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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 여의나루 설계 국제공모전 취지문 / 2017. 02여의나루, 한강을 향한 교두보 이 땅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수시로 한강을 만난다. 한강은 이 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생명줄이었다. 취수, 조운 그리고 범람이 거기 얽혀있었다. 20세기 후반 치열한 치수(治水)가 있었다. 여의도는 그 과정에서 얻게 된 새로운 도시공간이다. 이 땅에서 실험된 최초의 근대적 계획도시다. 여의도는 대한민국이라는 좌표에서 원점이라는 위치를 획득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미디어의 핵심공간이 된 것이다. 국토의 크기를 가늠해야 할 때는 항상 여의도의 몇 배 크기라고 설명해야 이해가 되었다. 여의도는 시작이고 중심이고 기준이 되었다. 이제 한강은 취수, 조운, 범람으로부터 자유로운, 혹은 멀어진 공간이 되었다. 질문은 그렇다면 지금, 그리고 미래의 한강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한강을 통해 새롭게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생존과 기능의 가치가 아닌 문화의 가치일 것이다. 우리는 한강을 통해 우리가 누구이며 이 도시가 무엇인지를 묻고자한다. 21세기의 여의도는 여전히 계획과 실험의 공간이다. 여의도는 새로운 한강의 모습을 선보일 교두보면서 첨단기지가 될 것이다. 이어질 한강연관 사업은 모두 이 여의나루에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여의나루의 모습을 묻는 이 공모전의 질문은 그래서 정박과 승선에 머물지 않는다. 질문은 한강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승선한 이 배는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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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勸酒) / 중앙일보 / 나를 흔든 시 한 줄 / 2016. 04. 27권주(勸酒) 勸君金屈卮그대에게 이 잔 권하니 滿酌不須辭 잔이 넘친다 사양 말게 花發多風雨 꽃 필 때 비바람 많고 人生足離別 인생에 이별 많으니 - 우무릉(于武陵·810~?) 깡마른 문장이다. 그런데 담긴 감수성이 흥건했다. 한숨이 나왔다. 무장한 논리로는 손톱만큼의 해석도, 이해도 불가능한 세계였다. 글재주 아닌 관조의 적층(積層)이 한 길 넘게 깔려야 가능할 것이다. 거기 꽃잎 하나를 살짝 얹어 피워낸 시였다. 들여다보아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달관의 경지였다. 내게는 감탄의 한숨이 나왔다. 대학원생 시절 만난 중국 당나라 때 시다. 연구실은 옥탑방이었다. 내려다보면 성주암 계곡에도 시절의 부름대로 꽃이 폈다. 해가 지면 서편 산자락이 검어지고 능선 뒤에 노을의 휘장이 펴졌다. 거대한 빛의 향연이고 침묵의 교향시였다. 그때 이 시를 만났다. 천 년 전의 봄날에도 꽃은 피고 노을은 졌구나. 그리고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아야 할 슬픔이 있었구나. 시는 말을 건넸다. 아니 그냥 술 한 잔을 권했다. 먼저 진 꽃이 아직 거기 벌판에 얹혀 있는 꽃잎에게. 무심히, 그리고 서서히 돌고 있는 지구 위에서. 계절이 찬란하다. 하지만 사월의 표지 뒷면에는 피지 못한 꽃의 슬픔이 난만히 묻어 있다. 잔은 술인지, 눈물인지 가득하여 넘친다. 그대에게 이 잔 권하는 지금, 비바람 많은 사월이 가고 있구나. http://news.joins.com/article/19945262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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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 동아일보 / 칼럼 / 2016. 01. 06지구의 궤도에는 눈금이 없다. 지구는 그냥 육중한 몸을 굴리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을 뿐이다. 그 끝에 조물주가 설계한 불의 심판이 있을지, 수소가 들끓는 불구덩이가 있을지 지구도 모를 것이다. 눈금은 그 표면에 기식하는 어떤 생명체들이 자신들이 만든 달력에 새겨 놓았다. 인간들은 폭죽을 터뜨렸다. 눈금이 한 바퀴 돌았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다. 지구가 동시에 그 눈금에 얹힌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는 날이 저물고 있는데 어디에서는 새해가 밝았다고 환호성이었다. 