을 1/4이하로 줄이는 것이다. 훈련기간은 1/4이 안되지만 금메달은 따와라. 오가와 게이기치(小川敬吉). 조선총독부 하급공무원이었다.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에 있었던 공사 감독자로는 처음으로 남겨진 이름이다. 그는 평창올림픽 개최 칠백 년 전 고려말에 지어진 어떤 건물 수리보수 작업의 책임자였다. 이 건물은 조선 시대 다섯 번의 수리와 단청작업을 거쳤다. 그러나 조선은 그 장인 중 단 한 명도 호명·기록하지 않은 사회였다. 이에 비해 식민지의 시골 사찰 보수공사 책임자의 이름도 기억하는 사회가 프리츠커상, 노벨상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그가 수리책임자로서 4개월 아니라 4년 걸려 최대한 창건 상태에 가깝게 되돌려놓은 건물이 대한민국 국보 49호다. 수덕사 대웅전. 일본 에도시대 장인들은 수준이 인정되면 무사들처럼 칼을 찰 수 있었다. 섬뜩하다. 제대로 일을 마치지 못하면 칼 앞에 목숨을 내놓으라는 이야기다. 요구는 간단하다. 목숨을 걸어라. 그런 장인들이 지금도 건물 시공하고 연구실에서 실험한다. 우리의 랜드마크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냐는 인부들이 짓는다. 공사예산 부족하니 숙련도 믿을 수 없는 이국 근로자들이 더 많아진다. 수많은 공공건물이 세계 건축계가 어이없어 할 디자인에 근거해서 태평한 손길로 지어지고 누구도 기억할 필요없는 공허한 사업이 되어 도시에 던져진다. 건축은 어렵다. 이해주체가 많은데 이해관계는 공유되기 어려우므로 먼저 신뢰구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일본과 미국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 건축하는 것은 유독 훨씬 더 어렵다. 갈등사회기 때문이다. 말도 손도 거칠다. 노벨상, 프리츠커상 이전에 사회를 반성해야 한다. 그러기에, 프리츠커상 하나 못 받아오느냐는 질타 속에서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역사와 도시의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발주처·심의위원·행정공무원·민원인·공사장 인부들 사이에서 분투하는 대한민국 건축가들 만세. https://news.joins.com/article/23432366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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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19. 03. 08헤일 수 없이 수 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던 노래, 동백아가씨. 왜색논쟁으로 한 시절 금지곡이었던 노래. 그러나 정작 시비의 대상이 될 것은 노래가 아니고 가수의 이름이었다. 저건 일본식 이름이 아니더냐. 미자, 요시코라니. 창씨개명. 일제만행으로 빠지지 않는 단어다. 그리고 성을 바꾸고 이름을 고쳐 친일파로 단죄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저런 이름을 딸에게 건넨 그들은 누구였을까. 어차피 사라진 나라인데 맞춰 살자고 했을 수도 있다. 새 유행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바람 따라 무심히 흔들리는 민초들은 아니었을까.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계획이 발표되었다. 세종로라면 등장하는 문장이 있다. 일제가 경복궁 앞길의 축을 조선신궁 방향으로 틀었다. 왕조 능욕과 민족정기 말살의 잔학한 조치였다. 침탈· 억압·학대·수난의 비대칭 단어에서 우리는 약자고 피해자다. 만행을 드러내고 억울함을 파헤쳐서 고발과 증언으로 해원의 살풀이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실 파악이다. 혹시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과녁을 만들고 거기 흥분과 분노의 화살을 쏟아붓는 것은 아닌지. 이 땅의 생김새가 측량된 도면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가 다 저문 시점이었다. 우리에게 경복궁 앞 육조거리 도면이 남아있다. 그런데 당혹스럽게 그 앞길의 방향이 이미 경복궁 축과 전혀 맞지 않는다. 심지어 길은 중간에 애매하게 꺾여 있었다. 당시 지적도에 근거한 모형은 박물관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맞지 않는 축의 각도에 총독부 건축공무원들도 당황스러워했다. 이걸 맞춰 놓을 정도로 총독부가 조선을 장악하지 못한 때였다. 그 길은 있던 방향 그대로 확장계획이 잡혔다. 지금까지의 자료로는 육조거리 확장계획 조감도를 처음 그린 이는 독일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다. 무심한 외국인은 조선총독부청사의 고문건축가로 지목되었고 뒤의 전각이 아니라 앞의 길에 맞춰 건물을 앉혔다. 일본인 중에도 총독부청사 위치를 반대한 이들이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철거예정의 광화문을 안타까워 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다. 그러나 와세다대학 교수 콘 와지로(今和次郞)의 비판은 그런 수준을 훨씬 넘는다. 그는 도대체 어찌 이렇게 피정복자를 유린하는 비참한 일을 행하느냐며 총독부 건축관계자들을 면전에서 공박한다. 그리고 철거가 제일 좋겠지만 거의 다 지어 되돌릴 수 없다면 차라리 이를 사회사업시설로 전용하라고 주장한다. 조선신궁의 위치를 남산으로 결정한 것은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이토 추타(伊東忠太)다. 총독부청사 착공 후다. 영어 단어 ‘아키텍춰’를 ‘건축’으로 번역한 인물이다. 민족정기 말살하는데 앞장 선 이의 자취라고 부인하려면 우리는 ‘건축’이라는 단어를 바꿔야 한다. 결국 순자, 미자, 영자도 개명해야 할 것이고. 민족정기 말살 목적으로 일제가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분노의 증언도 있다. 그러나 주요지점에 물리적 기준점 설정하는 것은 측량의 기본사안이다. 측량을 모르던 백성들에게 그것이 주술적 만행으로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병들면 무당 부르지 않고 병원 찾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흥분하지 않는 것이다. 평상심으로 봐야 한다. 총독부인들 조선통치의 거대계획 수립실행에 일사불란하지 않았다. 그럴 능력도 없었다. 일제하 조선백성들이 눈만 껌뻑거리는 존재들도 아니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민국은 반민족행위자, 부역자 처벌에 실패했다. 그 피해의식은 왜색, 친일이라는 단어를 남용하고 확대적용하게 만들었다. 역사를 지우지 못한다. 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과거가 현실을 포박하고 있으면 곤란하다. 역사책을 읽는 이유는 미래의 조감도를 그리기 위해서다. 지금 분명 일본은 평화헌법으로 유지되는 국가고 천황도 다만 인간임을 스스로 밝혔다. 후손이라는 이유로 전쟁의 책임과 사과를 여전히 요구한다면 먼저 사과해야 할 주체는 한국전쟁 침략자의 손자다. 대한민국정부가 광복 전에 수립되었다면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대한민국정부도 사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난 정부의 정책을 부정하면서 몇 세대 전 그들의 행위를 추궁하는 건 논리모순이다. 역사 서술의 주어는 1인칭, 우리여야 한다. 한반도 주변은 야수 우리라고 지도가 알려주고 역사가 증명한다. 그 역사가 반복재현된 것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의 교훈이다. 할퀴고 물어뜯은 그들이 사과 않는 야수라고 비난하고 있으면 역사는 여전히 그들의 것이다. 사과가 그들의 짐이라면 반성이 우리의 힘이다, 힘. https://news.joins.com/article/23404875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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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식민지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19. 02. 08 (1)부란자. 다섯 수레 책의 독서로는 뜻을 알 길이 없다. 사전편찬에 인생을 바쳤어도 알기 어렵다. 기름때 범벅의 현장용어기 때문이다. 마후라·쇼바·세루모다 등이 가족일원이다. 