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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전 / 중앙시평 / 중앙일보 / 2023. 12. 07‘땡전’ 한 푼 없다. 파산지경에 이르러 호주머니를 들추며 하는 이야기다. 저 ‘땡전’의 족보가 궁금해진다.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당백전 유래설이다. 조선 후기 경제지식 없는 왕실이 무책임하게 발행했다는 화폐의 이름이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가 무색한 악화다. 당백전 발행 이유가 경복궁 중건이었다는 건 교과서에 나온다. 임진왜란 때 전소하여 잡초만 무성했던 그 궁궐이다. 과거시험장으로 가끔 쓰였다고 실록에는 쓰여있다. 경복궁 중건의 목적은 왕권 확립이었다고 또 교과서는 설명한다. 왕실 권위가 한순간에 추락할 리 없었으니 단숨에 회복될 일도 아니었다. 경복궁 중건 삼십 년도 되지 않았을 때 당황스런 사건이 벌어졌다. 국가재정을 거덜내며 지은 왕궁을 임금이 버렸다. 사용기간으로 보면 재건축 요구 무성한 요즘의 아파트보다 짧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이 궁궐로 돌아오지 않았고 제국의 간판을 달아 권위를 열망했다. 그 뒤 조선총독부는 임금 떠난 궁궐에 자신들의 정부 청사를 지었다. 우리는 역사모욕이라 분개하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주인 없는 공간 재활용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조선과 다른 국가다. 그런데 그 대한민국은 경복궁 원형을 복원하겠다고 나선 지 오래다. 도로 선형 바꿔가며 일제 강점기에 사라진 월대도 복원했다. 경복궁 인근의 공간은 역사 정체성 상징이므로 복원 주장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우리가 우리의 기행에는 관대하는 것이다. 복원한다는 경복궁 동편 경내는 널찍하게 주차장으로 쓰이는 중이다. 서편 경내에는 정체불명 건축양식의 국립고궁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대한민국 시대에 또 궁이 버려졌다. 이번 궁은 왕궁(royal palace)이 아니고 대통령궁(presidential palace)이다. 청와대라고 불렀다. 문제 많은 위치의 이상한 배치 건물이라고 지탄의 대상이었다. 문제들에는 대개 동의했으나 해결 변수가 복잡했다. 얽히고 복잡한 문제는 단칼에 풀어야 한다. 쾌도난마. 이 사안도 그렇게 결론이 났다. 대통령은 용산으로 떠났고 건물은 남았다. ‘땡전’ 시대가 있었다. 9시 시보가 땡하고 울리면 이어지는 뉴스의 첫 문장이 항상 “전두환 대통령은...”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직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은 남쪽이 북쪽과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판정을 얻은 세계적 이벤트였다. 자존심이 세워졌다. 대통령궁은 당연히 국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건물이다. 그래서 식민지시대의 흔적이 선명한 건물을 올림픽 개최국의 대통령궁으로 계속 사용할 수는 없었다.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어도 선거에 이르는 과정에 ‘땡전’이 걸쳐있어서 특별히 가시적 표현이 중요했을 것이다. 콘크리트 기와집에 대한 건축계의 반성이 많던 시대였지만 여기서는 별 대안도 없었다. 전통양식이 아닌 어떤 모양의 건물을 가져다 놔도 비난이 쏟아질 것은 자명했다. 전통은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고 그래서 건축양식은 기와집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부다. 피해의식이 여전하던 시기였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부심이 과장되어 표현되어야 했다. 청와대 건물에서 선택한 방식은 거대함으로 권위를, 목재로 전통을, 금박으로 성취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사 근정전을 콘크리트로 불러내서 목재 껍질 두른 뒤, 예식장 샹들리에와 시골 호텔 금박 문고리를 달면 청와대가 딱 나온다. 그 결과 과연 건축은 한 시대의 증언이라는 사실의 증언자가 바로 청와대다. 세상이 변해 한국은 이제 선진국을 자임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 대한민국의 안목과 민주주의 정체성은 더이상 그 공간의 구조와 형식에 맞지 않는다. 그런 건물에서 최고 안목의 정상급 외국 손님을 맞는다면 그건 현재의 대한민국에 대한 모독일 사안이었다. 그래서 청와대는 또 버려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맥락이 다르다. 권위를 향한 열망이 아니고 권위로부터 탈출이라는 명분은 대한민국이 백 년 전의 대한제국과 다른 국가라는 의미였다. 