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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굴렁쇠 / 2001. 04. 11새 천년을 맞는다고 세상 사람들이 들떠 있을 때 숲 속의 작은 우물 안에서 개구리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생님의 탄생 이 백 주년 기념 잔치가 나름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던 중 임금 개구리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하루 저녁 먹고 놀고 끝내지 말고 역사에 남을 오늘의 흔적을 우물 안에 남기자고. 여러 개구리들이 앞 다투어 계획안을 내놓았다. 당선된 안은 우물 꼭대기 맨 끝에 동그란 굴렁쇠를 맞춰 얹어놓는 것이었다. 우물 안 어디서든 눈만 들면 이 굴렁쇠가 보일 것이었다. 우물을 드나드는 개구리 모두가 거쳐가게 되기도 했다. 숲 속의 개구리들은 굴렁쇠만 보면 모두 이 우물을 연상하게 될 일이었다. 며칠 후에는 숲 속 개구리들이 모두 이 우물 안에 모여 높이뛰기 대회를 할 예정이었으므로 효과는 더욱 클 것이 틀림없었다. 임금 개구리는 흡족해하며 열 두개의 굴렁쇠를 얹어 놓겠다고 우물 곳곳에 방을 붙였다. 백 년에 걸쳐 꼼꼼히 만들어 걸어 놓자고 하면서도 첫 번째 굴렁쇠는 높이뛰기 대회에 맞춰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계획안을 내놓은 대장간 개구리는 우물 안팎을 분주히 뛰어다니며 굴렁쇠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은 쉽지 않아 더디게 진행됐다. 굴렁쇠 여기저기 매듭도 생기고 접혀 일그러진 모양이 되기도 했다. 값도 점점 더 들었다. 곳곳에서 볼멘 소리가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반지가게 주인 개구리가 시동을 걸었다. 우리 집에 가면 반지가 많은데 대장장이가 밤에 와서 이걸 보고 간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다른 소리들도 쏟아져 나왔다. 임금님이 나서서 그렇게 커다란 걸 만드는 건 두꺼비가 개구리를 지배하던 시대의 일이라고 했다. 작년 장마에 든 큰물 때문에 지금 우물 곳곳에는 집이 없는 개구리, 식구가 흩어진 개구리, 다리가 부러진 개구리들이 얼마나 많은데 쓸데없는 일에 돈을 낭비하느냐고 따졌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튀어나오는 게 바로 우물 안이 살기 좋아진 증거라는 개구리들도 있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개구리가 임금일 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임금 개구리는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다시 방을 붙였다. 모두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가다가 문제가 생기면 과감히 중지하는 것도 용기가 아니냐고. 대장간 개구리에게는 의견 한마디 묻지 않는 것이 우물 안의 전통 그대로였다. 제시간에 맞추지도 못하고 비싸기만 하되 찌그러진 굴렁쇠를 만들면서 개구리들을 현혹시켰다고 대장간 개구리는 들인 품삯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우물 안은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소동은 그간 지켜보던 올챙이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남겨주었다. 실없는 개구리들이 턱없는 계획을 짜면서 덧없는 세월만 보내는 곳이 우리 우물이라고 올챙이들이 알아버린 것이다. 어른 개구리들이 높이뛰기 대회에 참가할 황소개구리나 무당개구리의 눈치를 보는데는 민첩하지만 올챙이들이 살 세상을 위해서는 해주는 것이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공연히 어려운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다 낭패를 보느니 눈치만 보면서 시키는 일만 하며 사는 게 낫다는 것이 개구리밥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교훈이었다. 시간이 더 흘러 개구리로 장성한 올챙이들은 교훈을 충실히 지켰다. 옆집 아저씨도 임금님도 믿지 않았다. 어려운 일은 절대 꾸미지 않았다. 비가 오면 오는대로 가물면 가문대로 하늘만 바라봤다. 그 사이 이웃 우물의 개구리들은 사다리도 발명하고 엘리베이터도 발명했다. 그리고는 숲 속 곳곳을 뛰어 다니면서 살기 좋은 연못도 개울도 찾아냈다. 그러나 소동이 벌어졌던 우물 안에는 담배꽁초와 휴지조각만 쌓여갔다. 사람들의 나라에서 천년의 문이라는 계획이 있었다가 사라질 즈음, 개구리 나라에서는 새로운 역사책이 발간되었다. “반 천 년 역사에 빛나는 아름다운 우물에 사는 우리는 나무꾼, 선녀와 함께 세계 동화계의 삼대 주인공의 하나로서... 백년의 굴렁쇠를 만들 계획을 세우다 과감히 포기한 자랑스런 개구리들이다.”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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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서기 / 조선일보 / 일사일언 / 2997. 02. 13국민개병제가 실시되는 나라에 살다 보니 대한민국의 남자들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다만 몇달이라도 군대라는 질서에 몸을 담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은 한국의 남자들에게 외국에서 예를 찾기 힘든 감성적 공통분모를 제공하여 왔다. 우리사회 곳곳에는 자연스럽게 군대에서 형성된 문화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처음 만난 사이라 하더라도 군대 이야기는 믿을만한 공통화제이고 남자들이 사용하는 어휘의 곳곳에서 군대용어가 심심찮게 등장하곤 한다. 군대에서는 매사에 줄을 서야 하고 그 위치를 기준으로 하여 이런 저런 역할이 분담된다. 따라서 『군대는 줄이야. 줄을 잘 서야 해』라는 말이 자연스럽고도 설득력있게 들리며, 이 말은 군대 밖의 사회에서도 농담삼아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서야 줄을 잘 서게 되는지 미리 알 길이 없다는 데 있다.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질서를 지키고 줄을 서야 된다는 구호를 많이 접하게 된다. 군대의 줄서기가 통제의 용이함에 그 의미가 있다면 도시생활에서의 줄서기는 공정성의 확보에 그 가치가 있다. 먼저 온 사람이 먼저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정성보다 기회의식이 앞서는 줄서기라면 그 가치는 의심을 받게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나라의 줄서기는 공정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김포공항의 대한민국 입국심사장 줄서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창구가 두 개 이상이면 그 앞에 창구 개수만큼의 줄이 각각 형성되어 있다. 그 줄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필연적으로 다를 것인데 그러다 보니 줄을 이루는 구성원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아쉬운 기회의식이 감돌게 된다. 창구가 몇 개이든 한 줄을 만들고 창구가 비는대로 맨 앞사람이 일을 보게 하는 방법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줄서기 방법이 될 것이다. 아무리 황혼의 대국이란 소리를 들어도 아직 우리가 미국에서 입국심사장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그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공정성일 것이다. http://db1.chosun.com/cgi-bin/gisa/artFullText.cgi?where=%28%28MI+has+%27%c0%cf%bb%e7%c0%cf%be%f0%27+AND++MI+has+%27%bc%ad%c7%f6%27%29%29&sort=&dis_cnt=20&cat=SGISA&SDF=1&QRY=MI%5fFV%3d%25c0%25cf%25bb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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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애가 / 조선일보 / 일사일언 / 1997. 02. 05조물주는 세상을 만들 때 자신의 피조물들이 이처럼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 내리라는 생각을 했을까. 인간이 아주 간단한 광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사진기라는 물건을 들여다보면 그 정교한 메커니즘에 경탄을 하게 된다. 인상파 화가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생존의 방편을 찾게 만든 그 사실성과 함께 현재의 한부분을 포착하여 남겨둔다는 기록성은 사진기가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을 파고들 수 있는 바탕이 되어왔다. 2월말 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면 어디에서나 치러지는 졸업식을 들여다 보면, 과연 사진기가 없던 시절에는 무슨 수로 이 행사의 시간들을 메워 나갔을까 하는 생각도 얼른 든다. 