고향에서 각기 플런저펌프·머플러·쇽압소버·셀프스타트모터였던 단어들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몰골로 이역의 삼십 촉 다마, 아니 전구 밑을 배회하게 되었을까. 일본 메이지시대 철학자들은 낯선 서양 추상개념들을 치열하게 번역해나갔다. 정의·민주·사회 등. 그러나 나중에 자동차에 묻어 들어온 기계부품 용어들은 수입 후 방치되었고 일본 정비공들 입에 맞게 변태했다. 그 단어들이 자동차와 함께 식민지에 이식되었다. 그 끝에 단어인지 문장인지 야릇한 것이 하나 붙어 있다. 오라이. 일제시대 도시 사진에는 신작로를 질주하는 검은 승용차가 등장한다. 승용차 뒷자리에 총독부 관리가 탔을 것이다. 나중에 친일파로 단죄될 예정의 조선인이었을 수도 있다. 한 마디로 묶으면 권력자들이다. 차창밖 먼지를 뒤집어쓰고 걷는 것은 지저분하고 한심한 조선인 민초들이었다. 신작로는 권력비대칭 공간이었다. 광복 후에도 승용차는 권력 표현과 신분 상징으로 남았다. 도로는 여전히 높으신 분들의 질주공간이었다. 한국 도로에 담긴 불평등한 출생의 비밀이 연속극 마지막 회가 아닌 일상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동차가 나서니 자전거까지 거만해졌다. 저기 가는 저 사람 꼬부랑노인,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노약자건 뭐건 보행자는 바퀴 앞에서 비켜서라. 물렀거라. 한국 도시의 차도 유지상태는 선진국 최상위급이다. 서울의 간선차도는 전체가 주작대로다. 그러나 인도 풍경은 근본미상 국가들의 도시와 별로 다르지 않다. 번잡한 구조물 널린 지뢰밭이고 바닥포장 상태는 백두대간이다. 오토바이 질주하고 자동차가 슬금거린다. 자전거는 차로 분류한다면서 자전거도로는 인도에 그려놓는다. 겨울철 눈이 오면 밤새 차도에 염화칼슘 뿌려준다. 모두 세금이다. 그러나 너희 집 앞 인도의 눈은 너희가 치우라고 계도문구만 무성할 따름이다. 치울 너희가 없는 눈 덮인 인도에서 넘어진 할머니의 치료비를 지자체가 책임을 느껴 대납해줬다는 미담은 들리지 않는다. 인도는 완전개방 공공공간이지만 차도는 자동차에게만 개방된 제한적 공공공간이다. 사람이 인도 위에 누우면 구급차가 오지만 차도 위에 누우면 경찰차가 온다. 차도를 보행자가 어슬렁거리면 차량통행 방해하는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범법자가 되지 않고 차도를 이용하려면 자동차를 사야 한다. 기름도 사 넣어야 한다. 그런데 차도는 공공공간이므로 유지관리에 세금을 쓴다. 이 경우 세금 징수·집행의 이상적 방법은 집합적 이용자가 내고 쓰는 것이다. 여기 유류세가 등장한다. 원유가는 내렸는데 왜 휘발유 값은 요지부동이냐며 주유소에서 납부하는 세금. 유류세가 공정한 것은 차도를 많이 이용하면 더 내는 절묘한 장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화석연료 고갈과 대기오염의 우려가 높아지면서 전기차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수소차도 어차피 수소발생에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것이니 기본 연료로 보면 전기차와 별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석유 대신 전기가 연료로 사용되면서 유류세를 통한 도로이용 공정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차도는 자동차 가진 자들만 배타적이되 무료로 사용하는 공간이 된다. 세금으로 유지관리하면서.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보조금까지 지급하고 주차비까지 감면한다. 승용차 구매를 권장하는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아니 승용차 하나 장만해라. 보행자의 세금이 강자의 편의를 위해 전용되는 정책 아닌지 물을 일이다. 미래 기간산업 육성이라는 건 알아듣겠는데 육성되는 것이 황제연봉, 세습고용으로 지탄받는 미래는 아닌지 궁금하다. 전기건 수소건 달리는 건 자동차일 따름이다. 보행환경 팽개치고 승용차 사라고 세금 쓰며 부추기는 건 정의·민주·사회 아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가득 질주하는 도시와 유모차 미는 보행자가 산책하는 도시. 어느 풍경에 우리 사회, 도시의 미래가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싸고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전기생산 방식을 놓고 사회 갈등이 극심하다. 답은 없으니 억압이나 타협만 남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석유사용 제한의 대안은 전기사용 권장이 아니고 에너지소비 억제다. 석유차 억제의 대안은 전기차 장려가 아니고 대중교통 확충이다. 그게 싸고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도시로 가는 길이다. 정책결정권자들이 승용차 뒷자리에서 창밖으로 보는 한 이 도시는 여전히 식민지다. 대한민국은 이대로 직진해도 좋을까. 오라이? https://news.joins.com/article/23353064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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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 / 중앙일보 / 문화탐색 / 2019. 01. 24옥류관 냉면에서 배우는 용산공원 조성법 냉면이 뜨거웠다. 멀다고 하면 안 될 곳에서 가져온 냉면이 불을 지폈다. 은거암약하던 냉면교도들이 열혈궐기하였고 경향강토에 냉면열국지가 일익전파되었다. 강호협객의 냉면명가 주유방담이 인터넷을 덮었고 냉면취식 순서방법으로 백가가 쟁명하였다. 하여 냉면의 백면서생들이 신조어로 비방조롱하였으니 ‘면스플레인’이다. 그런데 정통원조 옥류관 봉사원들의 입장은 단호했다. 면을 육수 위에 살짝 들고 그 위에 식초를 쳐서 먹어야 합니다. 이 평정된 옥류관 ‘면스플레인’의 근원을 찾아가면 엉뚱한 먹방에 이른다. 옥류관을 친히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냉면 먹는 법까지 하나하나 세심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최고존엄의 식사 이후 옥류관 냉면 취식법은 절대진리로 승천좌정하였다. 이번에는 북한의 공동살림집, 즉 아파트다. 북한 아파트는 평면작성·시공방법이 일괄 수입된 동유럽 제품이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작은 전실로 모든 방이 연결되는 모습이었다. 공동살림방, 즉 거실도 공간위계 상 그냥 방의 하나였다. 들어서면 전면에 거실풍경이 펼쳐지는 남쪽과 전혀 다른 평면이다. 그런데 여기 신기한 변화가 생겼으니 때는 2004년이다. 신축 아파트의 공동살림방이 평면의 중심으로 싹 돌연변모한 것이다. 이 변화 근원에 역시 최고존엄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아들이다. 세계수준에 맞는 살림집을 만들기 위해 공동살림방을 중심에 놓으라고 장군님께서 교시하셨습니다. 최고존엄은 손자에 이르렀다. 평양의 산천풍경은 바뀌었는데 인걸풍습은 의구하다. 최고존엄 앞 고위급 당일꾼들 모두 손바닥만한 수첩을 지참하고 받아적기 바쁘다. 최고존엄 일체 무오류니 질문확인 불요부재. 당이 원하면 우리는 한다. 한편 이웃한 남쪽 어떤 나라 대통령은 최고존엄의 딸이었는데 우주의 기운을 모은 말투가 과연 존엄모호하였다. 그래서 이르고자 할 바 다 이르지 못하는 대통령을 어린 백성들이 조롱비방하였다. 할 수 없이 연설문 눈높이 첨삭지도를 논술강사 아닌 동네 아줌마에게서 몰래 받았는데 하필이면 그게 들통 나 결국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신기하게 당시 뉴스 풍경은 양쪽이 비슷했다. 각료비서들이 모두 머리를 수첩에 넣고 그 대통령의 발언을 열심히 적었다. 창조경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민주주의의 힘은 토론·대꾸·반박·설득에서 나오고 개성만발·취향다양·주관존중으로 표현된다. 대한민국은 최고존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냉면에 식초 치지 않는다. 메밀향 버린다. 주체냉면만세. 냉면이 뜨겁던 광복절 아침에 새 대통령이 선언했다. 용산공원을 뉴욕 센트럴파크 같은 생태자연공원으로 조성하겠습니다. 멋지다. 그런데 의아하다. 왜 용산공원은 세트럴파크 같아야 하는 거지. 센트럴파크는 생태자연공원인가. 용산공원이 생태자연공원이어야 하는 이유는 뭐지. 냉면에는 식초를 쳐야 하나. 용산공원은 거대도시 복판에 있다는 점에서 센트럴파크와 같다. 딱 거기까지다. 출생부터 성장까지 다 다르고 미래에도 달라야 한다. 센트럴파크는 있던 자연을 재가공해서 만든 공원이다. 인공호수·잔디밭·동물원·미술관이 버무려져 있는 도시공원이다. 