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60 추천 수 0 2017.11.20 10:06:51
[중앙선데이, 2017. 11. 19] 

삼국유사


교교한 신라의 달밤이었다. 임금님은 속으로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있었다. 낙성 축하연이라기에 핫팬츠의 걸그룹 출연을 기대하고 따라 나선 것이다. 맨 앞의 글자를 놓친 게 불찰이었다. 불국사. 걸그룹은 없었고 총무스님 개회사, 국민의례, 반야심경 봉독, 주지스님 환영사, 국회의원 축사, 신도회장 답사, 격려사 1, 2, 3...


임금님은 석굴암 돌기둥을 능가하는 눈꺼풀 무게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업보로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사업시행 경과보고가 끝났다. 임금님이 범상치 않은 기품의 스님을 발견했다. 그대가 요즘 힙합으로 한참 뜨고 있다는 바로 그 스님이 아니냐. 삼국유사에 적힌 바는 이러하나 실제로는 배석한 신료들에게 달리 물었을 것이다. 야가 갸나?


경덕왕(景德王)이 다시 물었다. 인기 좋다는 그대의 랩을 내게도 들려줄 수 있을꼬. 비트를 가다듬은 충담사(忠談師)가 펑퍼짐한 장삼바지를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엄지와 검지를 펴서 두 팔을 좌우로 흔들기를 잊지 않았다. 이건 힙합이니까.


문을 여니 하늘에는 둥근 달이 떴어 / 강물 위에 기랑 모습 처연하게 떴어 / 내 마음도 기랑 따라 이 세상을 떴어 / 오예 / 잣가지는 높이 솟아 서리 걱정 없어


임금님이 벌어졌던 입을 추슬렀다. 경이로울진저, 이것이 나중에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릴 예정인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인가. 그렇다면 나를 위해서도 음악을 하나 만들어줄 수 있겠나. 본시 제도권에 대한 비판, 기득권에 대한 저항이 힙합의 정신이다. 권력자의 요청이 스님 래퍼에게 반갑지는 않았다. 하나 이상과 현실은 서로 다른 단어. 며칠 후 충담사는 덜 힙합스런 음악을 임금님께 바쳤다. <안민가(安民歌)>라고 불릴 곡이었다. 왕이 흡족해 하였다는 여기까지가 전하는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그러나 충담사의 요구로 삭제되었던 기록의 복원 내용은 이러하다.


임금님의 얼굴이 얄궂게 바뀌었다. 좌우를 물린 임금님이 나지막이 물었다. 경은 어찌 그리 눈치가 없나. 어쩌자고 유신시대 건전가요 닮은 음악을 내게 선사하는가. 나는 좀더 부들부들하고 애틋하고 가슴을 부여잡는 발라드를 들을 나이 아닌가. 신은 래퍼 이전에 종교인인데 어찌 그런 잡상한 음악을 요구하시나이까. 임금님은 집요했다. 종교는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할 것이요 예술은 마음의 상처를 다스려야 할 것 아닌가. 나도 마음의 치유가 필요하다. 내 나이 이제 사십이다. 이르시되 사십대는 불혹(不惑)이라, 이건 어찌 유혹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뜻이다. 나를 유혹으로 치유해다오.


하여 충담사는 과연 야릇한 발라드를 만들었다. 이건 종교인으로도 래퍼로도 파문의 구실이 될 음악이었다. 더 큰 문제는 축음기가 발명되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충담사는 수시로 궁궐에 불려가 임금님 옆에서 발라드를 불러야 했다. 어전음악가와 어용음악가 사이의 위태한 경계였다.


충담사는 궐내 인사명부를 뒤졌다. 그리고 매일 밤 월성 우물 안에다 대고 청아한 목소리를 가다듬던 세수간 무수리를 찾아냈다. 작곡가와 가수의 직업분화 순간이었다. 왕사(王師)로 임명하겠다는 제안을 물리친 그는 표표히 궁을 떠났다. 세수간 무수리는 경덕왕의 머리맡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밤마다 충담사의 발라드를 불렀다. 그 목청에 실린 노래는 참으로 애달프고 서러워 그녀가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체현이요 현신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다음 대 혜공왕기는 난세였다. 무수리에게 우물 밖 이야기는 좁쌀 반 되, 나락 한 줌의 의미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한낱 무수리의 인생도 건너뛰지 않았다. 무수리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그 노래는 청산될 적폐였다. 가수는 결국 멀리 옛 백제 땅으로 피신했다. 다시 고향땅을 밟을 수 없는 유배였다. 달 밝은 밤이면 무수리는 만경강변 언덕에 앉아 동쪽 하늘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떠나온 잣나무 숲 우물터의 처연한 노래였다. 나이 먹은 무수리의 말투는 신라인지 백제인지 알 길도 없어졌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과연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더라. 그 어눌해진 억양 속에 실렸던 서글픈 노래는 곡조 잃은 글자로 악학궤범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이제야 작곡자와 가수가 밝혀진 그 노래가 <정읍사(井邑詞)>.


달하, 노피곰 도다샤, 아으 다롱디리.



http://news.joins.com/article/22127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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