해외여행이라도 나가는 사람들의 보퉁이에는 예외없이 사진기가 들어있고, 사진기가 없이 여행을 떠난 사람은 그 행동이 『무슨 의미심장한 결단에 의한 소산인지』 하는 질문도 제법 받게 된다. 그러다 보니 여행은 「보러 가는 것」이 아니고 「찍히러 가는 것」이 되기 쉽고, 어떤 이가 글에 쓴 것처럼 개선문도 에펠탑도 모두 뒤통수로만 보게 되는 게 태반이다. 결혼식은 엄숙해야 하고 그 주인공은 신랑신부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도 현실을 들여다보면 모두 뒤집혀져 있되 그 상황의 주범은 사진에 있음은 너무 쉬이 드러난다. 이제 비디오카메라까지 가세한 채 현란한 조명등을 비춰가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 기록기의 폭력 앞에 주례 선생님도, 신랑신부도 하객도 모두 몇 장의 이미지에 남겨지기 위한 피사체일 뿐이고 그 순간들은 모두 화려한 연극무대가 되어 버렸다. 빛바랜 사진을 통해 우리가 들여다 보는 것은 그 너머에 있는 아스라한 추억들이지 그 인화지 표면의 이미지는 아니거늘 우리가 치르는 의례의 깊이는 인화지 두께 만큼으로 줄어버렸다. 남용되는 발명품과 박제화된 피사체를 위하여 애가(애가)를 부를 때가 되었다. http://db1.chosun.com/cgi-bin/gisa/artFullText.cgi?where=%28%28MI+has+%27%c0%cf%bb%e7%c0%cf%be%f0%27+AND++MI+has+%27%bc%ad%c7%f6%27%29%29&sort=&dis_cnt=20&cat=SGISA&SDF=1&QRY=MI%5fFV%3d%25c0%25cf%25bb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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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를 문화의 중심으로 / 동아일보 / 문화칼럼 / 2003. 11. 15‘왕이 없어졌으니 궁궐도 필요 없다.’ 일제의 논리는 명쾌했다. 근대적인 제도와 함께 들여온다는 근대적인 건물들을 궁궐에 밀어 넣었다. 경복궁은 박람회장으로, 경희궁은 학교로,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만들었다. 영조의 잠저(潛邸) 창의궁(彰義宮)은 동양척식회사의 사택단지가 되었다. 정조가 아버지를 기리던 경모궁(景慕宮)에는 총독부 의원이 들어섰다. 행정관아들도 헐렸다. 의정부는 경기도청으로, 의금부는 지방법원으로 바뀌었다. 이국의 지배자에게 이 땅의 역사는 보이지 않았고 그만큼의 빈 터만 보였을 것이다. 그들이 남겨준 가치관은 광복 후에도 남았다. 학교가 떠난 경희궁은 건설회사에 팔아넘겼다. 경희궁을 되찾아 문화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무심한 사무실들로 스산한 경희궁터를 걷고 있을 것이다. 경복궁 앞에는 수십 층 높이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정부가 그 무례함에 앞장섰다. 궁궐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제군주의 시대를 동경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를 움직이던 중심 공간, 거기 쌓인 역사가 우리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총독부 청사를 헐어버린 이유는 그 건물이 흉측해서가 아니다. 건물이 딛고 서 있던 땅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경복궁 앞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수도를 옮기겠다고 한다.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안’이 마련되고 있다. 신행정수도로 이전하는 정부청사의 매각대금을 재원으로 사용하겠다고 한다. 논리는 명쾌하다. 행정부가 없어지니 정부청사도 필요 없다. 새로운 법안은 경복궁 앞 세종로의 정부청사들을 부동산시장에 내다 팔 근거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돈에는 눈이 없다. 역사도 없다. 이 공간을 사들인 거대자본은 투자한 만큼 회수하겠다고 할 것이다. 재산권 행사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할 것이다. 경복궁을 안뜰처럼 거느렸다는 주상복합아파트 분양광고가 신문지상에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등판 가득 문신 같은 간판을 두른 건물이 들어설지도 모를 일이다. 제국주의의 무력에 경복궁이 유린된 지 꼭 일백년, 이제는 거대한 자본력에 우리 도시의 안방을 내줄 길을 만들고 있다. 세종로의 정부청사들을 팔아버리면 안 되는 이유는 건물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 땅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행정관청 육조가 있던 터다. 지금 절대권력의 제왕은 사라지고 육조도 사라졌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육조가 들어서 있던 땅은 정부의 것이 아니고 국민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물려받은 이 땅을 팔 권리가 없다. 이 땅을 가꿔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세종로는 과천과 다르다. 테헤란로와도 다르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가치가 매겨질 공간이 아니다. 세종로를 건물과 토지의 조합으로만 보는 역사의식으로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 수 없다. 600년의 과거를 지운 채 100년의 미래를 내다보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믿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공공영역 1번지. 이곳은 국민 모두가 영원히 소유하고 있어야 할 우리의 공간이다. 대한민국이 자본공화국이 아니고 민주공화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버팀목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광화문(光化門)은 서양의 문과 다르다. 빛으로 세상을 바꾼다. 이 아름다운 이름은 세종대왕의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피 묻은 칼로 세상을 바꿨노라고 개선하는 장군을 위해 만든 그런 문이 아니다. 위대했던 문화군주의 뜻대로 이 공간은 문화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미술이 싫어서가 아니고 미술관이 멀어서 못가겠다는 불평을 잠재울 기회가 이제 왔다. 자동차의 소음이 아니고 어린 아이들의 웃음으로 이 공간을 채워야 한다. 그 아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기록할 것이다. 자본이 아닌 문화의 빛으로 세상을 바꾼 시대, 우리는 역사에 그렇게 기록될 수 있을 것인가. http://www.donga.com/fbin/output?search=1&n=200311140245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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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기술경기가 아니다 / 동아일보 / 문화칼럼 / 2003. 05. 03바흐의 음악은 위대한 건축이다.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은 차곡차곡 벽돌 쌓듯 치밀하게 구축해나간 음악이다. 음악이 얼마나 정교한 구조체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작이다. 중간에서 음 하나를 빼내면 전체가 무너져 내릴 만큼 꽉 짜인 구성을 갖고 있다. 이 건축적 음악은 인류가 바흐를 통해 얻은 소중한 유산이다. 바흐 건반음악의 연주는 두 손의 훈련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어떤 악기로 연주하라고 특별히 적어놓지 않은 악보 때문에 연주자들은 고문서를 뒤져야 한다. 탄탄한 화성법의 논리로 중무장하고 어떻게 이 악보를 해석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기술적인 작업이 아니고 창조적인 작업이 된다. 작곡과 연주는 무작위의 음을 기계적으로 배열하고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 어쭙잖은 감정의 분비도, 치기 어린 기교의 과시도 아니다. 분석과 상상력에 기초한 소리의 조탁이다. 피아니스트의 손이 얼마나 빨리 건반 위를 돌아다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작곡가는 음악설계사가 아니고 음악연주는 경기(競技)가 아니다. 경기는 말 그대로 기술, 재주를 겨룬다. 누가 더 빨리 결승점에 들어왔나, 어느 팀이 골을 더 많이 넣었나를 계산할 뿐이다. 누가 더 창의력이 뛰어난가에 초점을 맞춰 결과를 가늠하지 않는다. 독일 의회 의사당을 거대한 천으로 뒤덮는 이벤트를 만들었을 때 미술가가 한 일은 설계였다. 