용산은 청국군·대일본제국육군·유에스아미가 차례로 점령주둔한 도시공간이다. <한일의정서>·<한미상호방위조약>·<한미행정협정>이 만들었다. 자연·생태·환경·순환이 아니고 위험·영토·전략·배치라는 단어들이 들어있는 문서다. 다 털고 나면 불평등이라는 단어만 남는다. 용산미군기지는 전투부대 주둔지가 아니었다. 담장 밖 퍽퍽한 서울환경과 비교하면 이미 공원이다. 한가하고 나른한 미국 전원도시의 변형복사본이다. 당황스런 초현실이다. 지하철 4호선과 동작대교를 기형적으로 비튼 대한민국 내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공중도 지하도 한국이 아니었고 우편번호도 미제를 쓰던 곳이다. APO AP 96205. 수도 한복판이 외국군 주둔지였던 나라가 있었다더라. 이렇게 전하면 후대는 엽기적 농담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에 생태공원은 많으나 이런 초현실의 공간은 서울이 유일하다. 센트럴파크가 대한민국 국군 주둔지라고 생각해보면 된다. 생태공원이 없다고 서울에 산소가 부족하지 않다. 생태공원 만든다고 미세먼지가 사라지지 않는다. 서울에서 부족한 것은 역사를 증언하는 공간이다. 도시를 생태자연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첫 작업은 철거다. 꼭 필요한 것 아니면 기존 구조물들을 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용산은 최소보존이 아니고 최대보존이 원칙이어야 한다. 잔재인지 유산인지 아직 모른다. 역사의 판단이 개입해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역사흔적 다 뭉개고 역사도시 간판만 걸어놓은 테마파크가 청계천 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이 남긴 결과물이다.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대통령은 발언을 추스를 수 있다. 철거하고 나무 심으라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센트럴파크처럼 사랑받는 공간을 만들자는 의미였다고. 그런데 공무원들은 입장이 다르다. 그들에게는 대통령 발언이 절대존엄이다. 달을 보든 손가락을 보든 따르는 척이라도 한다. 수첩에 받아 적은 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설계자들을 다그칠 것이다. 대통령 방침이다. 생태자연공원이 되어야 한다. 철거하고 연못 파고 나무 심어라. 냉면에 식초 치기 전에 메밀함량을 알아야 한다. 한국 검색엔진의 위성사진으로 보면 용산미군기지는 단호하다. 너희가 이곳을 알 필요 없다. 결론을 내릴 만큼 이곳을 알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아무도 없다. 정보가 없으니 작전이 무의미하다. 지금 할 일은 관리·관찰·조사·기록이다. 그런 역사가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누워서 쓸개를 빨며 불편해 하더라도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 대한독립만세. 이것이 염원 아닌 성취의 함성이 되었을 때 공원도 완성될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공간이지 개발할 의무가 아니다. 권리도 아니다. 현재를 꼼꼼하게 정리해서 넘겨준다면 미래는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다. 대신 녹음방초 우거져 멋진 생태자연공원을 넘겨준다면 오히려 물을 것이다. 역사에서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https://news.joins.com/article/23317326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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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택지 부족 / 중앙일보 / 문화탐색 / 2018. 12. 27달을 분양합니다. 헛웃음이 나올 것이다. 어수룩한 백성들 대상의 사기행각인 거지. 광고자를 바꾸자. 개발업자 출신의 미국대통령은 세상 중심에 돈을 놓고 있는 사람이다. 백주에 언론인을 죽인 아라비아왕자라도 무기만 사준다면 거래를 할 셈이다. 그가 연방재정 적자 해소를 위해 달인들 못 팔겠는가. 논리는 간단하겠다. 달은 우리가 접수한 땅이다. 당연히 국제사회가 반발할 것이다. 깃발 먼저 꽂았다고 달이 너희 거냐. 달을 너희가 만들었느냐. 무단점거 획책마라. 대상을 지구로 바꿔 한반도를 들여다보자. 대한민국의 모든 땅은 나뉘어 각각 법적 소유자가 있다. 그들은 이전 소유자에게서 땅을 샀을 것이다. 이전 소유자는 또 전 소유자에게서 샀을 것이고.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예외 없이 달 분양 행각에서 만났던 불편한 진실 하나와 마주치게 된다. 무단점거. 이것이 땅이 갖고 있는 문제다. 자본, 노동과 함께 경제의 기본요소인 토지가 갖고 있는 특이점이다. 그 땅은 만들어지지도 소비되지도 않는다. 처음에 다만 점거되었을 따름이다. 바로 여기가 토지의 공공성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가 시행하는 첫 번째 사업이 토지 몰수다. 점거와 사유화는 인간 본성의 일부다. 그 본성발현을 방치하면 도시는 무법정글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토지 사유와 매매를 허용한다. 점거에서 시작한 토지니 내놓으라고 했을 때 벌어질 혼란을 사회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상태는 다시 무법에 가까워진다. 무단점거의 사적소유 인정 배경에 깔린 것이 법적 안정성이다. 악법보다 큰 사회위협이 무법이다. 그걸 방지하라고 우리는 정부에 권력을 위임한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민주공화국이다. 토지는 이용과 개발 목적으로 매매한다. 세금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면 사유재산이다. 문제는 그 건물이 토지 위에 서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무단점거에서 시작한 그것. 정부가 건축행위에 개입하는 근거다.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행정절차는 신고가 아닌 허가다. 해서 안 되는 일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그 허가권자가 정부다. 서울의 아파트 값이 문제다. 수요와 공급의 가격 결정은 경제학교과서 맨 앞에 나오는 서술이다. 자금이 충분한데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은 당연히 오른다. 그래서 가격이 오르겠다고 짐작되면 더 오른다. 여기부터는 투기라고 부른다. 거듭, 누구도 땅을 마음대로 만들지 못한다. 택지가 부족하니 주택공급이 어렵다. 빈 땅을 찾든지 있는 땅을 재활용해야 한다. 빈 땅을 찾아 지도를 보면 서울에서 가장 큰 것이 그린벨트다. 산업유산, 기피시설 이전적지도 보인다. 이걸 헐어 택지로 개발하면 간단하겠다. 손쉬운 대안이다. 그러나 보이는 빈 땅을 다 채워 넣는다면 다음 세대가 받을 것은 택지로 가득한 도시다. 그것이 공공택지여도 사적으로 점유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남은 방법은 기존 노후 택지 밀도를 높여 재개발, 재건축하는 것이다. 역시 쉽지 않은 길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쟁점으로서 난이도 최고는 입시문제고 그 다음이 주택문제다. 전 국민의 이권이 빼곡하게 얽혀서 어디를 흔들어도 회심의 미소와 절규의 아우성이 부딪힌다. 해결의 원칙은 두 가지다. 작은 단위의 개발과 고밀도 개발. 사업의 최소규모가 10,000m2이던 뉴타운 시대가 있었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소수를 존중하는 다수의 지배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 지배되는 소수의 규모도 커진다. 의견수렴 어렵고 갈등 커지고 사업이 오래 걸린다. 다수의 재산권 행사가 소수의 생존권을 억압한다. 사업 기간 중 고발, 분쟁 없는 사업도, 준공 후 갈등, 소송 없는 사업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역사가 담겼던 도시조직들이 사라진다. 도시는 작은 단위로 유연하게 변화해야 한다. 소규모 도시정비는 예외가 아니고 원칙이 되어야 한다. 서울시가 주거용적률을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방향이 옳다. 서울은 건물들이 빼곡하기는 하나 여전히 용적률이 낮은 도시다. 문제는 여전히 토지다. 높은 건물을 허용하는 대신 건물이 딛고 선 토지 면적을 줄이고 그 부분의 개방을 요구해야 한다. 1층은 주거로 어차피 기피하는 곳이다. 