시작은 어디고 끝은 무엇인가. 첫 역사서는 그리스어로 쓰였다. 눈금이 없는 상황을 카오스(chaos)라고 칭했다. 어떤 틈에 끼어 분류되지 못하는 상태를 지칭했고 혼돈이라고 번역했다. 분류하는 능력은 로고스(logos)라고 했다. 눈금의 좌우에 만물이 편안히 놓인 상황은 심메트리아(simmetria)였다. 번역하면 조화였다. 구분의 결과가 조화롭지 못하면 그 도구는 로고스가 아니다. 로고스가 없는 눈금과 구분을 강요할 때 그것은 폭력이다. 한반도를 나눈 것은 폭력이었다. 현재 지구표면에서 가장 이상하게 나뉜 곳이다. 그 구분의 실상인 기이한 희극은 우리가 주인공인 순간 비극으로 바뀐다. 연초면 양쪽에서 모두 연속극 재방송처럼 통일의 대사를 외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옳고 너희는 여전히 그르다는 전제가 덮이면 대사는 독백이다. 앞에 놓인 것은 상대가 아니고 허공이나 봉창이다. 눈금이 넘어갈 즈음 남쪽에서 자행되는 분류폭력의 현장이 대학입시다. 학생들은 인문계, 이공계, 예체능계라는 구분선 안으로 도박패를 던져야한다. 건축은 이공계로 분류된다. 하지만 적지 않은 대학에서 건축학과의 연간성취는 인문계로, 교수들의 연간업적은 예체능계로 나눠 평가한다. 그렇다면 이 분류의 배경에 있는 것이 과연 로고스인가. 학생들을 이 이상한 테두리로 나눠 가두고 그 안에서만 선택을 하라는 건 야만적 폭력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 위반이다. 나눈 자들은 편안하겠으되 나뉜 자들은 고통스럽다. 나뉜 자들은 미래의 지구가 아니고 바로 지금 이곳이 불타는 지옥이라고 경멸하기 시작했다. 참혹하다. 굳이 나눠놓고 융복합에 미래가 달려있다는 국가의 미래는 카오스다. 그 국가의 현재는 희극이다. 지구와 한반도의 미래도 걱정스러우나 내 앞길도 평안해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어찌 구분이 될까. 나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니 건축과 교수다. 건물을 설계하므로 건축가고 책도 몇 권 썼으므로 저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당황스럽게 건축학자나 건축비평가라고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출입국카드작성과 연말정산의 순간에 정부의 분류기준으로 근로자, 교육자, 예술가, 저술가 중 나는 내가 누구인지 고민했다.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자의 뻔한 모습일 것이다.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인문계인가, 자연계인가, 예체능계인가. 대학 교수도 모르는 것을 고등학생들에게 알아오라는 이 사회의 로고스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나는 분류를 거부하는 자유를 얻었다. 나는 떳떳하고 뻔뻔하게 전부에 속하기로 했다. 나는 몇 개의 특허를 갖고 있다. 그 대상은 비닐하우스거나 접고 펴는 구조물들이다. 대상이 건물인지를 구분할 필요도, 건축과 교수가 해야 하는 일인지도 물을 필요가 없다. 나는 눈이 오면 무너지는 비닐하우스에 좌절했으며 재난으로 몇 달 기식할 공간이 없는 이재민들의 처지에 애통해했을 따름이다. 고백하거니와 분류되지 않는 나는 분류하기 어려운 이런 걸 디자인하는 순간 행복했다. 나는 새해에 기꺼이 발명가의 갈래를 하나 더 얻을 생각이다. 천문학자들이 눈금을 어찌 넣든 지구는 굴러갈 것이고 조류학자들이 뭐라 나누든 새는 알아서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혼돈의 갈래를 나눌 것이고 분류되어야 하는 아이들의 행복은 여전히 유보될 것이다. 나누는 자들은 칼을 든 자들이다. 누군가 조자룡 헌칼 쓰듯 휘두른 칼날에 우리 모두가 베인 상처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 술 취한 망나니처럼 그 칼을 되 집어 다음 세대에게 휘두르고 있다. 우리에게는 자랑스럽다고 강요할 영광보다 보듬고 다독여야 할 상처가 훨씬 많다. 로고스는 말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며 그 실체는 의사소통이다. 이 땅에서 칼은 칼이었고 말도 칼이었다. 설득하지 않고 찌르고 내리치려고만 했다. 그 칼, 새해에는 내려놓자. http://news.donga.com/3/all/20160106/75747624/1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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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꿈섬 / 노들꿈섬 공모 취지문 / 2015. 06도시의 섬 그곳에 섬이 있다, 서울 한복판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의 이름은 중지도(中之島)였다. 