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전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100 추천 수 0 2017.12.04 10:26:35

[중앙선데이, 2017. 12. 03]


심청전


요즘 입시철인 모양이지? 난 그런 거 하나도 모르고 아들 키웠어. 얘도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게임에 홀딱 빠졌어. 중학교 때는 피씨방에서 살았지. 그걸 뭐 어쩌겠어. 재미있어 죽겠다는 걸 잡아다 독서실에 앉혀놓으면 뭐가 달라지겠냐구. 독서실이나 피씨방이나 입장료로 별 차이도 안 나. 그래서 그러려니 했어. 걱정이건 공부건 남이 시키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하는 거야. 고등학교 들어가더니 피씨방 알바를 하더라구. 학교 거저 다닌 셈이지. 그리고 공부하는 건 본 기억이 없는데 컴퓨터공학과 들어갔어. 요즘 수능시험 말고 대학 가는 방법이 많은가 봐.


우리 아파트 앞집에 심학규 선생이 살아. 은퇴한 중학교 교감선생님이지. 심선생의 가족사는 알려진 대로야. 마흔 넘어서 딸 하나 낳았는데 엄마가 세상을 떠. 그래서 심선생이 혼자 딸을 키웠어. 앞 못 보는 봉사 아니냐구? 이봐, 요즘은 그런 단어 쓰면 곤란해.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야 해. 그리고 심선생은 앞도 잘 봐. 학교에 차 몰고 출근했다고.


대신 컴맹이야. 문서 작성은 모두 독수리타법, 스마트폰도 문자 보내기까지만. 요즘은 학교 일을 모조리 컴퓨터로 한다는데 컴맹이라고 생각해 봐. 주변사람이 피곤한 거지. 이 양반이 은퇴한 다음에 사흘이 멀다고 우리집 벨을 눌러. 우리 아들 호출이지. 인터넷 안 된다고 해서 가보면 랜 연결선 빠져있고, 부팅이 안 된다고 해서 가보면 전원플러그 빠져있어. 컴맹이라기보다 기계치인 거 같아. 그런데 학교 선생님답게 자존심이 무지 세. 거기에 조선시대 왕비 세 분 배출한 청송 심씨 집안 자부심이 더해져. 문맹, 컴맹을 같은 걸로 보니 이걸 절대 인정 못하는 거야.


한 번은 심선생네로 덩치 커다란 컴퓨터가 배달 됐어. 공양미 삼백 석 아니고 컴퓨터 값 삼백만 원. 내가 아들 컴퓨터 사 줘봐서 아는데 요즘은 이렇게 비싼 컴퓨터 없어. 이 양반이 개인용 컴퓨터가 아니라 서버용 컴퓨터를 덜컥 주문한 거야. 포장박스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 있어. 홀로그램 포장테이프를 떼면 환불 불가. 그런데 간단히 무시하고 개봉. 사실 노안이 좀 일찍 와서 이 양반이 작은 글씨는 잘 못 봐. 딸이 어릴 때도 분유통에 쓰인 작은 글씨를 못 읽더라고. 그래서 우리 집에 분유통 들고 온 적이 몇 번 있어. 온 김에 그냥 내가 분유 몇 번 타주곤 했지. 그랬더니 동냥젖 얻어먹였다고 소문이 났어.


이제 빠라밤, 심청양이 등장해야 할 순간이지. 얘는 인당수가 아니고 인터넷에 빠졌어. 심청닷컴 운영하는 파워블로거야. 식당 돌아다니면서 엄지손가락 들고 사진 찍어. 그리고는 돈 받고 올려주는 거지. 화장품, 신발 다 공짜로 얻어. 그런데 지 아버지가 사온 컴퓨터 이야기를 입맛대로 각색해서 자기 블로그에 올렸어. 무책임한 악덕판매자가 탄생한 거지. 사람들이 이걸 믿고 씩씩거리면서 여기저기 퍼 나른 거야. 결국 판매자가 백기 들고 전액 환불해줬어. 진상고객인 거지 뭐. 여기서 끝내면 심선생이 아니지. 이번에는 육 개월짜리 코딩 전문가 과정에 등록을 했어. 컴맹탈출에는 구청 문화강좌로도 충분해. 심청양이 또 환불해왔지.


컴맹을 위한 컴퓨터가 있더라구. 노트인지 패드인지 그 얄팍한 거. 심청양이 그걸 사서 안긴 후로 문제가 없어졌어. 요즘 아침에 심선생 보면 아파트 현관 앞 벤치에서 열심히 손가락으로 화면 문지르고 있어. 거기가 관리사무소 와이파이 터지는 데거든. 햇빛 적당한 벤치하고 와이파이 교집합을 점으로 이으면 심선생의 하루 궤적이 딱 나와.


그래서 지금은 심학규씨도 개안을 했지. 아무한테나 친구신청 한다더라고. 나한테 문자 보낼 때도 이모티콘 꼭 붙여. 우리 아들 이야기로는 심선생이 여기저기 들어가서 악플 남기고 나온데. 얘가 심선생 아이디, 비번 다 알거든. 전직 교감선생님이면 뭐해,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동네 할아범이잖아.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면 악 받치는 거지. 그러니 악플 달고 욕하면 속도 시원하고 인정받는 기분인 모양이야. 서로 무시하는 세상인데 악플 많은 게 당연한 거 아냐?


뭐 나도 개안한 세상이 있지. 홈쇼핑. 말들을 얼마나 찰지게 잘하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이 없어. 곧 택배 올 시간이네. 그런데 뺑덕어멈이라고 부르지 좀 마. 우리 아들 이름은 병덕이야, 고병덕. 동명성왕 고주몽의 75대손이라니까.


http://news.joins.com/article/2217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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