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150 추천 수 0 2017.09.04 10:41:19

[중앙선데이, 2017. 09. 03] 신데렐라


대궐 안 가마가 모두 호박이 되었사옵니다. 벌써 달포 전 일이었다. 입궐한 도승지의 보고가 기이했다. 임금님은 달력을 들춰 보았다. 만우절인가. 그런데 과연 어가 자리에는 둥글넙적한 호박이 하나 놓여 있었다. 대궐 뿐 아니고 도성 전체가 문제였다. 인경종이 울리면 성문 안 가마들이 죄다 호박으로 변했다. 호박이 된 가마는 파루종이 울려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삼보이상승차. 세 걸음 이상 거리면 임금님은 무조건 가마를 탄다. 왕실법도가 지엄했다. 구중궁궐에 갇힌 임금님은 궐 밖 맥주집의 호프향과 왁자한 분위기가 그리워졌다. 그렇다고 호박을 타고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규직, 비정규직 가마꾼들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다. 가계부채와 실업수당이 늘어 재정압박이 커졌다. 퇴직금을 받은 가마꾼들이 속속 호박요리 프랜차이즈 가맹점주가 되었다. 이들은 본사 갑질도 억울한데 과당경쟁 방치, 최저임금 인상은 웬 말이냐고 성토했다. 기존 호박요리 식당들은 대기업의 골목상권 위협과 정부의 수요예측실패를 비난했다. 이들은 호박죽 솥을 궐 밖 마당에 쌓아놓고 농성시위에 돌입했다. 호박재배 농가는 공급과잉으로 운송비도 안 나온다고 밭을 갈아엎었다. 임금님은 호박전, 호박죽, 호박무침, 호박볶음을 늘어놓는 수라상궁이 미워졌다.


과년한 처자들은 시집 갈 때 탈 가마가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아가씨들이 결혼을 거부하니 결혼연령이 사정없이 높아졌다. 출산율이 OECD 최저라고 저녁 뉴스의 예쁘장한 앵커가 호들갑이었다. 저도 시집을 안 간 것이. 임금님은 재떨이를 집어 던지려고 했는데 대궐 전역이 금연구역이 되어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원인을 알아야 답을 찾지. 인문계 출신 판서들은 중세 구라파 구전문학에서 발견되는 스토리라고 설명했다. 자연계 출신 판서들은 무기물의 고분자 생물체 변환은 아직 실험된 바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임금님은 이들을 천거한 민정담당 승지부터 봉고파직하기로 작심했다. 그 다음은 문이과를 갈라야 한다던 교육문화 승지 차례렸다.


대궐을 은밀히 출입하던 사승이 진단과 처방을 내놓았다. 세자가 혼기를 넘겨 생긴 변고이옵니다. 유리구두를 만들어 발이 맞는 아가씨를 세자빈으로 삼으소서. 임금님은 이태리국 무라노섬 장인들에게 유리구두 제작을 의뢰했다. 여당 신료들은 난국타개를 위한 고심의 승부수를 칭송했다. 야당 신료들은 사특한 요승의 교언에 근거한 정책결정과 무분별한 외국물품 수입에 따른 국부유출을 규탄했다. 이들은 면세 수입업체의 로비정황을 포착했다며 고질적 망국병폐인 정경유착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임금님은 이들을 잡아다 물고를 내고 싶었으나 여소야대 정국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유리구두가 완성되었다. 금혼령이 내려지고 적령기 처자들은 유리구두에 발을 맞춰보았다. 전국의 가마가 사라져서 팔도의 아가씨들이 걸어와야 했다. 모두 발이 퉁퉁 부어 유리구두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 있었다. 숯내 뚝방 움막에 사는 숯쟁이의 막내딸 발이 꼭 맞았다. 그 먼 길을 지치지도 않고 사뿐사뿐 걸어와 발을 맞춘 것이다. 얼굴도 심성도 고왔다. 세자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상소가 쏟아졌다. 탄소배출 저감 노력이 세계적 추세인데 숯쟁이 딸 간택은 화석연료업체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사옵니다. 가죽신을 유리구두로 잘못 번역한 게 틀림없으니 회의 속기록을 공개하고 관련자를 문책하소서. 세자빈 후보의 위장전입과 논문표절 의혹이 있으니 청문회로 검증절차를 밟아 국가기강을 세우소서. 그러나 임금님은 단지 세 걸음 이상 거리를 가보고 싶었다. 가마를 타고.


가례가 거행되었다. 임금님은 빈한한 숯쟁이 사돈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본인이 엄숙히 내린 <불법청탁 및 부정부패방지> 교지 때문에 대놓고 사돈에게 금품을 건넬 수도 없었다. 임금님은 공조판서의 팔을 비틀었다. 숯내골이 신도시사업 대상지에 포함되었다. 토지보상금을 받은 사돈은 유복한 여생을 누렸다.


선왕을 이어 차명세자가 즉위하였다. 숯내골에서 나고 자란 왕비는 서민적 풍모를 잃지 않아 뭇 백성의 사랑을 받았으니 재순왕후다. 한글 원본이 유실된 <재순왕후전>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더 널리 알려졌으니 재투성이 소녀이야기 <신데렐라>. 지금 분당이라 불리는 그 땅 숯내골(수내동), 숯내(탄천)에는 재순왕후의 흔적은 없고 아파트만 잔뜩 들어서 있을 따름이다



http://news.joins.com/article/2190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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