우리는 이 규정짓기 어려운 작업을 기꺼이 미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주인공인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미술설계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훌륭한 미술작품을 뽑아서 상을 준다고 해서 미술경기대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등에 번호판을 단 미술선수들이 조각 작품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 작품을 완성하는 데 만만찮은 기술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는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건축가 대신 건축설계사라는 단어가 횡행하고 건축설계경기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이와 건강과 가족관계를 이야기하면 몇 년 동안 얼마를 내고 얼마를 돌려받을지를 계산해주는 보험설계사는 존재한다. 그러나 건축가는 건축설계사가 아니다. 건축은 대지를 제시하면 원하는 면적대로 건물을 만들어주는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을 내걸고 거기에 맞는 건축설계안을 공모하는 것을 영어로는 ‘컴피티션(competition)’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옮긴다면 올림픽에서는 경기가 되지만 건축에서는 단연 ‘현상 설계 공모전’이다. 우선 이것은 형식을 갖춰 공개로 진행되기 때문에 ‘공모전’이다. 이 공모전은 지을 건물의 설계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것이므로 ‘설계 공모전’이다. 상금이 되었든, 상장이 되었든 보상을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현상 설계 공모전’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한 이후 일관되게 사용해 온 단어이기도 하다. 일본의 건축잡지와 함께 나돌아다니던 설계경기라는 괴상한 단어가 공식 문서의 표지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관청에서 발주하는 공모전도 아예 설계경기로 불리기 시작했다. 건축설계는 경기의 대상이 아니다. 누가 주어진 땅에 한 뼘이라도 더 많은 면적의 건물을 구겨 넣는가를 겨루는 작업이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허가내고 건물을 지어 더 많은 투자가치를 확보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건축은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환경을 도시에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들 이야기한다. 건축가는 도시라는 악보에 음악을 쓴다. 거리라는 화판에 건축의 그림을 그린다. 역사의식으로 무장하고, 상상력이라는 도구로 이 도시를 걸어다닐 다음 세대의 마음을 담을 그릇을 만든다. 건축은 그런 작업이다. 건축설계사가 아닌 건축가가, 건축설계 경기가 아닌 건축설계 공모전이 이 사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http://www.donga.com/fbin/output?search=1&n=200305020284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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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7번 / 동아일보 / 내 인생의 음악 / 2002. 08. 21‘육개장’이라는 군대가 있었다. 육 개월 짜리 장교라는 뜻이다. 석사장교라고도 불렸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시험을 쳐서 붙으면 넉 달은 훈련을 받고 두 달은 전방에서 실습소대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생활하는 것이었다. 전방으로 옮겨갔을 때 배속된 부대는 혹한기 훈련 중이었다. 겨울비가 오는 어느 밤, 비와 땀에 젖은 몸은 무겁기만 했다. 그러나 숙영지에 들어와서도 쉽게 잠도 오지 않았다. 이 여섯 달이 지나면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는 더 무거웠다. 군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이어폰 라디오를 틀었다. 베토벤 교향곡 7번. 빗소리에 덮인 검은 밤을 찬란하게 물들이던 불멸의 알레그레토. 그것은 내밀한 만남이었다. 유보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의 경험이었다. 그때 만난 것은 음악이 아니고 이를 만든 사람이었다. 처음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입학 직후였다. 역시 라디오를 틀었을 때 나오던 진행자의 이야기는 당혹스러웠다. “다음 들으실 곡은 베토벤 교향곡 7번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베토벤 교향곡은 수업시간에 들은 영웅, 운명, 전원, 합창 밖에는 없었다. 아홉 곡 중 나머지 곡들이 이름이 붙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악보분실’ 때문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오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7번 교향곡이라니. 격정과 흥분과 광기의 음악. 걷잡을 수 없이 밀어붙이는 7번 교향곡처럼 베토벤의 음악은 이후의 생활을 장악해버렸다. 공부는 학교공부가 아니고 음악공부였다. 사전을 사면 음악사전부터 샀고 전기를 읽으면 베토벤 전기부터 읽었다. 소설을 읽어도 베토벤을 모델로 했다는 장 크리스토프를 읽었다. 방에 틀어박혀서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살았다. 독일의 마인츠라고 하면 구텐베르그가 성서를 인쇄한 곳이 아니고 베토벤이 합창교향곡의 악보를 인쇄한 곳으로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그때 음악은 나의 영혼이었다. 분명 그 시기는 또 다른 집중과 열정의 시기였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음악 대신 침묵의 공간을 찾을 줄도 알게 되었다. 불처럼 태워버리기보다 물처럼 스며드는 그런 음악의 시간이 내게도 온 듯하다. 그러나 가끔 논리와 이성을 뛰어넘어 흠뻑 취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을 때는 7번 교향곡을 집는다. 디오니소스의 향연이라고들 부르는. 팀파니와 트럼펫의 격렬한 아우성 속을 헤쳐나가다 보면 문득 생각이 든다.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이의 인생은 도대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을까. http://www.donga.com/fbin/output?search=1&n=200208200202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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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초라한 건축가 / 동아일보 / 문화컬럼 / 2001. 04. 012000년 2월 16일. 천년의 문 현상설계의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당선작은 응모안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명쾌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런 만큼 다른 현상설계에서 번져 나오던 로비와 뒷거래의 소문도 발붙일 구석이 없었다. 필자의 응모안도 낙선작 안에 끼어있었다. 당선작은 이의가 없을 만큼 훌륭한 안이었다. 모작 시비가 불거져 나왔다. 굴렁쇠는 작아지면 반지가 되고 커지면 천년의 문이 되는 것이니 모작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불만의 소리가 계속 비집고 나왔다. 정부가 주도해서 이런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전체주의 시대의 발상이 아니냐고 따졌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장안에 얼마나 많은 데 이런 데 돈을 쓰느냐고 물었다. 건축가가 제시한 안은 찬반이 극렬히 나뉠 만큼 도발적이고 개성적이었다. 부담스러울 만큼 거대했다. 반대 의견은 천년의 문이라는 발상 자체에 대한 회의이기도 했지만 당선안에 대한 거부감이기도 했다. 건축가의 아이디어는 엔지니어링의 틀과 잘 맞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명쾌한 계획안은 구조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았다. 물리적 요구에 따라 형태는 덜 명쾌하게 변했다. 2001년 3월 28일. 천년의 문 건립계획은 백지화되었다. 예상 공사비가 늘어나고 준공 시기를 맞추지 못하고 원래 현상안의 모습이 훼손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선례가 없는 위험한 일이라는 점도 거론되었다. 실없는 정부라는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용기있게 중단한다고 했다. 그렇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에 무제한의 재정지원을 요구할 수는 없다. 선거를 통해 형성되는 정부에게 월드컵 중계방송 화면에 공사중인 구조물이 들어오는 걸 양해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어렵다. 