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을 걷다

기타원고 조회 수 3413 추천 수 0 2014.08.25 14:31:46

[사람의 가치 / 건축저널리스트 최연숙의 글모음] 

 

세상을 떠난 건축저널리스트 최연숙을 그리는 책에 쓴 원고. 2012년에 쓴 글이 이제 출간. 


gwanghwamoon-walk.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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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걷다

 

이것은 어떤 행동을 서술하는 문장이 아니다. 건축 프로젝트의 제목이었다. 네 개 대학교의 대학원생들이 진행한 건축 프로젝트를 한데 묶어서 부른 이름이 바로 이것이었다. <광화문을 걷다>.


2002년의 여름은 월드컵개최와 본선 4강진출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한국 전체가 들끓던 시기였다. 별로 심심할 틈이 주어지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도 이건 좀처럼 진정이 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터득한 세대의 등장을 과시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회적으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분석도 필요했고 다음 행보가 어찌되어야 하는지도 살펴야 했다.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건축도 의외로 자유롭지 않았다. 이유는 그 열기를 담던 공간이 바로 도시였기 때문이다.


2003년의 여름 언저리에 건축저널인 <건축문화>의 최연숙 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취재자와 취재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로는 별로 만나본 적이 없고, 심심할 때 맥주집에서 만나 쓸데 없는 수다를 안주로 신체와 지갑을 축내던 사이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국민대학교의 장윤규 교수도 항상 함께 있었다.


최연숙 팀장은 여전히 즐겁게 놀 이벤트를 하나 장만하는 중이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네 개 건축전문대학원에서 광화문 앞을 주제로한 공동프로젝트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네 학교는 건국대학교, 경기대학교, 경희대학교, 그리고 한양대학교였다.


내가 전화를 받은 이유가 있었다. 외부에 내건 이유로는 여기에 연관이 있는 한양대학교 교수라는 것이었고 내부에 있는 이유는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술친구라는 것이었겠다. 그러나 나름 다른 근거도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시청앞 광장 현상공모에서 <빛의 광장>이라는 걸 제출하여 덜컥 당선이 되어있던 터였다. 이게 되느니 안되느니 말이 한참 많던 상황이어서 신문, 잡지, 방송에 몇 번 불려나간 일이 있으니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는 주제에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을 것이다.


서울시청앞은 어찌되었건 광장으로 바뀔 것이니 이제 좀더 중요한 공간인 광화문 앞을 갖고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 최연숙씨의 의도였다. 나는 당연히 동의했다. 여기에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내 입장에서도 나름 사연이 있었다.


1999년은 문화부에서 지정한 건축문화의 해였다. 워낙 시의적절하게 뭔가 이벤트를 계속 생산해내야 하는 일간지에서 이 이상한 문화의 해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고 여파는 내게도 밀려왔다. 서울의 길과 공간에 관해 동아일보에 연재를 하게 된 것이다. 일간지의 연재는 시작하는 시점은 있어도 마무리하는 시점은 정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독자의 반응에 따라 연재기간의 신축이 아침드라마의 방영횟수에 뒤지지 않을 정도다. 이미 쓰기로 작심한 것,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첫 주제가 중요했고 나는 첫 공간으로 광화문 앞, 세종로를 짚었다.


노련한 신문사 기자의 조언에 따라 종로가 연재 첫 회에 나가고 세종로가 두 번째 공간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내게 중요한 공간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제안도 아니지만 이곳이 자동차의 공간에서 사람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광화문 앞이 인간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대학교 졸업설계 주제로 가끔 등장하던 것이었으니 내가 첫 제안자라고 주장할 일도 없고, 첫 주장자의 의미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간지 한 면에 나오는 컬럼에서 나는 세종로에서 서태지 사인회도 개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시로서는 아무도 현실적이라고 동의하지 않는 주장을 내걸었다.


학교로 자리를 옮긴 나는 이번에는 한국의 소위 문화적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같은 주장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었다. 광화문 앞을 보행자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은 이후 내가 장비 헌칼 휘두르듯 아무데서나 꺼내놓는 안건이 되었다.


나는 당연히 이 주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다음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를 맡을 계획은 없었다. 결국 당시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튜디오를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께 의사를 타진했다. 몇 해째 시골 읍내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은 이 서울 복판 프로젝트 진행에 흔쾌히 동의를 해주셨다. 당시 경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장윤규 선생 역시 싫다고 뺄 상황이 아니었다. 건국대학교의 제갈엽 선생, 경희대학교의 김찬중 선생께서 모두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꾸려졌다.


팀이 꾸려졌으므로 나는 여기서 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이 구도에 대해 전혀 불만도 아쉬움도 없었지만 최연숙씨는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측은하게 느껴졌는지 코디네이터의 간판을 걸어주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속 편한 코디네이터였다.


