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85 추천 수 0 2017.10.23 18:40:16

[중앙선데이, 2017. 10. 22] 


파리대왕


사분오열, 중구난방, 오합지졸. 어전회의 때면 파리대왕은 이런 단어들이 생각났다. 꾸물꾸물, 득실득실, 우글우글. 조정마당을 시커멓게 덮은 게 파리떼였다. 파리대왕은 자신이 대왕이되 파리대왕인 것이 영 불편하고 뒤숭숭했다.


사건의 발단은 올 초에 참석한 G20였다. 파리국은 경쟁력 지표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꼴찌를 다퉜다. 파리대왕은 신하들이 써준 문장을 달달 외우며 회의장으로 갔다. 하필이면 옆자리에 여왕벌이 앉았다. 꿀벌국은 경쟁력 최고 국가였다. 일등 국가는 여왕의 기품부터 범상치 않았다. 배석한 신하들은 분명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조직체였다. 국민들이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여 새 역사를 창조한 국가가 틀림없었다. 파리대왕은 고향을 묻는 여왕벌에게 외운 대로 대답했다가 분위기가 서먹해지는 걸 느꼈다. 파인, 땡큐, 앤드유?


반대쪽에는 매미국왕이 앉았다. 생김새로만 보면 파리와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파리를 복사기에 넣고 수십 배 확대해야 매미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매미국왕은 기골이 장대하고 목청이 우렁찼다. 발언 때마다 회의장이 흔들렸다. 파리대왕은 중계방송 카메라가 돌 때마다 책상 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파리 대개조가 필요했다. 파리대왕은 자존심을 버리고 여왕벌에게 간청했다. 신사유람단을 받아주소서.


이 사실이 꼴찌 경쟁국에도 알려졌다. 모기들은 입만 삐죽하고 몸은 푸석푸석했다. 게다가 날이 서늘해지면 그 입마저 삐뚤어져서 맥을 못 췄다. 국방력이 의심스러웠다. 모기대왕의 옆자리는 여왕개미였다. 개미들은 여왕부터 배석 신하까지 피부에 탱탱한 윤기가 흘렀다. 이건 분명 치열하고 성실근면한 자기관리의 증거였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관리들의 국정관리가 관리부실일 리가 없었다. 경호개미들은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무게도 번쩍번쩍 들어올렸다. 모기대왕도 개미국에 신사유람단을 보내기로 작심했다.


신사유람단을 선발해야 했다. 그런데 적합한 파리가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선발할 지 알 길이 없었다. 대신 로비가 빗발쳤다. 결국 집권 파리들의 아들들을 적당히 뽑았다. 안배와 보은이 원칙이었다. 집권한 똥파리들은 부동산투기로 돈을 모으고 학력을 위조한 후 돈으로 표를 사서 권력을 잡고 이를 세습하려고 얼굴이 빨갰다. 모기국도 남의 피를 더 많이 빨아 온 집권 모기의 아들들로 신사유람단을 꾸렸다.


파리들은 허리에 노란 띠를 몇 줄 두르고 꿀벌국으로 떠났다. 파리국도 분명 법치국가를 표방했으나 파리들에게는 규칙, 준수, 처벌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파리들은 꿀벌국에서도 여전히 무단침입, 노상방뇨, 무전취식을 실천했다. 꿀벌 경찰은 원칙준수의 의지로 중무장한 존재들이었다. 범법 파리들을 발견하는 대로 침을 쏘았다. 꿀벌국은 회유, 뇌물, 읍소가 통하지 않는 이상한 국가였다. 파리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으로 잘못을 싹싹 빌었다. 물론 뭔가 잘못했는데 뭘 잘못했는지는 여전히 잘 몰랐다.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개미국 공항에 도착한 모기들이 적응을 못한 것은 다를 바가 없었다. 남의 피를 빨아야 하는데 빨려 줄 피를 가진 남이 없었다. 허공을 두서없이 날아다니던 모기들은 미로 같은 개미집에 갇혀 꼼짝을 못했다. 그때마다 구해달라고 울어야 했다, 앵앵.


귀국한 신사유람단에게서 배우라. 파리대왕은 전국에 방을 붙였다. 신사유람 파리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을 싹싹 빌며 공항 입국장에 들어섰다. 중계방송을 보니 그게 분명 선진 문명의 모습인 것 같기도 했다. 전국의 파리들이 따라서 싹싹 빌기 시작했다. 모기국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귀국한 모기들은 어두운 곳에만 가면 앵앵 울었다. 모기국 백성들도 모두 힘 닿는 대로 앵앵 울었다.


파리대왕은 왜 파리국이 여전히 꼴찌 국가인지 의아해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 파리가 왕위를 계승했다. 갈팡질팡, 우왕좌왕, 좌충우돌. 파리국 대신들이 임금을 볼 때 느껴지는 건 부전자전 달라지지 않았다. 파리들은 모두 무슨 일인가로 분주한데 막상 완성되는 일은 없었다. 한편 꿀벌국, 개미국에서는 새 임기의 여왕벌과 여왕개미를 선출했다. 여왕들은 다음 G20 참석 준비를 각료들에게 지시했다. 바람이 소슬하여 낙엽이 지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서늘한 가을인데 바쁜 이유는 신기하게 다 달랐다.



http://news.joins.com/article/22036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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