이제는 열강이 노리는 먹이가 아니라 열강 누구도 어수룩하게 보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다. 청와대는 그 성장을 목격해 온 핵심건물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하늘이 내린 나랏님이 아니라 선거로 선출된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은 선출되었던 대통령까지 탄핵한 국민의 덕에 군사 쿠데타는 꿈도 못꾸는 국가가 되었다. 청와대는 경복궁보다 오래 사용된 구조물이다. 건물이 촌스러워도 그게 우리의 과거였다. 그 청와대가 관광객의 탐방지가 아니고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확인하는 일상의 성지가 된다면 그건 경복궁을 넘는 가치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세대를 보면 그들이 만들 미래가 밝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일이다. 지난 5년 이 자리에서 독자를 만날 영광의 기회를 얻었던 것도 감사할 따름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2941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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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3. 11. 09“우리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다녔다. 나는 벤츠를 탄다. 우리 아들도 아마 벤츠를 탈 것이다. 그런데 우리 손자들은 다시 낙타를 타야 할 수도 있다.” 이 문장이 산유국의 위기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매장량 고갈이 되어서든 기후변화 환경정책 때문이든 석유 시대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이 전망에는 이견이 없다. 이런 위기감이 중동에 신기루 도시들을 만든다. 이들도 대안 전략으로 관광 도시 조성을 꺼내든다. 그러나 낙타 체험여행이 미래 관광상품이 될 수 없으니 사막에 물을 뿌려 골프장 만들고 유럽 프랜차이즈 미술관 세운다. 냉방 쾌적한 쇼핑센터와 분수 뿜는 호텔 포진한 대추야자 가로수 도시다. 방향이 어찌 되었든 이들은 백 년 뒤를 가늠하고 도시를 만드는 중이다. 20세기를 받쳐온 에너지가 석유였으니 그 마무리 여파도 전 세계적에 미칠 것이다. 산유국 아니라고 한국이 예외일 수 없다. 일단 조선산업의 수주목록에 결국 유조선이 사라지겠고 정유공장도 철거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도시 곳곳에 박힌 것들도 변화해야 할 것인데 그건 주유소다. 승용차가 희귀하던 시절에는 주유소도 특별했다. 대통령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대에 청와대도 아닌 주제에 무엄하게 청기와를 얹어 유명해진 주유소도 있었다. 당시 버스정류장 이름이 될 정도였으니 청기와주유소는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주유소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자동차가 일상재가 되면서 주유소 간 거리 제한도 풀렸다. 주유소가 도시에 숱하게 뿌려지면서 소매 유가를 놓고 주유소가 서로 경쟁하는 체제에 돌입했다. 그래서 휴지와 물통이 주유고객 사은품으로 등장했다. 주유소의 입지가 더 중요해졌는데 그게 좀 흥미롭다. 일반적인 소매점이라면 가장 선호하는 곳은 블록의 모서리다. 백화점은 투자규모가 크니 입지조건은 무조건 교차로 모서리다. 그래서 백화점 건물은 둥근 모서리와 그곳의 전망엘리베이터가 일반적 모습이다. 그런데 주유소는 입장이 좀 다르다. 승용차의 주행 원칙은 직진이다. 차선변경은 접촉사고 최고 빈발 원인이다. 그래서 초보운전자에게 최고난이도 주행이 바로 차선변경이다. 그런데 교차로 주유소에 들어서려면 우회전하려는 차량들과 차선변경으로 위치경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주유소 위치로는 교차로 모서리의 장점이 없다. 지도를 펴고 주유소 위치들을 짚으면 보인다. 마지막 주유소. 가끔 도로에서 만나는 최후통첩이다. 주유하고 가지 않으면 낭패를 보리라는 위협이기도 하다. 우리의 운전자들은 이 상황을 현장 전문용어로 ‘앵꼬’라고 한다. 그래서 다시 지도를 펴놓고 짚어보면 도시고속도로 진입 마지막 위치에 자리잡은 주유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청기와주유소도 김포공항 가는 길에서 당시 이름으로 제2한강교를 건너기 직전의 마지막 주유소였다. 비행기 탑승이 특권이던 시절에 다리 너머는 허허벌판이라 청기와주유소는 위치와 형식이 걸맞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기민한 주유소가 다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분명 자동차들이기는 한데 이미 밤새 충전하고 나왔다는 차들이 무심히 주유소를 지나친다. 