한치 앞만 이야기하던 사회에서 100년에 걸쳐 완성할 구조물을 만들자는 것은 분명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정부가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한 계획안을 당선시켰다고 심사위원들에게 손가락을 돌릴 수도 없다. 항상 무난하고 보통에 가까워야 최선이라고 믿던 사회에서 이런 당선안을 선정한 점에서 오히려 심사위원들은 갈채를 받아야 한다. 전체주의를 연상시키는 구조물이라고 비난해도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엔지니어링이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시대를 앞서 간 계획안, 혹은 전체주의를 연상시킬 만큼 시대에 뒤쳐진 계획안을 제시했다고 비난하면 그것은 건축가의 책임이다. 책임 없이 권리만 주장하는 이들이 기형적으로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건축가들 역시 그 동안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데 인색해 왔다. 권리도 줄어들었고 사회적 역할도 축소되었다. 그런 만큼 지금 비난이 있다면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열 두 개의 대문을 100년에 걸쳐 꼼꼼히 짓겠다고 하면서도 첫 대문만은 월드컵 경기에 맞춰 서둘러 지어야 한다는 조건은 분명 모순이었다. 대지 조건도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고 이에 따라 계획안이 바뀌면서 늦어진 책임도 건축가의 몫이라고 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중지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이 사회에서 건축가의 위치는 백지화 과정에서 선명히 드러났다. 설계를 진행하던 건축가의 의견은 청취되지도 반영되지도 않았다. 건축가는 신문 보도를 통해서야 백지화를 알게 되었다. 예산과 기간에 관한 대안은 없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계획이 중지되었으니 용역비도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은 부동산 중개사와 건축가가 같은 보따리 안에 들어있는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사건이다. 천년의 문은 닫혔다. 그 닫힌 문 앞에서 많은 사람이 아쉬워하고 있다. 이것이 가치다. 전통적인 문양, 청자의 곡선을 갖지 않는 새로운 구조물로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겠다는 데 박수를 보내는 수많은 사람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 가치다. 우리의 미래를 믿는다면 우리의 현재를 이 땅에 남기려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새로운 계획안을 내는 것은 건축가의 몫이고 여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사회의 몫이다. 거듭 천년의 문은 아름다운 계획안이었다. http://www.donga.com/fbin/output?search=1&n=200104110463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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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모르면 예술을 말라 / 동아일보 / 문화칼럼 / 2000. 03. 01베토벤이 그려낸 자신의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베토벤은 민중의 해방자로서의 나폴레옹에게 교향곡까지 헌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다. “내가 대위법을 아는 만큼 전쟁을 할 줄 안다면 나폴레옹을 무찔러 버릴 텐데.” 여러 멜로디를 겹치며 화음을 이뤄나가는 대위법은 작곡의 기본기. 우선 주목할 것은 체계적 교육을 통해 베토벤이 갖춘 기술적 능력이다. 자신 있게 구사하는 기본기, 기술은 예술의 세계를 이뤄내기 위해 갖춰야 할 능력이다. 그러나 예술이 기술을 넘어서게 하는 요소는 상상력과 세상을 보는 눈이다. 베토벤이 영웅교향곡으로 보여준 것은 하이든, 모차르트의 음악세계를 폭발적으로 뒤집는 상상력이다. 그리고 해방자와 독재자를 뚜렷이 구분하고 분노할 줄 알던 성찰의 깊이다. 그런 능력에 기초해 베토벤은 자신의 직업세계를 바꿨다. 귀족들의 식사시간에 쓸 식사음악을 작곡하던 피고용인의 모습을 바꾼 사람이 바로 베토벤이다. 작곡기술자가 아니고 작곡가라는 직업을 확립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악보를 팔아 생활해 나갔다. 일 주일에 한 곡씩 미사음악을 작곡해 교회에 바쳐야 하던 시대가 지나갔다. 미사가 아닌 연주회에서 연주될 새로운 미사곡의 시대를 베토벤이 열었다. 음악세계는 그렇게 발전했다. 이제 문화의 세기가 되리라던 그 시대가 왔다. 문화도 상품이니 팔아서 부자가 되자고 한다. 빈 콤팩트디스크 한 장의 가격은 2000원 남짓 하지만 베토벤의 교향곡이 담기면 값이 대여섯 배로 뛴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인쇄술의 발명, 산업혁명과 맞먹을 영향력을 지닌 새로운 기술의 시대도 함께 왔다. 컴퓨터 게임과 애니메이션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기술이 제대로 된 문화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베토벤의 시대와 달라진 바가 없다. 우선은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 깔려야 할 것은 인간이 쌓아온 역사와 철학에 대한 통찰력이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묶어 부르는 이름이 바로 인문학적 깊이다. 작곡의 기본이 대위법이면 문화의 기본은 인문학이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충무로에서 영화의 잔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선행돼야 할 것이 인문학적 깊이를 갖는 것이다. 그 성찰의 깊이를 보여주는 영화라야 경쟁력 있는 문화 상품이 되고 고전으로 남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영화감독은 영화제작 기술자에 불과할 뿐이다. 세계를 제패하는 일본 만화의 문화적 힘은 데생 능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눈을 동그랗게 하는 상상력과 뚜렷한 가치관에서 나온다. 이 땅에서 영화 만화 광고 건축에 모방과 표절의 부끄러운 입씨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제품이 아닌 작품이라면 작가가 세상에 펼쳐 보이는 것은 당연히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 작가가 발표한 것이라면 당연히 독창적인 것이라고 믿어줄 수 있는 세상도 되어야 한다. 그 믿음의 바탕이 바로 작가와 사회의 인문학적 깊이다. 건축가가 공원을 설계하는 데 철학자가 이론적 배경을 마련해주며 해체주의 건축을 탄생시키는 것이 유럽의 문화적 힘이다. 그러나 모방과 로비와 담합의 뒷소문만 항상 무성한 것이 이 땅의 건축계의 우울한 현실이다. 건축설계사라는 해괴한 단어가 횡행하는 것이 우리 건축문화의 단면이라면 그 짐을 덜어야 할 책임은 건축가들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인문학적 깊이의 책임은 사회에 공통으로 있다. 새로운 기술의 시대에 고시와 벤처 밑에 묻혀 있는 인문학의 위기 의식은 그래서 더 두렵다. 컴퓨터 게이머라는 새로운 직업도 생겼다. 기술과 재주로서의 컴퓨터 게임만 이야기된다면 컴퓨터 게임은 문화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컴퓨터 게임을 바꿔 나갈 수 있는 상상력이다. 이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성찰하는 능력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게임기술자’가 아닌 ‘게임가’라는 이름도 붙여줄 수 있다. 문화가 넓어지고 깊어진다. 듣고 싶다. “내가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만큼 선거전을 안다면 그 지역색 조장하는 정치인들을 무찔러 버릴 텐데.” http://www.donga.com/fbin/output?search=1&n=200003010100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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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으로 쌓는 부실건물 / 동아일보 / 아침을 열며 / 1999. 08. 01쉿, 모두 조용! 모든 소음은 금지된다. 수능시험 듣기평가 시간에는 비행기 한 대도 뜨고 내리지 못한다. 대학입학시험은 이 땅의 모든 것을 허용할 수도, 금지할 수도 있는 신화다. 비판은 아직도 들끓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가치는 간과할 수 없다. 공정함이다. 시험장에는 재벌그룹 회장의 아들도, 북청 물장수의 손자도 모두 필기구만 들고 들어간다. 운전사가 모는 검은 승용차를 타고 왔건, 퀵서비스 아저씨가 모는 오토바이에 실려 왔건 모두 같은 자리에 앉아서 시험을 본다. 그래서 수능시험은 이 사회의 신화다. 기부금 입학의 불순한 도전을 버텨내는 이 땅의 힘이다. 