땅은 변수가 많다. 경관이 중요한 곳에 삐죽한 건물을 세울 수는 없다. 단 하나의 숫자로 용적률을 일괄 적용할 수도 없다. 환수와 기부채납의 비율도 위치에 따라 달라야 한다. 그중 말 많은 서울 강남과 한강변은 지금보다 개발밀도를 훨씬 높여야 한다. 주민, 개발업자의 환호성이 나올 일이다. 그러나 끼어있는 중요한 조건은 개발수익에 맞는 기부채납과 공공임대주택 조성이다. 대한민국이 정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증거는 복지다. 최소한의 주거보장은 복지고 사회의 책임이다. 공공임대주택이야말로 논밭 주변 아니고 대중교통수단 가까운 곳에 세워야 한다. 개발수익 생길 테니 본인들의 아들딸 아닌 흙수저 세대를 위해 양보도 하라는 요구다. 양보할 생각 없으면 아침마다 주차장에서 앞차 뒤차 미는 생활 계속해야 한다. 돈만 되면 악당과도 거래를 하겠다는 대통령의 나라로 돌아가자. 뉴욕시 맨해튼은 자본주의로 똘똘 뭉친 공간이다. 거기서 면적별 지주의 순위에 뉴욕시정부, 카톨릭교회, 컬럼비아대학이 줄을 서 있다. 이들의 외부공간은 모두 시민들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끔찍하게 높은 건물들 사이로 공원, 광장이 빼곡한 상황의 설명이 이렇다. 공적 개방과 사적 자유의 공존. 뉴욕이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이름을 올리는 동력이 바로 거기 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240479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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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도시라는 유령 / 중앙일보 / 문화탐색 / 2018. 11. 01도대체 대통령은 평양에 왜 간 거야. 한반도 평화정착을 떠올리기 전에 물은 자의 수준과 직업을 감안해야 한다.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는 게 적당한 대답이겠다. 조선노동당 위원장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세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다. 수준 낮은 질문자는 다시 물을 것이다. 그냥 전화로 하면 안 되나. 요즘 영상통화도 꽤 쓸 만한데. 정치인은 답할 것이다. 얼굴 맞대고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라고. 그즈음 북쪽 장마당이 관심사가 되었다. 전국 400여 개가 생겼다더라. 여전히 묻는다. 그 장마당은 왜 생겨났을까.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는 대답은 역시 수준이 높다.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서라는 게 적당한 답이겠다. 이 대답들이 도시의 시작을 설명한다. 도시는 교환을 위해 만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보와 물건의 교환을 위해 인간이 모여 사는 공간을 도시라 부른다. 교환할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속셈이거나 핵탄두 개발 정보일 수 있다. 팔 것이 칠보산 송이버섯이고 살 것이 원산구두공장 신발일 수도 있다. 다 얼굴과 물건을 맞대고 교환하고 거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 경쟁력은 교환 용이성에 달려있다. 상품이든 정보든. 교환 용이성은 이동 편의성으로 확보된다. 길을 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이동 거리를 줄이는 것이다. 좁은 데 모여 살면 된다. 거듭, 그래서 도시가 생겼다. 그 도시의 존재이유를 부인하는 정치인들이 종종 등장했다. 도시를 도구로 인식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화끈했다. 그는 권력과 수도를 거래하자는 공약을 걸었다. 당선되면 충청도에 행정수도를 만들겠다. 선물은 공평해야 하니 부산은 해양수도로, 광주는 문화수도로 만들겠다. 섣부른 공약이었으나 당선 후 요구는 당연했다. 공약을 이행하라. 수도 이전은 혁명의 정치변혁이나 사회의 집단야심이 배경에 깔려야 하고 절대 권력의 추동이 필요하다. 대통령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핵심공약이니 덮을 수도, 동력이 부족하니 멈출 수도 없었다. 강행과 반대의 아우성 속에서 행정수도는 행정중심복합도시라고 기이하게 타협되었다. 문화수도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바뀌었다. 나는 당선된 그가 이 땅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통령은 하늘이 책봉한 제왕이 아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라고 그는 앞서서 보여주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검사들이 결국 편의점 알바들과 뭐가 다르냐고 본인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실토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 그의 국토공약은 새만금, 한반도대운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저지르면 건축가들이 추슬러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고 집중해도 벅찼을 정부는 오히려 몇 발 더 나갔다. 공평한 선물이 구석구석 필요했으니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공공기관 지방 이전. 이른바 혁신도시였다. 당시 풍경은 가관이었다. 수십만 명의 인생이 매달리고 수천만 명의 생활이 영향 받는 공공기관이 정치인들 공기알로 거래되었다. 큰 것 하나 받으면 작은 것 두 개 양보하고, 맘에 드는 것 던져주면 묵었던 숙원사업 포기해주고. 던져진 공공기관은 지방도심을 살리지 않고 주변 논밭을 파헤쳤다. 국토의 균형발전이라지만 근교 농토의 신도시화였다. 전문용어로 하면 전 국토의 도시연담화다. 지방도시 세수가 늘었지만 자동차 통행도, 길에 쏟는 시간도 늘었다. 멀어진 도시 사이의 산과 계곡을 잘라 새 도로를 냈다. 가족은 갈라졌으며 업무능률은 떨어졌다. 교환 용이성이 부인되었으니 이름은 도시였으나 도시가 아니었다. 기술발달과 화상통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대통령이 왜 평양에 갔는지 지금 다시 묻기 바란다. 통일도 안 되었는데 대박이 난 것은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걱정하던 농부들이었다. 그 논밭이 혁신도시 사업부지에 들어 돈이 된 것이다. 강남 제비다리를 고쳐준 적이 없는데도 갑자기 떼부자가 된 농부들이 상경하여 강남을 기웃거렸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내내 정부의 압박과 협박을 비웃으며 서울 아파트값은 치솟았다. 그 돈은 갑자기 어디서 샘솟았을까.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고층아파트 풍경이 중계화면에 나왔다. 당연히 선택된 소수에게 허용된 공간이다. 중요한 것은 주거선택 자유의 배제다. 지상낙원 사회주의 조국 조선이 배급해 준 집이다. 북향집이어도, 통풍이 안 되어도, 엘리베이터가 안 닿아도 주는 대로 받아라. 경애하는 장군님 은혜에 눈물 흘리며 감격하고 살아라. 공공기관 지방이전이라는 유령이 여전히 국토에 떠돌고 있다. 도시는 개념의 다면체여서 정치로 볼 수도, 공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로만 보았을 때 그 도시는 허물어진다. 도시 정책이 조심스런 것은 실행의 뒷감당이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도시는 사회적 공간이다. 인간은 무, 감자가 아닌지라 논밭에 던져지면 사회적 관계망이 무너진다. 공공기관 직원이라는 이유로 아무데나 던져져야 한다면 남쪽은 북쪽과 무엇이 다르고 얼마나 나은가. 새만금 파묻고 사대강 파헤치겠다고 결정한 자들은 떠났다. 세종시는 사업 완성의 요구와 업무 비효율의 불평이 여전히 맞서 있고 대전, 오송, 조치원과 사안마다 날선 칼을 맞댄다. 갈등의 그 칼을 다음 세대가 맞는다. 혁신도시의 값도 다음 세대가 치러 내야 한다. 