스튜디오는 광화문에서 마무리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네 학교의 작업을 전시하고 간단한 심포지움을 가졌다. 그런데 이 심포지움의 주제가 바로 옆 광화문이었으므로 사전 길놀이가 필요했다. 아직 자동차가 씽씽 내달리는 광화문를 실제로 걷기로 했다.


오후 1시에 광화문 앞에서 네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이 모였다. 소집의 일관성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저런 게스트들도 있었다. 장윤규 선생이 특유의 굵직한 필체로 그은 그림을 인쇄한 티셔츠들을 모두 나눠 입었다. 웅성웅성 모인 수십 명의 학생들은 세종로의 서쪽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사박물관이 그 방향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래야 했지만 문제는 시작하는 지점에 정부중앙청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항상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관찰하는 그 건물.


권위주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해도 관공서의 예민한 반응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이 그 앞을 지나면서 지레 더 민감하게 웅크러들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생의 상당부분을 뭔가에 대드는데 사용한 몇 분이 게스트로 참여하고 계셨다. 이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청부청사 앞에서 드러눕고 놀면서 시대가 바뀌었음을 경찰들에게 과시하셨다. 경찰들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 괴상한 집단의 등장과 행진에 대놓고 말은 못해도 꽤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확연했다.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좀 이상해 보이기는 했을지라도 결국 아무런 민폐도, 관폐도 끼치지 않고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심포지움도,  뒤풀이도 끝났다.


나는 광화문 앞이 보행자의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광장이 차도로 나뉘어있다고, 광장의 축이 비틀력 있다고 이야기들을 해도 나는 여전히 이 공간이 기쁘기만 할 따름이다. 다른 문제는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곳이 보행자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역할을 하였고 <광화문을 걷다>라는 이벤트도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최연숙씨의 역할도 거기 묻혀 있다고 믿는다.


내가 최연숙씨를 처음 만난 것이 1996년의 여름이었다. 광복절을 앞 뒤로 한 무더운 여름의 폐교였다. 민족이라는 단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는 지금이지만 당시에는 당당하게 <민족건축인협의회>라는 이름을 내건 집단이 있었고 이 <민건협>이라는 곳에서 주최한 여름건축학교에 학생들과 놀아주는 튜터로 초대가 된 것이다. 당시 월간 <플러스> 기자였던 최연숙씨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인상을 설명하자면 월간지 기자로는 드물게 아직도 뱃심좋게 부산 억양을 고수하고 있는  아가씨였다


하여간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이후로 한국 건축계의 현실과 미래에 관심과 걱정이 많은 건축월간지 기자와 그런데는 도대체 아무 관심이 없던 건축가인 나, 그리고 좀 더 관심이 없던 또 다른 건축가 장윤규는 대학로 비어할레에서 만나서 공통분모와 별 안주가 없어도 즐겁게 떠들고 노는 술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좀 흘러 나는 한양대학교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최연숙씨는 또 다른 월간지인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에서 나는 건축과에서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학기말의 크리틱이 갑자기 심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자를 초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크리틱이 끝나면 뒤풀이도 중요하므로 나는 대학로를 염두에 두고 간단하게 술친구들을 불렀다. 속으로는 술친구지만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건축가와 기자 초대라는 이런 구도가 별로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세상의 구도가 익숙치 않았던 나는 벽에 붙인 일정공고에서 최연숙씨의 이름 옆에 ‘<공간> 편집장이라고 써넣었다. 지금은 그 막중한 차이를 이해하지만 당시 내게는 기자나 편집장이나 다 기사 쓰는 사람들이었고 실제 편집장이 아니라면 내가 하루만 편집장에 임명해주면 되는 사안이었다. 당일 크리틱이 끝나고 옮긴 술자리의 안주는 바로 이 편집장사칭으로 본인이 얼마나 사내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의 성토였다. 모든 죄는 내게 있었다. 최연숙씨는 곧 <건축문화>로 자리를 옮겼고 그 여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광화문을 걷자고.


시간이 한참 지났고 나는 국민대학교로 역시 자리를 옮긴 술친구로부터 최연숙씨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수술 후의 병원에서 여전히 부산억양으로 자기 병을 문병 온 남 이야기하듯 하는 환자의 문병을 했다. 그리고 또 한참 뒤 우리는 최연숙씨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 함께 앉아 있었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 했다. 그 옛날은 도시 곳곳에 담겨있을 것이다. 공간이 바뀌면서 옛날도 조금씩 지워지겠다. 대학로의 비어할레에서 지워진 모습은 이제 완성된 광화문광장의 어딘가에 새로 담겨있겠다그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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