물론 누구는 고액과외를 하고 누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 경쟁에 이르는 과정까지 공정한 사회는 없다. 그러나 경쟁 자체는 공정해질 수 있다. 그리고 공정해야 한다. 건축가도 경쟁을 한다. 현상설계라는 이름의 경쟁이다. 건축설계도 인간의 지적 노동이다. 누가 어떻게 설계를 하느냐에 따라 한심한 결과도,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드는 결과도 나올 수 있다. 바로 그 좋은 설계를 얻기 위해 현상설계라는 과정을 거친다. 특히 관공서에서 발주한 건물을 지을 때는 건축가 선정과정의 공정함도 중요하므로 현상설계를 거친다. 그러기에 심사위원단은 대개 공정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언제나 존경받는 분들, 교수들이 대개 심사위원을 이룬다. 그러나 수 억, 수십 억 원의 설계비가 걸린 현상설계에는 성인군자를 표방하는 건축가들만 응모를 하지는 않는다.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되면 심사 전에 심사위원을 찾아간다. 발표 안된 명단을 빼내는 것도 능력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만든 안을 보여준다. 학연이 닿으면 이야기도 쉽다. 때로는 설계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심사위원에 들어갈 만한 교수들의 리스트를 작성한다. 그리고는 미리 자문을 명목으로 지속적으로 계획안을 보여준다. 나중에 심사위원에 위촉되면 어느 쪽에 표를 던져달라는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도 없다. 축구가 아름다운 이유는 영 대 영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홈 경기라고 우리가 한 점을 더 넣은 것으로 치고 경기가 시작되지 않는다. 백 태클을 하면 유니폼의 색깔에 관계없이 붉은 딱지를 먹는다. 심판이 없으면 축구는 럭비도 되고 격투기가 되기도 한다. 익명의 경쟁자들끼리 알아서 신사협정을 하기를 바라는 건 희망사항이다. 게임의 이론은 배신하고 무임승차하는 것이 개인에게 더 이익임을 알려준다. 개인의 이기심을 통제하고 경쟁을 공정하게 만드는 이는 심판들이다. 건축현상설계를 공정하게 만드는 이는 심사위원들이다. 연줄을 앞세워 찾아온 건축가들을 냉정히 돌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경쟁이 정말 공정해진다. 심사위원에 대한 존경심도 커진다. 대학입시 성적을 근거로 서로 뭉치고 봐주는 사이 이 도시에는 수준미달의 건물들도 두려움 없이 들어섰다. 우리끼리만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사이 외국의 건축가들은 실력을 앞세워 이 땅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국경 내의 경쟁이 공정하지 않으면 국경을 넘는 실력이 생겨날 수 없다. 교수가 들러리 심사위원이 되는 관청 발주 현상설계도 있다. 요식 행위로 행하는 현상설계에서 이미 결과를 정한 발주처 내부 인사들이 심사위원의 과반수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선안이 오래 전에 내정된지 모르고 현상설계에 참여한 건축가, 심사에 참여한 교수는 씁쓸함만 뒤에 남기고 자리를 떠야 한다. 건축의 문제가 사회문제로 인식되고 건축의 불공정함이 사회의 분노를 사야 도시가 아름답고 건강해질 수 있다. 공정하지 않은 건축가 교수 공무원을 큰 소리로 질타해야 한다. 모두 쉿, 조용히 있는 동안 건물은 무너지고 어린이들은 불길에 휩싸였다. 내 친구, 선후배가 이 땅에 건물을 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도시에 좋은 건물이 들어서는 것이다. 이 도시에 겉모습이 그럴 듯한 건물이들어서는것보다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공정해지는 것이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도시에 아름다운 건물이 물결칠 수 없다. 절대로 없다. http://www.donga.com/fbin/output?search=1&n=199908010088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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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군사문화 / StadtBauwelt / 2008. 09. 26I. Introduction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다. 이어 1942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영토인 펄하버를 공습함으로써 세계대전이 확전되었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도 병참기지로 바뀌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남한과 북한이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오늘까지 남북한은 준전쟁상태에 이르고 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쿠테타를 통해 집권했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 암살될 때까지 집권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장군이 쿠테타를 통해 집권했다. 그의 군대 동기인 노태우 대통령이 1993년 2월 25일 임기를 마침으로써 장군출신 대통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20세기의 한국은 전쟁국가였다. 국민들은 전쟁을 직접 경험했거나 전쟁을 대비해야 했다. 군사문화는 한국 사회의 한 부분이 되었다. 군사용어가 일상화되었고, 수많은 사회조직이 군사조직을 닮아갔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속에서 형성된 서울의 도시 풍경은 어떤 것인가. 과연 군사문화는 한국의 도시를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했고 그 흔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II. Japanese Colony 40대 중반을 넘어선 한국 사람들의 중고등학교 졸업사진 앨범을 펼쳐보면 판박이 같은 얼굴들이 가지런하다. 모두 똑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교복을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정된 옷을 입었다는 데 그치지 않았다. 안경테, 허리띠, 양말, 신발까지가 모두 통제가 되는 생활을 의미했다. 심지어는 책을 읽는 자세, 걸어 다니는 자세까지 모두 통제의 대상이었다. 중학교 남학생들의 머리는 모두 스님들처럼 빡빡 깎은 것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은 죽이지 말라’는 불교의 영향이 아니었다. ‘죽이지 않는다면 죽는다’는 군사적인 요구였다. 일본의 식민지 시기가 그 출발점이었다. 그 배경에는 병영으로서의 학교가 있다. 한국은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현대에 영향을 미친 한국의 근대적 대중교육은 바로 이 식민지시기에 시작되었다. 식민지에 시행되는 교육이 억압과 통제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교육의 가치는 자유로운 사고, 창조적인 발상에 있지 않았다. 규범에서 벗어난 복장과 태도는 체벌로 다스려졌다. 한국인들에게 훈육과 체벌은 교육과정의 당연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각인되었다. 그 억압은 일본이 전쟁을 시작함으로써 극단적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에 의해 시행된 대중교육은 병영의 모습을 차용한 것이었다. 복장과 행동은 군대의 기준을 적용하였다. 운동장과 교실은 병영의 연병장과 막사의 모습을 고스란히 따랐다. 일본의 점령은 한국에서 왕정의 붕괴를 의미했다. 서울에 산재한 왕족과 귀족의 저택들은 모두 주인 없는 공간이 되었다. 일본은 이 공간에 근대적 기관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가장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복장과 두발의 규제는 일제 강점기가 종료된 지 40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건물로서 학교의 모습은 그대로 아직도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 세워진 학교들도 모두 이전의 선례를 따라 병영의 모습으로 반복해서 세워졌다. 군대의 병사들은 연병장에 줄 맞춰 서서 지휘관의 통제를 받는다. 학교의 운동장에서 학생들은 매주 조회를 섰다. 이 조회는 군대의 병사들이 사열을 하는 것처럼 줄을 맞춰 서서 진행된다. 운동장 앞의 구령대에서는 군대의 지휘관들이 진행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교사들의 지시와 명령이 전달된다. 매년 한 두 번 운동장에서 진행하는 운동회는 아직도 학교의 가장 큰 행사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시작된 이 행사는 단순히 체육행사가 아니다. 백군과 청군으로 학생들을 나눈 상태로 진행되는 이 행사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대결과 승리라는 군사적 대치방식이 학교 운동회의 구도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시작된 일본의 전쟁은 1945년 원자폭탄의 투하로 종결되었다. 