그들은 앞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포박된 현재와 낭비될 미래를 향해 내뱉을 것이다, 헬조선. https://news.joins.com/article/23084328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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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모와 질문 / 아시아도시문화포럼 / 기조강연 / 2018.09.06문화, 음모와 질문 동아시아에서 쓰는 단어, ‘문화(文化)’는 영어 ‘culture’의 번역어다. 이 단어는 일본 메이지시대가 남긴 ‘문화적’ 흔적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문화적’ 차이에 의한 혼란이다. 이 단어의 옆에 역시 ‘culture’로 번역되는, 혹은 이를 번역한 ‘교양(敎養)’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옆에는 ‘manners’에 해당하는 단어가 ‘예절(禮節)’로 번역되어 있다. 문화라는 단어를 잘 들여다보면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중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이고 폭 넓게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집단적 행동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동아시아권은 ‘젓가락문화’를 갖고 있다”는 문장이 이를 보여준다. 이것과 공존하는 의미는 음미해야 할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피카소의 회화를 지칭할 때 동원되는 단어다. 즉 “그는 대단히 높은 ‘문화’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문장이 바로 그 사례다. 이 단어, ‘문화’가 ‘향유할 대상의 차별적 가치’라는 의미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질문은 왜 이 단어는 이런 중첩된 의미를 갖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답을 알기 위해 먼저 들여다볼 단어는 ‘에티켓(etiquette)’이다. 이 단어를 공간으로 구획한다면 당연히 유럽의 궁정(court)이 등장한다. 즉 궁정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courtier)이 갖춰야 할 행동양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행동양식은 왜 필요했을까. 이유는 차별화다. 궁정에 출입할 자격을 갖지 못한 평민들과 차별화되는 자신들의 집단 확인 방법인 것이다. 궁정건물의 시각적 표현이 장식(ornament)이었다면 같은 가치를 갖는 규범적 행동양식이 바로 에티켓이었다. 18세기 유럽의 변화를 주도한 부르주아지에게 에티켓은 자신들을 규정할 수 있는 적절한 사회적 도구가 아니었다. 이들은 과시와 낭비로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결합된 금욕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포착한 단어는 ‘culture’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바, 집단적 생활양식이라는 의미를 자신들의 배타적 표현으로 접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에티켓처럼 차별화된 생활양식이었다. 배우고 음미해야 이를 수 있는 가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맞게 향유의 대상을 가장 금욕적인 감각인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음미할 대상의 구분으로 일곱 개를 규명한 것이 ‘예술(fine arts, beaux-arts)’이다. 부르주아지는 또한 에티켓이라는 단어로 지칭되던 행동거지를 ‘예절(manners)’로 치환하여 차별화를 시작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규정한 문화적 생활을 담아낼 공간도 개발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에 권력을 얻게 된 관료(bureau)들을 담는 공간인 기관(institution)의 모양을 담게 된 것이다. 미술관으로는 루브르궁, 음악당으로는 라이프치히게반트하우스가 부르주아지의 예술을 담는 첫 기관이 되었다. 거기 담긴 것들을 음미하는 것을 문화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아래로는 노동자, 농민들의 행동양식도 차별화했다. 차별화 대상이 농민들일 경우는 민속문화(folk culture), 노동자일 경우는 대중문화(mass culture)로 지칭했다. 문화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대중문화, 대중예술을 문화, 혹은 순수예술의 하부에 배치하면서 설치한 계층구분 도구는 교육이었다. 예술은 음미하는데 교육을 통해 넘어야 할 문턱이 존재했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그런 문턱이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도 음미가 가능한 저급한 것이었다. 향유의 대상으로서 지탱되던 문화는 가치차별적인 것이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미술관과 음악당에 앉아서 매너를 지키면서 생산자의 작업을 음미하는 향유자가 교육되었다. 이 문화가 민주주의의 전파, 제국주의의 정복과 뒤섞이면서 지구 곳곳에 퍼져나갔다. 심지어 동아시아 한국에도 전파되었다. 이제 질문은 스스로를 향한 것이다. 산업화를 추동하던 가치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산업화시대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는 규정하기 어려운 회색계층이 두텁게 존재한다. 고전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음악의 작곡은 20세기 초반 이후 무조음악의 등장과 함께 별 존재감이 없어졌다. 캔버스 앞에서 유화물감을 칠하던 미술은 더 이상 아트페어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예술로 규정되었던 일곱 개의 분야 외에 새로운 분야인 영화, 사진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사회에 행사하기 시작했다. 대학이라는 제도를 통해 생산되던 한국의 가곡은 아무 제도 없이 생산되던 가요에 밀려 존재감이 없는 것이 한국의 음악현실이다. 심지어 그 가요는 K-pop으로 진화하여 사회를 흔드는 산업이 되었다. 이제 질문은 기관화되었던 문화로 향한다. 20세기 이후 놀랍게도 전 세계가 이견 없이 공유하는 정치적 가치는 ‘민주(democracy)’다. 이것은 민주주의 개척지역이었던 미국과 유럽 외에도 지구상 거의 모든 국가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되었다. 이 가치는 구성원들간의 가치 차별을 배제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동등한 권리와 의미를 갖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가치는 당연히 새로운, 차별이 배제된, 제도적 교육의 전제가 불필요한 문화를 요구한다. 지금 이 ‘문화’라는 단어의 의미에 여전히 향유해야 할 가치가 정착되어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18세기에 유럽에서 덧붙인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떼 낸다면 남는 것은 그냥 생활의 방식을 지칭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그 생활의 방식은 무엇이고 거기 남는 가치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21세기, 이 시대의 문화는 기관의 담장을 넘어 거리로 나올 것을 요구한다. 거기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문화는 공공의 공간에서 모두에게 개방된 접속의 형식을 띄어야 한다. 그것은 테두리도 문턱도 없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교육된 특정 계층에게만 개방된 모습을 부인한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파악하고 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새로운 문화의 모습일 따름이다. 그 문화는 집합체로서 우리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일 따름이다. 그래서 이제 문화와 가장 가까운 단어는 교양이나 예절이 아니고 자각일 것이다. 거듭 우리가 과연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드러내는 자각. 