주유소의 미래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실제로 주유소는 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요인이 복잡하고 흥미롭다. 카페와 치킨점을 비롯한 소매점들에 키오스크라는 것이 등장했다. 최저임금이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손님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한 풍경이다. 주문받던 알바생들의 최저임금을 분식점에서 버티기 어려웠는데 주유소인들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주유소 역시 손님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했고 그걸 셀프주유소라 호칭한다. 그러나 주유소의 상황은 소매점과 좀 달랐다. 이전의 주유소에서는 운전자가 차창을 내리고 ‘만땅!’이라고 외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손님이 차문 열고 내려서 카드 넣고 버튼 누르고 주유구 열고 기다리다가 다시 주유기 걸고 영수증 챙겨야 한다. 자본주의의 민첩한 메커니즘이 차에서 내린 이 운전자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이들을 커피·빵으로 유혹하고 잊었던 물휴지·담배 사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주유소의 업종 이종교배에 따른 진화가 시작된 것이다. 대추 한 알에도 태풍·천둥·번개 몇 개가 들어있다더라. 대추야자 뿌리도 모래 속에서 치열하다. 주유소 하나에도 세계사 전개, 국제정세 변화, 소비자 행태가 다 간섭한다. 당연히 편의점·커피점·분식점도 다 그렇게 민감하고 탄력적이다. 거기 모두 식구들의 생존이 매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여 작동하는 구조체를 도시라 부른다. 그래서 도시는 거대한 유기체다. 그런 도시를 이리 자르고 저리 붙이겠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불거지는 걸 보니 또 선거철이 된 모양이다. 도시를 투표지에 찍을 붓두껍 인장 개수로 계량하는 순간 시민들은 갈등으로 부대낀다. 도시에 담긴 인생들을 기껏해야 대추알처럼 빨간색, 파란색으로 나눠 세겠다는 정치에 무슨 미래가 있겠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5910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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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점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3. 10. 12동,대,문,역,사,문,화,공,원. 무슨 역이름이 이렇게나 기냐. 무려 아홉 자다. 그런데 수사어가 길면 뭔가 의심스럽다. 이것도 피해의식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가보면 별 역사, 공원 없다. 있는 건 동대문인데 그건 동대문역에 선점되었다. 게다가 이 역의 행정구역은 동대문구가 아닌 중구다. 참고로 동대문은 동대문구에 한 뼘도 안 걸친 채 종로구에 있다. 남는 건 문화다. 그나마 근처에 디디피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문화행사가 벌어지는 곳. 이 건물이 준공되자 여기저기서 평가가 무성했다. 한마디 하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존재감이 너무나 육중했기 때문이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저 거대한 금속성 비정형 물체. 미증유의 건축적 걸작이라는 호평과 안드로메다에서 왔다가 불시착한 미확인 비행물체냐는 혹평 사이에 평가의 스펙트럼이 이루어졌다. 형태 문제의 비난은 대체로 부당했다. 왜 그런 괴상한 건물을 만들었냐는 건 건축가가 받을 힐난은 아니었다. 중국집 주방장은 짜장면을 만든다. 이미 그런 모양의 건물로 알려진 건축가를 초대하고는 접시 위의 식사가 돈가스가 아니라고 타박하면 곤란하다. 형태가 하도 독특하여 주변 도시맥락과 안 어울린다는 비난도 부당했다. 원래 서울은 뒤죽박죽 도시경관을 갖고 있어서 맞춰야 할 도시맥락은 찾기가 좀 어렵다. 특히 건물 형태의 무정부적 자유분방함에서 바로 여기, 동대문 근처가 예외가 아니다. 뭘 갖다 놔도 안 어울리고 그래서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등장했다. 이 거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주변 상권이 시름시름 쇠락해간다는 점이었다. 분명 지하철 3개 노선 환승역에 방문 유동인구가 저리 많은데 도대체 어떤 연유일까. 짚어보려면 과거를 들춰봐야 한다. 역이름이 담담하게 동대문운동장이던 시절, 주변을 지탱하고 있던 상권은 체육 상업시설들이었다. 