전쟁 막바지의 일본은 서울에 중요한 흔적을 만들어 놓았다. 당시 서울의 주택은 모두 목조였고 도로패턴은 미로와 같았다. 전쟁 말기 미국이 일본을 폭격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식민지인 한국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일본은 미국의 폭격 후 온 시가지로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완충공간을 서울에 만들었다. 건물들을 헐어내고 폭 50m 정도의 긴 띠 모양 공간을 서울의 한복판에 형성하였다. 미로 도시 한복판에 칼로 잘라낸 것처럼 형성된 기하학적인 공간은 기존 도시를 만들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논리의 개입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도시조직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 완충지역은 이후 서울의 도시변화를 증언하는 중요한 공간이 된다. III. Social Militarism 학교에서 교복을 입었던 한국의 남자들은 다시 한번 제복을 입어야 했다. 교복과 달리 지금까지 굳건히 남아있는 이 제복은 바로 군복이다. 아직도 한국은 전쟁 중인 국가다. 남한과 북한은 휴전 상태일 뿐이다. 이 현실은 한국으로 하여금 선택의 여지 없이 징집제도를 고수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의 전쟁이 교복을 남겨놓았다면 한국전쟁은 군복을 남겨놓았다. 20세기 후반 내내 한국은 냉전의 전초기지였다. 문제는 한국이 아닌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그래서 일본이 항복을 했다는 데서 시작한다. 2차대전의 종결 이후 한국의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진주하게 되었다. 냉전 시대의 분단지점이었다는 점에서 한국과 독일은 상황이 같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는 분단 이후 한국은 전쟁을 치르고 그 이후 다시 분단 상황으로 복귀했다는 점이다. 전 국토를 전쟁터로 몰아넣은 한국전쟁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한반도를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전국이 잿더미로 변한 상태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남북한의 관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대립경쟁구도를 넘어 무력적인 적대관계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징집제도는 당연한 것이었고 한국의 남자들은 모두 군사조직의 한 부분이 되었다. 한국의 징집제도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흔적을 사회에 남겨놓고 있다. 하나는 군사문화를 사회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남녀문제의 차별적 접근을 자연스럽게 허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남자들은 20대 초반의 2,3년을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 군사적 경험은 학교 교육보다 훨씬 더 극심한 훈육과 체벌을 자연스런 사회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장교든 사병이든 전역 군인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사회조직이 군사조직을 모방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남성 위주의 조직일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대표적인 것이 건설회사 조직이다. 한국에서 1960년에서 1990년까지는 건설업의 시기였다. 폭격으로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는 것은 바로 건설이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는 이 시기의 것이었다. 건설은 경제적 부흥의 가장 가시적인 성과물이었다. 1970년대 오일 붐에 힘입은 중동 건설에 한국 건설노동력이 참여하면서 건설산업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1961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의 대통령들은 모두 장군출신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한국은 건설국가였다. 서울시장을 비롯한 정부고위관료, 공기업의 최고책임자에 군인출신들이 임명되었다. 한국의 관료조직, 공기업조직은 군사조직과 민간조직의 혼합체가 되었다. 군사조직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목표의 설정과 달성이다. 한국의 건설문화는 휴일과 취침을 고려해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들을 설정했고 이을 달성하기 위해 무자비한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계급에 따른 엄격한 위계조직, 직급에 근거한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 개인의 생활을 희생하는 윤리의식 등은 건설회사를 지탱하는 중요한 군사적 문화였던 것이다. 군사조직체로서의 건설조직체는 한국의 남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문화에서 가치판단은 단 하나, 목표가 이루어졌느냐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방법이 동원되었고 누가 희생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시적 성과를 중시하는 사업의 대표적인 예는 서울 중심가를 관통하는 청계천 복개였다.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서울의 하수망에서 청계천은 오염된 하수로였다. 서울시는 하수망 정비가 아닌 하천 복개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위에 고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문제가 되는 곳은 가리고, 보이지 않는 곳은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이 뚜렷하게 표명된 것이다. 일본이 남긴 띠 모양의 피난공간에는 세계에 보여준다는 이름을 가진 세운상가를 세웠다. 그러나 위계, 보고, 과시로 표현되는 군사문화의 성과 뒷면에서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 노약자 등과 같은 사회 소수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도시조직, 준공 시 화려하나 내구성 없는 구조물, 속도만능의 자동차 중심 도시체계 등은 규모, 형식, 속도에 집착하는 군사문화의 결과인 것이다. 이렇게 만든 건물과 사회기반시설들은 건립 2,30년 만에 철거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몇몇 주요 사회구조물들은 스스로 붕괴가 됨으로써 군사작전처럼 시행한 건설의 결과들을 하나 둘 보여주기도 했다. 경직된 관료조직, 수동적 사회구성원의 양성 등 군사문화가 지탱하는 사회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반성을 요구했다. 한국의 징집제도는 국민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남자들만을 대상으로 한다. 청년기의 중요한 시기를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희생이라는 점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19세기까지 비대칭적이던 한국의 남녀관계는 이 희생의식과 보상심리를 통해 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해 나갔다. 사회가 남성의 집단적 일탈을 상당부분 묵인하는 것이다. 남성중심의 향락문화는 한국사회만의 특징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도시의 뒷골목 풍경을 이루는 집단적이고 소비적인 남성문화는 다른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그 문화에 한국 남성들을 입문하게 하는 시기가 대체로 군 복무 전후다. 이 문화를 확대재생산하는 중심에는 병역이 있는 것이다. 입대 전후와 휴가기의 일탈에 대해 한국 사회는 관대한 입장을 표명해왔다. 이러한 일탈은 음주에서 성적인 향락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이들을 수용하는 상업시설들은 휴게실, 안마시술소, 이발소, 룸살롱 등 제목만으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의 도시 내 뒷골목 풍경을 발전시켜왔다. 성매매는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지만 공창에 가까운 사창가가 도시 조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군복무에 기반한 피해보상의식, 공동체의식을 배제하고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의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은 남자들의 경우 병역에 기반해서 좀더 강화된다. 