문화는 우리의 정체성을 가장 뜨겁고 활기 넘치게 보여주는 사회적 도구일 것이다. The word “mun-hwa(文化)” used in East Asia is a translation of the English word, “culture.” This word is not free from the "cultural" remnants left by the Japanese Meiji era. It causes confusion through “cultural” differences. This is because the word “gyo-yang(敎養)” is also translated into “culture.” Also, next to it is also the word “ye-jeol(禮節)” that is translated into “manners.” When taking a closer look at the word culture, we can see that there’s an overlap of two different definitions. The most common and widely accepted definition is collective behavior. The phrase "East Asian countries have a ‘culture of using chopsticks’" illustrates this idea. The definition which coexists with this idea expresses the value of being appreciated. It is a word used when referring to such things like Beethoven’s symphony or Picasso’s painting. An example of this is how it is used in the phrase, "he is very cultured."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word “culture” started to take on the meaning of the “discriminative value of objects to enjoy.” The question which arises here is why this word has taken on this overlapping meaning. To find the answer to this question, the first word to look at is “etiquette.” If you ponder upon this word, the European courts emerge. In other words, it depicts the behavior that must be possessed by a courtier who can enter the courts. So why is this behavior necessary? It was because there was a need for differentiation. It was the method used to identify and differentiate the courtiers from the commoners who were not qualified to enter the courts. Just as the ornaments on the wall of court buildings were a visual representation of differentiation, etiquette was the normative behavioral form having the same purpose. For the bourgeoisie who led Europe’s transformation in the 18th century, etiquette was not an appropriate societal tool to define them. This is because they were an ascetic group combined with Protestant ethics, prohibiting themselves from the expression based on the ideas of flaunting and squandering. Therefore, the word they captured to use was “culture.” As they started to become generally accepted, they began to accept the significance of collective lifestyle as an expression exclusive to them. Thus, similar to etiquette, this was a differentiated lifestyle of the bourgeoisie. It was a value possible through learning and appreciation. They began to limit the objects of enjoyment to the most ascetic senses of sight and hearing to fit their value system. As a result, the seven objects to be appreciated are encompassed in the word “ye-sul (藝術, fine arts, beaux-arts)”. The bourgeoisie also began to differentiate by replacing all of their behavior previously defined as etiquette, with the word “ye-jeol (manners)”. The bourgeoisie also created a space for the cultural life that they defined. It was in the form of an “institution” which was a space for the various “bureaus” that gained power throughout the new era. The Louvre as an art museum and the Gewandhaus Leipzig as a music hall became the first institutions to represent the art of the bourgeoisie. It started to call the things appreciated there, culture. The bourgeoisie also differentiated the behavioral patterns of workers and peasants. In the case of differentiating farmers, they were referred to as folk culture, and for workers, they were referred to as mass culture. Education was a class-based tool installed by implementing popular culture, popular arts, culture, or fine arts under the vertical classification of culture. Art could only be appreciated through education. However, popular culture was easier to be enjoyed intuitively without requiring such a requirement. The culture sustained as an object to be appreciated was value-based. In the 19th century Europe, people were trained to sit down in an art museum and a music hall to enjoy the work of producers while keeping their manners intact. This cultur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mixed with the spread of democracy and the conquest of imperialism. It even spread to the East Asian countries including Korea. Now you can ask yourself a question. The value which propelled industrialization still exists, but it does not exist as it did in the era of post-industrialization. In this much-complicated society, there is a thick and ambiguous division line hard to cut clear between the capitalist and laborer. Since the early 20th century, classical music played by an orchestra has lost its presence with the emergence of atonal music. Painting on a canvas was no longer visible at art fairs. In