우리 기억 속의 그 섬은 조금씩 모습이 다르다. 강수욕을 즐기던 백사장, 연인들의 한적한 데이트 장소, 국군의 날 행진행렬이 통과해야 하는 곳, 서울불꽃놀이축제가 열리면 갑자기 발 디딜 틈이 없어지는 그 섬. 지금 그 섬의 이름은 노들섬이다.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도시의 섬’은 고립된 초현실의 상투적 표현이다. 노들섬은 그 표현에 꼭 맞게 서울 복판에 있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스쳐 지나가는 섬이다. 도시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석양과 원초적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비일상적인 풍경, 때로는 초현실적인 상황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노들섬이다. 시민의 꿈 화산남 한수북(華山南漢水北) 천년승지(千年勝地) 광통교(廣通橋), 운종가(雲鍾街) 건나드러 낙락장송(落落長松) 정정고백(亭亭古柏), 추상오부(秋霜烏府) 위 만고청풍(萬古淸風)ㅅ경(景) 긔엇더니 잇고 권근의 상대별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조선 개국 초기 한양 복판인 청계천 광통교에서 도시의 천년을 내다보는 꿈과 희망의 그림이 여기 그려져 있다. 서울은 여전히 그런 곳이 되어야한다. 우리는 미래를 함께 꿈꾸고 만들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서울에 담고 그런 사회가 서울을 만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서울에 현실과 타협과 좌절에 의한 불만의 공간이 혼재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초현실의 공간, ‘도시의 섬’은 다른 공간이다. 지금 서울의 복판인 한강 노들섬은 우리의 꿈을 그려낼 수 있는 공간, 노들꿈섬이 되고자 한다. 차별받던 서자 홍길동이 건립한 율도국(栗島國)이나 가난한 선비 허생이 꿈꾸던 빈 섬(空島)도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피터팬의 네버랜드(Neverland)도 그런 섬이었을 것이다. 이 섬에 여전히 필요한 주제는 시민과 역사다. 1. 시민 사회가 시민이 모여서 이루는 집단이라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그것은 사회체계 혹은 운영체계를 지칭한다. 노들꿈섬은 창조적 제안자의 독창적인 기획 아이디어로 첫 운영체계가 확립될 것이다. 이 섬의 운영체계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시민사회가 어떤 것일지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가치관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섬을 완성하는 것은 시민의 참여다. 어떤 방식으로 시민이 그 사회의 완성에 참여하고 섬의 모습을 갖춰나갈지를 서술하는 정교한 룰과 시나리오가 포함되어야 한다. 2. 역사 사회와 도시는 위대한 엘리트에 의해 완결되지 않으며 완성되는 순간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섬에 다음 세대들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그들의 흔적을 퇴적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노들꿈섬은 시민의 경험과 기억이 적층되는 곳이어야 한다. 그 기획의 실현에 필요한 공간 및 첫 시설 구상은 적정한 규모로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고 후대 시민의 행태와 요구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그들의 공간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계획을 배경에 깔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공모 민주사회는 결론이 담는 가치를 판단하기보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가치를 판단한다. 건강한 사회는 치열한 경쟁과 공정한 판정을 통해 유지되고 발전한다. 그러한 경쟁과 판정의 제도적 장치가 공모전이다. 노들꿈섬의 미래모습도 공모전을 통해 선정될 것이다. 노들꿈섬 운영기획안, 공간계획안, 그리고 최초 운영자가 모두 공모를 통해 선정될 것이다. 이 공모는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구조물이 아니라 가장 민주적 과정이라는 기념비를 얻고자 한다. 