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120 추천 수 0 2017.10.02 09:56:25

[중앙선데이, 2017. 10. 01]


단군신화


라일락 향기가 날리던 교정에서 그녀를 만났다. 긴 머리의 날씬한 미녀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둥글둥글 후덕하게 생긴 편이었다. 청춘남녀가 오래 사귀면 결혼하겠다는 게 당연하지 않나. 이 때 보도 듣도 못한 그 조항이 앞을 막았다. 이종교배 불허. 나는 호랑이, 그녀는 곰이었다.


양쪽 집이 뒤집어졌다. 우리 집안은 뼈대만 내세웠지 얼룩덜룩 껍데기만 남은 몰락가문이었다. 웅녀네는 재벌가였다. 분명 쓸개 팔아 돈을 모았을 것이다. 지엄한 자연의 법도를 앞에 내세워 반대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였으매 그냥 가출하여 살림을 차렸다. 신단수 근처 궁벽한 반지하 동굴이었다.


애가 들어섰다. 당연히 기뻤지만 걱정도 컸다. 이종교배 불허의 처벌조항에 태아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살림은 빡빡했지만 제일 유명한 산부인과를 다녔다. 흰머리의 여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의사의 처방전은 지금 생각해도 좀 이상했다. 자외선 쐬지 말고 식이요법에 주의하세요. 두 분 다 마늘과 쑥만 백일 동안 드세요. 피부과로 갈 다이어트 미용 처방전이 바뀐 건 아니었는지.


물론 나는 더한 처방에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웅녀에게 마늘과 쑥으로 된 즙, 지짐, , 전병을 지성으로 만들어 바쳤다. 그런데 나는 육식동물이다. 이것도 자연의 법도고 또한 지엄하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고 조물주의 뜻이다. 주말 동굴 구석에서 삼겹살에 소주라도 한 잔 할라치면 웅녀는 나를 밖으로 몰아냈다. 담배 끊어라, 태아에 안 좋다. 술 줄여라, 건강에 안 좋다.


웅녀네서 막내딸을 그냥 둔 건 아니었다. CCTV가 있던 때는 아닌지라 동굴 천장 가득 박쥐들을 심어 놓았다. 이들은 제각각의 목격담을 웅녀집에 고해 바쳤다. 이들의 보고서는 경쟁적으로 의뢰인의 입맛에 충실했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천하에 몹쓸 놈이 되어갔다.


연애는 이상이어도 결혼은 현실이라는 이야기가 현실이었다. 곰도 잡식동물이다. 웅녀의 체력은 나빠져 갔고 의사는 더 갸우뚱거렸다. 이대로는 태아와 산모가 다 위험합니다. 웅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웅녀는 삼칠일 만에 동굴을 나섰다. 이미 만삭이어 허리도 가누기 어려웠다. 나는 동굴 앞 박달나무를 잘라 웅녀에게 지팡이를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 순간을 맞은 사랑의 정표였다.


박쥐들은 이번에는 저쪽 소식을 열심히 전해주었다. 호랑이도 곰도 아니고 털 없이 빨간 것이 태어났더라. 엉뚱하게 사람처럼 생겼으되 분명 아들이더라. 박달나무를 짚고 온 여자가 낳은 대로 이름을 지었더라. 박달나무 단(), 사내아이 군().


웅녀네서는 웅녀를 미혼모로 둘 생각이 없었다. 아이는 평양성 읍장에게 입양되었다.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매일 낮술을 먹는 술꾼이었다. 낮술을 먹는다는 건 낮에만 술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항상 얼굴이 빨갛게 익은 것 같은 중늙은이였다. 홍익인간. 술만 먹으면 조기교육을 시킨다고 애에게 커다란 칼을 쥐여 주고 휘두르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다. 단군왕검. 자기가 하늘의 아들인지라 바람, , 구름을 몰고 다닌다고 두 팔을 휘저으며 허풍을 떨었다.


오래 된 이야기다. 담배도 오래 전에 끊었다. 내가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는 아득하기만 하다. 인왕산에서도 가끔 놀았는데 요즘은 갈 생각도 사라졌다. 이제 첫사랑의 그림자도 희미하다. 나는 먼 발치에서 손자들 보는 맛에 흐뭇하게 산다. 주말 근교 산에 가보라. 나보다 더 알록달록하게 차려 입은 손자들이 물밀 듯이 산을 오른다. 자신들도 산에 끌리는 이유를 모를 것이다.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오를 따름이니. 백두대간을 뛰어다니던 호랑이의 유전자다.


이들 손에 모두 막대기가 쥐어있다. 이걸 거슬러 오르면 내가 웅녀에게 쥐여 준 박달나무 지팡이가 나온다. 산에는 호랑이 가문임을 잊지 않고 포효하는 목소리가 골마다 가득하곤 했다. 어흥, 아니고 야호. 그대들이 하산 후 마시는 시큼달큼 막걸리는 내가 웅녀에게 달여 주던 마늘즙이었음을 아는지.


호연지기(虎然之氣). 산에서, 들에서, 거리에서 할아버지의 큰 뜻을 잊지 말기 바란다. 출생, 배경, 모습이 달라도 모두 존중하고 서로 사랑해라. 칼을 놓고 창을 버리고 평화롭게 살아라. 그대들의 할아버지는 허풍쟁이 평양성 읍장이 아니라 포효하고 포용하는 호랑이였느니라.


http://news.joins.com/article/21986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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