권투글러브, 볼링공, 축구화에 챔피언 트로피를 장만하려면 이 근방 상가를 방문하면 됐다. 모두 동대문운동장의 영향력이니 이렇게 유동인구를 모아주는 시설을 상권의 거점이라고 한다. 상업 부동산개발에서는 영어를 써서 앵커라고 부른다. 이런 앵커의 배치는 상가개발의 기본 조건이다. 지난 시절 복합상가의 최고 앵커 업종은 영화관이었다. 영화관만으로 부족한 대규모 시설에는 수족관, 서점, 전망대 등이 추가됐다. 영화가 입장객 방문 시점에 맞춰 시작되지 않는다. 입장객은 남는 시간에 아이스크림 사 먹으며 배회하다 팝콘 사서 영화 보고 저녁 먹고 귀가했다. 그래서 상권이 유지되었다. 아파트 거실 벽면의 티비 크기가 거대해지기 전까지는. 서울의 코엑스에는 이상하고 거대한 책공간이 자리잡았다. 도서관이라 자칭하기는 하나 이곳은 도서관도 카페도 아니다. 정말 안드로메다에서 왔는지 별마당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수익시설이 아니다. 뚜렷한 것은 유동인구를 끌어모으는 앵커라는 점이다. 모나리자가 루브르박물관의 앵커고, 루브르박물관이 파리의 앵커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방문객을 모아서 주변에 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 상권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디디피는 거대시설인 것은 맞는데 거점시설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운영구도다. 이런 거대한 문화시설을 건립까지만 하고 운영에는 예산을 추가 지원하지 않겠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이 시설들이 선택하는 방식은 자체 생존이다. 그러려면 방문객들의 소비가 외부로 새지 않도록 내부에 소매점을 확보해야 한다. 결국 거점시설이 주변 상가와 경쟁하게 된다. 디디피는 내부에 훌륭한 상가를 갖추고 있으니 방문객이 굳이 주변 도시를 배회할 필요가 없다. 디디피에서 중요한 문제는 형태가 아니고 건물이 도시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여기부터는 건축적 해결의 문제다. 이 건물은 도시에 대해 철저히 배타적이다. 건물 외부에는 창도 진열장도 없다. 방문객은 무조건 내부로 입장해서 외부를 잊어야 한다. 양변에 건물들의 진열장이 도열한 도로를 가로라고 부른다. 도시의 길은 가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디디피 주변의 외부공간은 가로도 공원도 아니다. 미술관, 박물관, 음악당이라는 문화시설이 전국 곳곳에 세워진다. 그런데 건설사업까지만 진행하고 지원을 끊으니 시설 생존을 위해 건물 내부에 식음료 시설 포함한 쇼핑센터 조성해야 한다. 새 건물의 현대적 상업시설은 투자예산 규모가 다르니 이미 쇠락한 인근 풀뿌리 상권이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원도심 살아나고 세수도 늘어나라고 만들었는데 엉뚱하게 주차수요만 늘어난다. 도시는 여전히, 더욱 쇠락해간다. 고속버스터미널도 고터로 줄여 부르는 세대의 시대다. 그러고 보니 디디피, 이 이름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줄인 것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이 유장한 지하철역 이름은 시대를 잘못 읽고 있는 듯하다. 디디피는 도시를 잘못 읽고 있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8725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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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판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3. 09. 14거, 표현 한번 쫄깃하다, 순살아파트. 그런데 건물에서 전혀 뼈가 없을 리는 없고 갈비뼈 하나가 빠졌다. 그래서 과장표현이기는 하다. 물론 건물 구조체는 전체가 묶여 작동한다. 그래서 빠진 뼈 하나가 전체 안전을 위협한다. 순살아파트 소동은 국민들의 건축지식을 확연히 증가시키는 순기능도 했다. 건축학과 학생들에게 설명하려 해도 어려운 무량판구조가 국민상식이 되었다. 문제라면 무량판구조가 억울하게 기피구조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량판구조가 인격체라면 인격모독으로 분쟁을 벌일 일이다. 또다시 대한민국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조사대상 무량판구조 아파트의 명단이 공개되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들의 위치를 검색하면 공통점이 보인다. 일사불란하게 반듯한 기하학적 모양 필지에 얹혀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신도시거나 신규택지개발지구라는 걸 의미한다. 논밭이나 임야가 도시로 바뀐 것이다. 무량판구조 시비에 앞서야 할 질문은 왜 여기에 아파트를 짓게 되었냐는 것이다. 