addition to the seven fields defined as the conventional fine arts, new fields such as cinema and photography began to exert a much greater influence on society. In Korea, the reality is that the so-called Korean relic songs(歌曲) which were produced through a university system lost its presence to newer Korean pop which was produced through no institutional system at all. Those Korean songs evolved into K-pop which now has an unprecedented impact on society. Now the question goes for institutionalized culture. Surprisingly, since the 20th century, democracy has become a political value that the entire world shares. It has become a value for almost every country in the world on top of the U.S. and Europe, which were the democratic frontiers. This value excludes the discrimination of value among members. All members of society have equal rights and significance. This new value naturally requires a culture that is free of new, discriminatory, institutional and educational principles. Now, it is difficult to argue that the value of the word “culture” still has to be established. If you take away the value of an object to be appreciated from Europe in the 18th century, the only thing that remains is to refer to the way of life. So the question is what the way of life is and what its value is. The culture of the 21st century requires that the meaning of culture go beyond the walls of the institution. This is because that the true and unique meaning of culture is public daily life expressing their collective identity. Culture must be shaped in the public space and be open to everyone. It requires space without edges or limits. It must also not be prevented from being open only to a certain class of educated people. If we understand and express that we coexist in such as this, a new culture will be created. Culture is an answer to the question of who we are as a collective group. So the most similar word to culture is now awareness, not etiquette or manners. We realize over and over again who we are and how we live. Culture will become a societal tool that portrays our identity in the most passionate and active manner.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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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도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 중앙일보/ 사설칼럼 / 2018. 09. 20관광객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관광도시를 만들어 주시오. 이렇게 주문한 사람은 어느 도시 시장이었다. 표현이 달라도 비슷한 시장, 군수들이 있었다. 한낱 건축가를 붙잡고 이렇게 요구하는 건 유명해진 성공사례 때문이었다. 쇠락하던 탄광도시가 관광도시로 바뀌었다더라. 미술관 하나로 전세역전의 잭팟이 터졌다더라. 시장, 군수, 의원들이 스페인의 도시 빌바오에 줄지어 연수를 다녀왔다. 소문의 유명한 도시들이 동반 목적지였겠다. 신문에서 관광성 외유라 의심하는 그것이다. 혈세절약 위해 집약적 체류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절 버스로 돌며 서둘러 사진 찍고 돌아왔을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은 관광객이었고 본 것은 먼 발치의 멋진 구조물들이었다. 파리에 에펠탑이, 뉴욕에 여신상이, 시드니에 오페라하우스가 있더라. 사진 찍으니 멋있고 그걸 보러 나 같은 관광객이 물밀 듯이 밀려오더라. 그런데 우리에게는 없구나. 우리도 랜드마크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강변에 이상한 인공섬 만들고, 용도도 모르는 채 디자인플라자 만들었으며, 한강 복판 외딴 섬에 오페라하우스 만들려고 했다. 그들이 파악한 도시의 정체성은 세트장이나 도박장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젊어서 외국 체험 기회가 없던 세대가 나이 먹고 사회 주역이 되었다. 방문한 도시의 속살을 관찰하거나 가치를 음미할 여유 없이 바쁜 고위직에 덜컥 올라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질주하는 관광버스 유리창 너머로 보고 느낀 대로 건축가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랜드마크 만들어 주시오. 상징조형물 건립합시다. 관광객이 밀려오도록. 옆집 트로피를 구경했으면 땀 흘려 운동하자 다짐해야지 우리도 트로피 만들어 진열하자면 곤란하다. 옆집의 땀은 이렇다. 빌바오는 미술관 건립 훨씬 전에 계획재단으로 <빌바오 메트로폴리 30>, 실행조직으로 <빌바오리아 2000>이라는 개발공사를 만들었다. 임무는 관광자원확보가 아니고 시민들이 살기 좋은 도시조성이었다. 이들은 개발사업으로 번 돈을 재투자해 철도 걷어내서 공원 만들고 흉악한 구조물 철거해서 우아한 가로등으로 도시 어두운 곳을 밝혔다. 석탄 실은 열차가 아니고 걸어다니는 시민들을 위한 도시의 틀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 시장이 던진 승부수가 미술관이었다. 귀띔하거니와 한국에서 책정되는 건축예산으로는 그런 역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싸게 넣고 크게 먹자면 그게 도박장이다. 서울에도 관광객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곳이 있다. 너무 밀려들어 주민들이 분노의 팻말을 써붙이기에 이른 곳이 북촌이다. 한옥이야 남산, 민속촌에도 있다. 그러나 북촌에 관광객이 밀려드는 건 이곳이 세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삶의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지자체장들을 향한다. 당신은 누구에 의해 왜 선출되었습니까. 유권자는 관광객 아닌 시민이다. 선거는 관광주무 부서장 선임과정이 아니고 시민의 권력이양 절차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공평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선거로 권력을 위임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관광버스 불법주정차를 허용할 테니 시민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한다면 그 지자체장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오해하거나 잊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연수 다녀온 도시는 거의 선진국에 있을 것이다. 그 도시는 세트장 운영으로 번 돈을 투전판에 재투자해 이룬 결과물이 아니다. 그 공통점은 랜드마크의 존재가 아니다. 