도시뒷골목 향락공간의 이용 단위가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는 점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즉 각종 다양한 도시뒷골목 공간을 이용하는 동기를 향락 자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공범의식을 통해 남성공동체를 확인하려는 의미가 배경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현란한 네온사인과 광고판으로 표현되는 한국 뒷골목 풍경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배경에는 이런 군사적 남성공동체 문화가 깔려있다. 군사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배경에서 남한과 북한이 같은 점이 있다. 도시 내에 구호가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남한은 도시에 내거는 구호와 함께 상업시설의 간판이 더해지면서 북한의 경우보다 더 혼잡한 도시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키자, 이루자, 없애자 등과 같은 단어로 끝나는 원칙론적이고 선동적 구호들은 한국의 사회가 군사문화의 연장에 들어서 있다는 모습들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부터 시작된 구호문화는 군대에서 확장되고 학습된다. 도시 내에 혼란하게 내걸렸으되 공허한 구호들은 한국 시민들에게 자연스런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IV. Horror of Invasion from North Korea 한국전쟁 이후 남한사회 전체에는 언제 북한이 침략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하게 되었다. 1968년에 북한의 특공암살부대가 청와대의 뒷산까지 침투한 사건은 이 위협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1974년에는 대통령의 암살기도 사건으로 인해 영부인이 시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주변을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있고 그 복판에 한강이 흐른다는 것은 서울의 중요한 경관자원이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서울은 그렇게 한가한 공간이 아니었다. 서울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남한 전체에 끊임없는 불안을 안겨주었다. 서울은 시민들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은 절박한 공간이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울은 전체가 요새가 되어야 했다. 북쪽에서 서울에 이르는 간선도로에는 모두 대전차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한강 하류 북한에 가까운 곳에는 북한의 잠수특공부대의 침입에 대비해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서울 주변의 높은 산과 고층 건물 옥상은 모두 군부대가 주둔하는 공간이 되었다. 당연히 시민들의 접근은 통제되었다. 고층건물을 지을 때도 그 지점에서 청와대를 저격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고려되었다. 아직도 풍수사상이 배후에 널리 깔려있는 한국사회에서 자연은 또 다른 유기체로 인식되곤 한다. 서울 중심부의 남산도 성역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그러기에 남산을 관통하는 굴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신체를 뚫는 것만큼이나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제안이다. 그러나 지하시설이 북한의 폭격에 대비한 방공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남산에 무려 세 개의 터널을 뚫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지하철 역사는 모두 폭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고 신축건물에는 지하실이 설치되어야 했다. 북한의 공격으로 수도공급이 끊겼을 때를 대비해서 건물에는 지하저수조 설치가 의무화되었다. 고속도로는 비상시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될 가능성을 고려했다. 한국전쟁은 학습효과를 갖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던 서울의 한강 다리가 파괴되어 북쪽의 시민들이 피난하는데 막심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 때문에 한강은 골치거리였다. 새로 놓을 다리의 위치는 군사작전과 시민피난을 고려해서 설정되었다. 특히 폭격으로 파손이 되었을 경우 가장 쉽게 복구될 수 있는 다리도 조성되었다. 교각의 높이가 높지 않아 비교적 쉽게 상판을 다시 얹을 수 있는 이 다리는 장마기간 한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잠수교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요새화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서울의 주요 행정기능을 모두 남쪽으로 옮겨서 미사일 사정거리를 벗어난다는 해결책이 등장했다.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로 수도전체를 남쪽으로 옮긴다는 계획은 대통령의 암살로 더 이상 추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행정부의 일부 기능은 서울의 남쪽으로 이전을 했다. 미사일 사정거리를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높은 산을 배경으로 해서 북쪽의 미사일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 위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경쟁대상이었다. 남한과 북한의 경쟁은 닉슨(Nixon)과 후르시체프(Khrushchev)의 키친논쟁(kitchen debate)이 보여주는 입씨름 수준을 넘어 구체적인 것이었다. 국립공연장의 규모를 결정하는 데는 한국의 공연시장규모가 고려되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의 공연장보다 규모가 커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광장도 다리도 북한의 것들보다 크고 넓어야 했다.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으로 성취해낸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일 것이다. 올림픽을 치러낼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자원을 갖추지 못한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하게 된 과정부터 필요한 시설을 제시된 시간 안에 맞춰 건설해 낸 것까지의 경과는 모두 한국 사회를 버티고 있는 군사문화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의 유치는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북한의 위협에 대해 안전하고 유효한 방패막이였다. 아울러 북한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유하게 되었음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도구이기도 했다. 올림픽은 군사문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 건설산업의 정점이기도 하면서 이제 그 효용이 다 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알려주는 기점이 되었다. 가장 상징적인 모습은 한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의 상징인 한강이 올림픽 기간에 피사체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강에는 유람선도 떠 있어야 외국의 강처럼 제대로 된 강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유람선을 운행하기에 지형상 한강의 수심은 너무 낮았다. 한강의 하구에 댐을 세워 수심을 높이자는 제안은 군사문화가 군림하지 않았다면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시적 성과를 위해서는 생태환경의 교란은 아예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낮은 교각으로 조성된 잠수교가 유람선 운행에 걸림돌이 되었다. 유람선이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다리는 활처럼 부풀어 올려졌다. 피난과 생존을 위해 건설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모습이었다. V. American Forces in Seoul 한국은 미국의 힘으로 일본에게서 해방되었고, 미국의 도움으로 한국전쟁을 치러냈고, 미국의 주둔으로 북한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한국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국가가 되었다. 