한국의 인구는 한 세대마다 반 토막도 아닌 반의 반 토막이 될 거라고 추측한다. 거기 더해 찬바람이 불면 들리는 단어가 ‘인서울’이다. 대학입학의 순간에 청년인구가 대거 수도권으로 이주한다. 이들이 졸업 후 귀향하지 않는다. 결국 지방중소도시 소멸론은 초등학교 산술로도 설명된다. 그런데 그런 위기도시 주변에도 부지런히 신도시를 만든다. 인구가 토막토막 줄어간다는 도시 옆에 신도시는 왜 더 필요할까. 국토의 합리적 이용방침이 아니라 개발주체들의 생존에 사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기업 사기업이 섞여있는 그 공급시장에서 가장 큰 회사는 LH다. 직원 수가 만 명에 이르는 공기업은 사장과 경영진이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그냥 굴러갈 따름이고 거기에는 계속 굴러가기 위한 사업이 필요하다. 사업 단계마다 담당부서가 달라지니 절차는 복잡하여 누구도 전체구도를 모른다. 내부에서도 헛갈리는데 외부에서는 더욱 알 길이 없으니 사업에 끼어들려면 그나마 내부경험자가 필요해진다. 전관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소득증가 따라 서비스 수준 높은 주거 수요가 있고 이 수요에 기대 표를 얻는 정치도 있다. 새 아파트 들어선 신도시를 지으면 분양과 입주는 순조로왔다. 남는 문제는 택지다. 기존 시가지에 비해 싸게 사고 쉽게 지을 수 있는 논밭과 임야가 신도시가 된다. 그런데 토지는 생산할 수도, 소비할 수도 없다. 전체규모는 일정하고 점유와 이용방식만 달라진다. 제한된 국토 면적 안에 신도시가 여기저기 점유면적을 늘렸다. 신도시를 채울 인구들이 어디서 오냐고 물으면 답은 그간 항상 낙관적이었다. 인근 도시에서 인구 유입. 지금 소멸론에 시달리는 그 도시들이다. 인구감소율보다 더 바쁘게 원도심들은 쇠락했다. 도시재생 논의도 수입되었다. 인구는 주는데 신도시도 채우고 원도심도 살려내려면 마법분신술이 필요하다. 마법 능력 없이 원도심과 신도시를 다 살리겠다는 건 산술실력 부족이거나 거짓말이다. 국토는 좁은데 산지가 많아 가용면적은 더 좁다고 우리 교과서는 서술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국에 다 똑같은 신도시를 널널한 미국식 도시계획 따라 만들었고 필요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들처럼 사용해왔다. 각 세대의 승용차 소유를 전제하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는 도시다. 그런 신도시가 받쳐주는 내수시장 덕에 자동차 제조산업은 성장했지만 보행과 대중교통에 기반한 원도심이 몰락했다. 신도시를 만들면 기존 도시들과 연결될 교통망도 추가로 필요해진다. 국토는 더욱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이고 더 많은 화석연료 불살라야 작동한다. 신도시 뒤에는 쓰다 버린 원도심이 남는다. 도시가 공산품이라면 용도폐기 후 종량제봉투에 담아 던질 수도 있다. 그런데 토지도 도시도 공산품이 아니다. 쓰고 버린 도시는 담을 종량제봉투도 없다. 우리는 1980년대에 만든 아파트들도 헐고 새로 짓기 시작했다. 이들은 벽 하나만 움직여도 전체가 붕괴되는 구조체로 지었기 때문이다. 통칭 30평형대 아파트 한 가구를 철거해서 콘크리트 순살만 추려 담으면 10리터 종량제봉투 5천 개 정도가 필요하다. 1천 가구 단지면 5백만 개다. 마감재와 부속가구는 별도다. 그만큼의 석회암산과 강모래를 파헤쳐 생산과정의 석유를 탄소로 바꾼 후 결국 폐기물로 버린다. 신규 소비억제가 아니라면 최고의 재활용 방안이 필요하다. 사회조건 바뀌어도 아파트 구조손상 없이 리모델링이 가능한 구조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무량판구조가 선택되었다. 지탄받을 건 무량판구조가 아니라 갈비뼈 누락이다. 쓰레기 양산하는 도시와 건물의 구조라면 시민들의 재활용 계몽은 덧없다. 우리는 더 작은 국토 면적을 점유하고, 대중교통이 전제된 도시를 만들고, 유연하게 변화에 대응 작동하는 건물을 지어 살아야 한다. 그래서 무량판구조는 계속되어야 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2345#home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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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3. 08. 17해충·탈수·화장실. 아이들이 머무는 동안 한국을 달궜던 단어들이다. 한국은 외국인에 대한 경계와 환대가 극심하게 교차한다. 스카우트 방문객들은 그냥 아이들이 아니었다. 거친 자연환경의 체험이 목적이라지만 한국에서는 모셔야 할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잼버리는 사소한 이벤트였다. 질문은 왜 새만금에 잼버리를 개최했느냐는 것이다. 그걸 캐묻다 보면 결국 새만금은 무엇이고 왜 필요했느냐는 질문에 이르게 된다. 그 문제를 만든 것은 여전한 그것, 정치였다. 공약. 그 목적은 실천이 아니고 당선이다. 