장애인, 노약자, 외국인 등의 소수에 대한 차별이 없거나, 없도록 치열하게 노력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마땅히 그것이 시장군수가 꿈꾸는 도시여야 한다. 그때 그 도시는 외국인들이 기어이 방문하겠다는 관광도시가 된다. 그들은 잃어줄 돈지갑 쥔 관광객이 아니고 문화적 호기심 가득한 손님이다. 세상에 운명의 별자리로 정해진 장애인은 없다. 우리는 모두 늙으면 결국 장애인이 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 가면 즉시 장애인이 된다. 한국말 못하는 방문객도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게 배려하는 도시가 당연히 국제화된 도시다. 랜드마크 없어도 관광도시다. 가장 중요한 문화공간은 미술관과 음악당이 아니고 거리와 지하철이다. 값싸게 모집해서, 특혜시비 많은 재벌 면세점 매출 올려주고, 자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 먹고, 이 땅에 쓰레기 던지고 가는 관광객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관광도시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앙정부에서 지역밀착형 생활 SOC를 만들겠다고 한다. 사용된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방향은 확실히 옳다. 정치 뿐 아니라 도시도 생물과 같다. 여기저기 잘라 개발할 대상이 아니다. 혈도를 짚어 최소한의 침을 놓아 그 생명력이 도시에 퍼져나가게 하는 것이 최선의 도시개발 방법이다. 우리에게는 걸어서 갈 수 있는 놀이터와 도서관이 가득 필요하다. 그 벤치에서 이국의 관광객이 안전하고 불편 없이 쉴 수 있으면 그게 관광도시다. 결국 이 사업은 지자체의 몫이다.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지방도시의 시름이 크다. 나이 많은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고 관광객도 함께 즐기는 구조물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 군수도 있었다. 나는 기꺼이 화장실, 안내소, 작은 전망대를 설계했다. 그러나 쇠락하는 도심에 518미터 높이 전망대를 세워 관광명소로 만들어야겠다는 도시가 여전히 존재하는 게 우리 시대다. 그래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물어야 한다. 당신은 누가 선출했는지. 그 도시는 세트장인지 삶의 터전인지. https://news.joins.com/article/22988414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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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ile Destination / 두바이엑스포 한국관 공모전 주제 / 2018. 08. 30인간은 교환을 위해 도시를 만들었다. 그들이 교환해야 할 것은 정보지식과 물품이었다. 가장 합리적인 교환을 위해 인간은 모여 살았고 교환의 거리가 최소화되는 공간이 도시였던 것이다. 그 교환의 핵심공간이 시장이었다. 자본으로 치환되는 교환가치는 최소한의 이동, 즉 가장 경제적인 모빌리티를 요구했다. 산업화시대가 이를 위해 만든 답은 엔진과 바퀴를 이용한 운송수단이었다. 인류는 새로운 교환수단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그것은 교환의 목적과 방식을 새롭게 규정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모빌리티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고 사회구조를 다시 정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 지식에서 정보로 이전 시대에는 지식의 배타적 소유가 권력이었다. 그러나 지식소유의 테두리가 모호해지면서 이제 그 지식이 어디 있는지의 정보가 훨씬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지식의 권위보다 정보의 접근성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 공간에서 시간으로 교환을 위해 움직이려면 도시공간을 물리적으로 이동해야 했다. 공간을 이용하고 점유하는 방식에서 가치가 매겨지고 가치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모빌리티로 인해 공간 좌표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다만 그 교환의 대상에 대한 정보의 이동 시간에 훨씬 더 큰 가치가 매겨지기 시작했다. - 도로에서 미로로 이전의 교환은 출발지와 도착지가 명기된 도로를 요구했다. 그러나 새로운 모빌리티의 사회에서 목적지와 도착지의 규정은 무의미해졌다. 어느 위치에서 어느 방향의 어떤 곳으로 이동할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입체미로의 시대가 된 것이다. 어디로나 연결되고 출발과 종착의 규정이 무의미해진 모빌리티의 시대다. 산업화의 후발주자이며 지각수용자였던 한국은 새로운 시대에 가장 기민한 수용자이며 개척자가 되었다. 한국은 인터넷이나 핸드폰 보급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회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그 사회의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 목적지가 존재하는지, 규정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두바이엑스포의 주제, 단어로서의 모빌리티는 결국 움직여서 도착할 목적지의 존재를 전제한다. 분명 한국은 새로운 모빌리티의 엔진을 달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좌표로 지정되거나 문장으로 서술되기 어려운 목적지일 수 있다. 목적지의 규명은 지식과 공간과 도로의 몫이었다. 지금은 미로로 얽힌 정보를 시간으로 판단하는 시대다. 공간으로 번역된 그 모습은 암울한 예언일 수도 있고 화사한 찬가일 수도 있다. 여기서 질문은 한국 사회, 혹은 도시가 새로운 모빌리티를 통해 닿을 꿈을 건축을 통해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 답변의 책임은 당연히 한국의 건축계에 있으니 이를 펼칠 공간으로 국제적 정기시장, 엑스포가 마련될 것이다. 이번에 그 엑스포가 열리는 곳은 사막 너머 신기루 같은 도시, 두바이다. 서현 (한양대 교수, 두바이엑스포 한국관 건축설계공모 PA)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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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 여의나루 설계 국제공모전 취지문 / 2017. 02여의나루, 한강을 향한 교두보 이 땅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수시로 한강을 만난다. 한강은 이 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생명줄이었다. 취수, 조운 그리고 범람이 거기 얽혀있었다. 20세기 후반 치열한 치수(治水)가 있었다. 여의도는 그 과정에서 얻게 된 새로운 도시공간이다. 이 땅에서 실험된 최초의 근대적 계획도시다. 여의도는 대한민국이라는 좌표에서 원점이라는 위치를 획득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미디어의 핵심공간이 된 것이다. 국토의 크기를 가늠해야 할 때는 항상 여의도의 몇 배 크기라고 설명해야 이해가 되었다. 여의도는 시작이고 중심이고 기준이 되었다. 이제 한강은 취수, 조운, 범람으로부터 자유로운, 혹은 멀어진 공간이 되었다. 질문은 그렇다면 지금, 그리고 미래의 한강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한강을 통해 새롭게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생존과 기능의 가치가 아닌 문화의 가치일 것이다. 우리는 한강을 통해 우리가 누구이며 이 도시가 무엇인지를 묻고자한다. 21세기의 여의도는 여전히 계획과 실험의 공간이다. 여의도는 새로운 한강의 모습을 선보일 교두보면서 첨단기지가 될 것이다. 이어질 한강연관 사업은 모두 이 여의나루에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여의나루의 모습을 묻는 이 공모전의 질문은 그래서 정박과 승선에 머물지 않는다. 질문은 한강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승선한 이 배는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