휴전협정에서 한 가지 더 곤혹스런 점은 이 협정의 주체가 남한과 북한이 아닌 미국과 북한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서울의 도시 모습을 규정하는 중요한 단서들이다. 한국인들에게 양키(Yankee)는 미국인들이 아니고 미군들이었다. 미군들은 강대국 미국인들이면서 별볼일 없는 군인들이기도 했다. 미군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입장은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1970년 대까지 미군부대를 통해 유통되는 군수품은 이국적이고 품질 좋으나 비공식 유통경로로 흘러 든 물건이었다. ‘양키물건’은 특별한 그 무엇이었다. 서울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워커힐(Walker Hill)이라는 이름은 바로 미국의 예외적 위치를 보여준다. 워커는 한국전쟁 중 전사한 주한유엔군 사령관의 이름이다. 워커힐 호텔은 최근까지도 한국에서 카지노가 허용되는 유일한 공간이면서 완벽하게 서양적인 쇼가 진행되는 공간이었다. 서울의 지도를 놓고 보면 한 복판에서 기형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남쪽에서 한강을 건넌 지하철 노선이 갑자기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기존의 노선과 필요 이상으로 인접해서 지나가는 것이다. 한강을 건넌 도로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방향을 바꾼다. 자동차도 지하철도 중심을 비껴가야 하는 공간 때문에 서울은 도넛처럼 가운데가 비어있는 이상한 도시가 되었다. 바로 이곳은 미군이 주둔해 있는 곳이다. 서울의 복판은 한국 대통령도, 서울 시장, 서울 시민도 손을 댈 수 없는 성역이었다. 미군이 주둔한 용산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이었다. 광복 이후에 미군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당연해 보였다. 모든 도시계획은 미군기지를 제외하고 고려되어야 했다. 서울 복판의 미군기지는 도시구조의 왜곡을 가져왔다는 점 외에 독특한 부산물을 낳았다. 미군의 문화가 서울에 도입되는 지점으로서의 이태원이라는 지역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수입된 문화가 미국이 아니고 미군의 문화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군인들의 문화는 소비적이고 향락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문화에서도 소비적이고 순간적인 문화가 한국에서 왜곡되어 미국을 대변하게 되었다. 미군문화를 바탕으로 이태원은 한국과 미국이 혼합된 소비와 향락의 공간으로 변화해나갔다. 한국에서 미국의 문화는 동경과 멸시를 동시에 받는 것이 되었고 이태원이 바로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VI. Militarism Afterward 한국전쟁 이후 한국이 이루어낸 경제적 성과는 한국인들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것이다. 그 결과는 한국의 발전상을 과시하기 위해 그림엽서에 등장하는 서울의 전경이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이 경제규모 13위에 이르는 국가가 되는 데에는 군사적인 동원문화가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올림픽을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북한에 대한 비교우위를 확인하게 되었다. 북한은 무력이라는 점에서는 위협요소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더 이상 경쟁상대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군사 문화에 힘입은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유보된 민주사회와 희생된 개인, 계층을 무시할 수 없다. 경제성장의 배경에 군사문화가 유일한 힘으로 깔려있던 것도 아니다. 근면한 윤리의식, 유교적 교육열 등이 모두 지목이 될만한 내용들이다. 그리고 경제성장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달성해야 할 사회의 유일한 가치도 아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분명 가장 중요한 가치의 하나다. 특히 절대빈곤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전쟁 직후의 사회가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원동력의 하나였던 군사적 동원문화의 흔적을 오늘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도 공정한 평가는 분명 아니다. 문제는 미래에 있다. 남북한의 대결구도가 달라지고 있다. 남한의 대통령이 북한의 수도 평양을 방문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울도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실상부하게 환경이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신속한 의사결정보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지닌 가치가 인정되고 사회적 소수의 존재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우선 청와대 근처의 산에 등산이 허용되었다. 청와대를 내려다보는 것이 허용된 것이다. 도로를 막아서던 대전차 장애물도 철거되기 시작했다. 미술작품으로 바꾸는 방식을 찾아보자는 제안도 등장했다. 1970년대의 경제성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진은 청계천고가도로와 31빌딩이었다. 우리도 남들처럼 도시 내에 고속도로와 고층건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근대화, 산업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2002년 서울시민들은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를 시장으로 당선시켰다. 그리고 2005년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청계천이 복원되었다. 경제가 아닌 환경이 도시의 화두라는 데 시민들이 동의한 것이다. 물론 철거를 진행하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 역시 급박한 일정을 정하고 그에 맞춰 사업을 진행했다는 점에서는 군사문화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개발과 성장으로 도시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방향 전환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제는 세운상가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수립되었다. 폭격에 대비한 피난처도, 군용활주로로 쓰려던 광장도 공원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잠수교 위에는 새로운 다리를 놓았다. 잠수교도 새로운 청사진으로 그려졌다. 이제 잠수교를 보행자 전용교량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한강을 따라 서울을 가로지르면서 더 빨리, 더 많은 자동차를 실어 나르던 한강변 고속도로들이 시민들의 한강접근을 막는다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도 변화의 모습이다. 행정부를 옮기기 위한 계획이 다시 수립되었지만 이번의 계획은 북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중심의 국토계획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국토계획을 수립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서울의 복판을 점유하고 있던 미군부대도 2011년경까지 지방으로 이주하는데 동의했다. 미국의 점유로 인해 역설적으로 개발압력의 진공지대로 남아있던 이 공간을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것은 2000년대 초반 한국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군사적 동원문화로 만든 도시는 건설만큼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시민 개인의 생활에 투입된 군사적 흔적은 쉽게 희석되지 않고 있다. 통일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아직도 징병제도는 시행되고 있다. 병역은 아직 논리적인 접근이 쉽지 않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도시뒷골목에 자리잡은 남성중심의 향락적 소비시설도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 한국이 군사문화를 과거형으로 회상하게 되는 것은 아마 통일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통일은 한국과 한국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의 예가 보여주듯이.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