짜릿하게 파고들어 화끈하게 승리하면 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이게 심사숙고의 결과물일 리가 없다. 새만금·행정수도·한반도대운하.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토건공약 세 개를 꼽으면 이 이름들이 등장한다. 규모가 너무 커서 조성 성패 예측이 불가능한 사업들이다. 그래서 이런 초대형 토건공약은 제시하는 게 아니고 내지르는 것이었다. 아니면 말고의 주술적 신념으로 밀고 나갈 뿐이다. 당선. 3대 토건공약은 모두 큰 공헌을 했다. 불행은 당선이 아니고 이행 요구다. 새만금과 행정수도는 약세 지역 득표 공약이었다. 지역 입장에서는 자체예산 쓰지 않는 수혜 사업이라 거부할 이유가 없다. 소외와 차별 집단의 유일한 힘은 단결과 결속이다. 그래서 당선은 결국 공약이행 요구라는 불퇴전의 맞수를 만나게 된다. 비교하자면 한반도대운하는 전 국토 공약이었다. 반도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고 종단하는 운하라는 점에서 엽기적 공약이었다. 그런데 이건 공약 시행을 요구할 이해 결속 지역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슬금슬금 바뀌어 사대강정비사업이 되었다. 공약 이행. 내가 번 돈을 쓰는 게 아닌데 정치인이 불신 비난 감수하며 공약을 번복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사업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들은 규모에 맞는 장기 사업이라 누구에게도 마무리 책임이 없다. 남는 문제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해결하리라 믿으면 된다. 진퇴양난과 대안부재. 새만금에 신기루같이 다양하고 화려한 조감도들이 시대 따라 그려지고 나부끼다 맥없이 지워졌다. 그간 책임소재도 없어졌고 진행도 방치도 해결 대안이 아니었다. 점점 사업이 정체 수렁에 빠져들었다. 각성제 같은 동력원이 새로 필요해졌고 잼버리라는 일회성 이벤트가 등장했다. 대상지가 오지에 평지이니 수만 명 야영에 적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잼버리를 통해 헛된 공약의 아물지 않는 상처를 선명히 목격한 것이다. 해결된 것은 없다. 새만금을 결국 어떤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느냐는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험지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야영장으로도 쓸 수 없는 흉지라는 이미지만 덧붙었을 뿐이다. 열망표현과 의지과시. 부안 읍내에 잼버리 유치기원의 현수막이 나붙던 시절이 있었다. 곧 그 현수막은 잼버리 유치확정 경축으로 문구를 바꿨다. 현수막은 새만금 공약 이행 요구부터 내내 글자만 바뀌며 나부끼던 도구였다. 지금 대한민국의 풍경을 규정하는 가장 익숙한 모습, 그것이 요지마다 나붙는 현수막들이다. 새만금과 현수막. 공통점 없어 보이는 이 둘을 이어보면 일관된 가치관이 드러난다. 국토 공간을 적당히 쓰고 버릴 일회용품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새만금과 현수막의 사이에는 그런 국토관의 사업들이 도열해 있다. 생명원이라는 강에 설치하는 보도 정당과 그 신념 따라 건설과 폐기가 오갔다. 원자력발전 사업도 삼겹살인지 취향 따라 뒤집히고 뒤집혔다. 실패사업의 사례가 곳곳에 버젓한데 손바닥만 한 나라에서 공항을 더 못 만들어 안달들이다. 판단의 근거는 여전히 주술적 신념일 뿐이다. 내 돈 들지 않는 사업들이다. 이 사회가 새만금에서 배운 것이 여전히 아무것도 없더라는 증언들이다. 도박. 십만 원짜리 현수막으로 내지르는 소리로 당선도 되고, 수천억 원 국비 사업도 받아온다면 이건 눈앞의 잭팟이다. 바로 국토가 현수막값만 판돈으로 내면 낄 수 있는 도박장이다. 모두 뛰어들어야 한다. 실패하면 반성이 아닌 비난으로 모면하면 된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국가가 내일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내일을 망가뜨리는 모습이 한번 쓰고 버릴 천조각에 실려 나부낀다. 문제를 더해 만드는 그것, 여전히 한국 정치다. 정당마다 현수막에 괴담·성토·의혹의 아우성을 내지르니 전 도시가 오방색 아수라장이다. 현타. 현실인식타임이라는 걸 요즘 아이들이 줄여 부르는 단어다. 잼버리는 새만금에 옥토·산업·미래도시의 환상 아닌 해충·탈수·화장실의 현타를 남겨주었다. 잼버리 예산은 전북대학생 전학년 전액장학금 2년 치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렇게 모셔온 아이들은 각목·노끈·헝겊이 덕지덕지한 도시풍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들을 다시 모아 대한민국의 인상적 풍광을 묻는다면 답변은 이럴 것이다. 