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57 추천 수 0 2017.11.06 21:10:19

[중앙선데이, 2017. 11. 05] 훈민정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고스톱 판에서 이게 무슨 자세야. 어느 정도 쓸 만한 패면 뛰어들어 따고 잃고 역전극을 펼쳐야 고스톱이지. 그런데 이 늙은이는 죽기로 작정을 했더라고. 그래서 내가 알아듣게 몇 마디 해줬어. 이런 패인들 어떠하리 저런 패인들 어떠하리. 그런데도 끝까지 죽겠다고 버티는 거야. 울화통이 터졌지. 결국 고스톱 끝나고 손을 좀 봐줬어. 아침에 차 세워 뒀던 자리가 선죽교 아래 둔치 주차장이었거든. 거기서 트렁크에 실어뒀던 몽둥이를 들고 위협만 했어. 맹세코 더 이상은 모른다고.


내가 여기 끼어든 건 오로지 아버지 회사 때문이지. 아버지는 유학 후 학위 마치시고는 개성제약에 취업하셨어. 그러다 임원승진에서 밀려서 사직하고 제약회사를 창업하셨지. 그런데 기대수명이 높아지니까 약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게 보이더래. 회사를 키워야지. 그래서 개성제약을 다시 들여다보시게 된 거야. 바이오기술 축적된 게 있어서 신약개발로 대박이 날 거 같더래. 그런데 맨날 쌍화탕만 달이고 있던 거지. 그래서 고려제약을 인수합병 하기로 한 거야.


나는 재무재표 같은 거 몰라. 듣기로는 상태가 나쁜 건 아니라는데 경영은 정말 한심하기로 유명했어. 소유자는 창업자의 31대손. 부인이 먼저 세상 떠났는데 영정사진 앞에 향불 켜놓고 눈물 짜느라 회사에 관심이 없어. 무능인지 초월인지 모를 지경이지.


이 회사 영업전무와 경영전무가 소유자의 귀를 잡고 있는 키멤버였어. 노회한 이 둘을 포섭하는 게 내 임무였지. 내 나이가 까마득하게 아래잖아. 명함에 기획부장이라고 써놓으면 뭐해. 이 회사에 가면 겨우 대리 과장 수준이니 엄청 불편한 거야. 그래도 어쩌겠어.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게 내 인생관이야.


먼저 영업전무부터. 그 시절도 떳떳하게 골프를 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어. 약속한 둔치 주차장에 집결해서 내 차에 골프백 네 개를 싣고 골프장에 도착했지. 이 영업전무의 이름은 묻지 마. 그냥 촌스럽더라고만 알아둬. 그런데 이 양반이 역시 골프장에서 더 촌스런 가명을 써넣더군. 포은.


내 이름을 잠깐 설명해야지. 나를 낳았을 때는 우리 아버지는 아직 유학생이었어. 그때 기혼자 기숙사 1층 끝 방에 사셔서 방 번호가 1. 그래서 내 영어 이름은 룸원이야. 한글 이름은 방원. 방일이 될 수도 있었겠지. 골프장에서는 물론 나도 가명을 써. 태종. 나머지 두 사람은 공무원들이었어. 더 이상 물으면 피차 곤란해지는 건 알고 있으리라 믿어.


목적이 인수합병인지라 그냥 공만 치고 해산할 일은 아니었지. 적당히 알콜 섭취하고 뿌연 담배연기 배출하면서 돈 좀 잃어주는 게 내 임무였어. 그런데 내가 승부사 기질 타고난 게 문제지. 손에 패만 쥐면 적당히 분위기 맞출 생각이 딱 사라진다구. 그래서 결국 일이 벌어진 거였어.


다음은 경영전무. 나름 외국물 좀 먹었던 모양이야. 명함을 받았는데 빠다 냄새가 화끈하게 나더라고. 분명 한국 이름이 아닌데 그냥 한글로 써놓았어. 촬스 영. 철수도 찰스도 아니고 촬스야. 그런데 막상 앞뒤가 더 꽉 막힌 인물이었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경영전무가 책상 뒤에 써 붙인 문구야. 나는 석재가공회사 임원방인 줄 알았어. 어이가 없었지. 어쩌겠어. 말이 안 통하면 말을 못하게 해줘야지.


결국 인수합병 했어. 신문에는 새우가 고래 먹었다고 났어. 쌍화탕 만들던 회사 개성제약은 우아하게 모닝캄파머시로 바뀐 거구. 내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회장까지 한 건 다 알거야. 세간에는 내가 다혈질에 물불 안 가리는 저돌적 인격체로 알려져 있지. 부정하지 않겠어. 트렁크에 야구방망이 넣고 다니는 인간이면 내 앞으로 차선 변경하는 애들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 거 아냐.


그래도 경영자는 실적으로 말하는 거야. 내가 제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셋째 아들에게 경영권 넘겨준 거지. 내가 없었다고 생각해봐. 그럼 내 아들도 없었고 내 아들이 아니었으면 모닝캄파머시는 오래 전에 도산해서 사라졌을 거야. 내가 아들에 대해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경영문제는 아냐. 사실 내 아들이 문화사업도 많이 했지. 뭔지 다 설명하지는 않을 텐데, 알고들 있을 거야. 지금 눈앞의 이 글자들 읽으면서 뼈저리게 느끼지? 모르겠어? 어휴, 또 울화통 터지려고 하네.


http://news.joins.com/article/22083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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