현수막이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5255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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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의식 없는 건축 / TROPICAL SPACE - H&P Architects / 서울대-목천강연02 / 2023. 07부채의식 없는 건축 "우리는 다 이겼다." 베트남 역사박물관의 현대사 전시가 내려주는 결론은 이 문장으로 요약될 것이다. 베트남은 유독 긴 해안선으로 바다에 접하고 벼농사 삼모작이 가능하다. 기아와 궁핍이 오히려 이상한 나라다. 이런 땅을 제국주의가 그냥 두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과연 현대사 속의 베트남은 온갖 굴곡으로 빼곡하다. 그러나 결국 결론은 명료했다. "우리는 다 이겼다." 그런데 진정 중요한 것은 저 문장에 수식어가 따로 붙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다 이겼다." 박물관의 전시 방식과 전시물의 수준을 따져 묻기 시작한다면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허술해보이는 사진들의 조합이어도 담고 있는 역사적 현실들은 옹골차기 그지없는 선언문이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다 이겼다. 역사에 부채의식이 없다는 선언문이다. 비교가 필요하다.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자부심을 내세우는 정치체제가 한반도의 북쪽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소련과 중국 없이 자생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도시와 건축형식이 동유럽의 어디에서 수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길은 없다. 그리고 주체적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이 여전히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명료한 현실이다. 이제 남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조선시대의 최대규모 전쟁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내전도 외부의 힘으로 간신히 마쳤다. 승패를 따질 일도 아니었다. 그 결과는 압도적 정치 종속이었고 일방적 문화수입이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뒤적이면 20세기의 전반에는 일본의 영향이 가득하다. 후반에는 그 자리를 미국이 대체하고 있다. 역시 부인할 길이 없는 사실이다. 미국의 압도적 정치·문화 영향력은 현재진행형이다. 건축도 예외는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형형이다. 베트남의 새로운 건축가들과 그들의 건물들을 처음 만났을 때 당황스러웠던 것은 해석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축 이해의 계보 어디에도 맞춰지지 않았다. 거기에 당연히 H&P Architects의 건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해석의 단서를 찾은 것은 박물관의 현대사를 만난 이후였다. 그래서 이들의 건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되겠다. 부채의식이 없는 건축. ‘우리 힘으로’ 다 이긴 국가의 문화적 유산이라고 나는 해석하려고 한다. 동굴형 건축과 풍선형 건축. 기후 조건에 따른 나의 건축 이분법이다. 단열 필요 없이 외기순환으로 실내 기후조정이 가능하다면 나는 동굴형 건축이라 간주한다. 이에 비해 빈틈없이 단열하고 외기순환 차단해야 한다면 풍선형 건축이라 부른다. 동굴형 건축은 단일재료 벽체 조성이 가능하고 그런 만큼 건축 형태 구현의 자유도가 높다. 나는 베트남 건축이 동굴형 건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해였다. 당연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한국도 지금의 도시는 풍선형 건축으로 가득하지만 이전 시대에는 모두 동굴형 건축이었다. 베트남은 기후상 열대에 해당한다. 소위 선진국 기준이라면 건물 전체에 에어컨을 설치했을 것이고 풍선형 건물이 도시에 빼곡해야 한다. 그러나 이 베트남의 건축가들이 선택한 길은 동굴형이었다. 그것은 당연하게 주어진 기후적 기회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선택한 도전이었다. 건물 내 기후 조절을 위해 적극적인 자연환기가 대안이니 이 방법이 H&P Architects의 건축형태를 규정하는 가장 뚜렷한 변수다. 재료 역시 가장 노동집약적 재료인 벽돌, 주변에 널려있는 대나무다. 그걸 굳이 자연재료라고 부르고 환경친화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의 작업은 굳이 그런 미사여구로 표현할 필요 없다. 주어진 문제를 풀어내는 가장 직설적 제안, 선입견 없이 문제를 향해 직진한 결론, 외부에서 수입된 문화적 부채의식 없는 건축. 이들의 건축을 설명하려는 내 문장이다. 건물 몇 개 방문하고 H&P Architects의 작업을 재단하는 건 무의미하겠다. 심지어 이들은 아직도 진화 중이니 그 미래를 섣불리 예단할 길도 없다. 물론 모든 베트남의 건축이 유럽과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결국 다 이겼어도 존재하던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베트남 대학의 건축학과를 방문했을 때 놀라웠던 점은 그들 역시 벽 여기저기에 르꼬르비제를 그려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관찰자의 시선에서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H&P Architects는 존재하지 않는 서양의 부채를 스스로 짊어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니 그 결과가 그들의 건물로 표현되어 있다. 20세기 후반 ‘지역적 건축(vernacular architecture)’라는 단어가 유행했을 때 저 단어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이었고 역시 굳건한 제국주의 시대의 논법이었다. H&P Architects의 건물을 변방 지역의 특수해로 갈래짓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건축의 길을 보여준다는 표현이 훨씬 더 적확하다. 다른 세상에서 뭐라 부르든 그들은 진정 부채의식 없는 건물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이들이 지닌 건축적 힘이다. 새로운 세기에는 지난 이백 년 남짓 이어온 유럽과 미국 중심의 사고가 더 이상 유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 점점 더 확연해 보인다. 자신들의 힘으로 다 이겨낸 나라의 건축, H&P Architects의 미래가 더욱 궁금해진다.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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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2024. 05. 07이번 학기 설계스튜디오 강사진에 새로 합류하게된 정항수 소장님. 모범적으로 <도시논객>을 들고 오셔서 사인 요청. 이전 책도 잘 읽었다는 덕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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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 24. 04. 26학부생 스튜디오의 현장 답사. 대통령이 있다는 용산만 간 게 아니고 성수동, 광화문도. 각자 정한 땅에 졸업설계 물건을 얹어놓는 게 남은 숙제.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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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 2024. 04. 22파리 라빌레트 건축대학에 유학 중인 류한승군 방문. 프랑스에 살더니 과연 블링블링 프랑스 스타일의 분위기. 프랑스의 시골건축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소식.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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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 2024. 03. 21오랜만에 '연주'대에 오른 박'연주' 양과 몇 명. 맨날 노는 것 같지만 다들 할 일은 하고 노는 중. 그래서 연두대 이후에는 샤로수길로.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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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 / 2024. 03. 19카네기멜론 대학으로 유학가는 황준선군. 특별하게 수학을 잘해서 전혀 다른 건축의 모습을 공부할 예정. 곧 결혼도 하기로 했으니 이제 공부만 남은 셈.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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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 2024. 02. 26공식 명칭은 학위수여식. 축사를 해주시기 위해 이화여대 강미선 교수님, 우리공간건축사사무소 박성준 소장님께서 방문. 졸업생들보다 40년 가까이 선배들이지만 마음은 청춘.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