이 사업은 노들섬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획안부터 공모를 통해 결정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물론 그 기획안은 우리의 꿈을 투영한 것이되 현실공간에서의 실천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 공모전이 기존의 건축현상공모 방식과 다른 점은 섬의 기획과 운영방식에 대한 공모가 선행된다는 점이다. 필요한 시설의 성격과 규모는 그 결과에 의해 제시될 것이다. 이 공모전이 기존의 위탁운영자선정공모방식과 다른 점은 구조물을 먼저 지어놓고 제 삼의 운영자를 뽑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기획에 의해 운영방식이 결정되고 그 결과에 맞춰 구조물이 지어질 것이며 그 제안자에게 운영을 맡길 것이다. 선정된 기획안이 구조물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건물이 지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공모전이 기존의 사업자투자공모방식과 다른 점은 서울시 재원으로 필요한 시설과 공간을 조성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익사업을 통해 투자비를 회수해야 하는 사업자가 아니라 적정운영비회수와 공익가치실현의 균형을 잡으며 시민과 역사에 대해 책임의식이 있는 운영자가 선택될 것이다. 공모진행 이 공모는 1단계 운영기획공모, 2단계 운영전략공모 그리고 3단계 환경조성공모의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운영기획공모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기획안을 뽑는데 목적이 있다. 이 단계는 우리가 어떤 사회의 꿈을 그리고 그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이 섬에서 구현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우리 사회가 특정한 직업의 종사자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예선은 인문, 사회, 환경 등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 그리고 그들의 협력조직에게 열려있다. 우리 시대의 허균이나 박지원, 혹은 홍길동이나 허생의 상상력이 필요한 공모단계다. 다음 단계인 운영전략공모에 진출하기 위한 복수의 기획안이 선정될 것이다. 운영전략공모는 운영기획공모에서 선정된 주체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가장 탁월하고도 실현가능한 안과 이를 운영할 운영자를 선발하는 것이 목적이다. 노들섬의 가치를 발굴하고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 현실적으로 작동가능한 조직체계, 재정계획이 제시되어야 한다. 준공 이후의 서울시 재정투입은 없거나 최소화되어야 하므로 재정적으로 자족적이며 지속가능한 기획과 운영방안임이 확인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공간이용 구상방안도 검토,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조직력과 재정관리능력을 갖춘 주체가 하나 선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노들꿈섬의 첫 운영자가 될 것이고 그의 운영전략을 기본으로 환경조성공모의 지침이 작성될 것이다. 환경조성공모는 건축, 조경, 도시전문가가 참여하여 진행하는 전통적인 현상공모형식이다. 운영전략공모에서 당선된 운영전략을 실현하는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이용계획이면서 우리가 도시에서 요구하는 경관기대수준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설계안을 선정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회적 상상력을 공간적 상상력으로 번역해낸 가장 탁월한 계획안이 당선안으로 결정되고 그 설계에 의해 노들섬이 조성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노들꿈섬이 될 것이다. 노들꿈섬공모 이 공모전은 유연하게 변하면서 시대의 흔적과 퇴적을 담을 수 있는 운영전략과 이를 담을 수 있는 환경설계안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완의 계획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섬 전체의 기반시설과 필요한 시설이 추가 사업이 없을 경우에도 충분한 완성도를 갖추고 작동할 수 있는 계획안이어야 한다. 노들꿈섬은 우리의 희망이 되기를 기대한다. 과정과 결과, 가치와 형식의 모든 것이 우리 시대가 펴보이는 야심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거기 세워진 특정한 구조물이나 섬의 일부분이 아니라 섬 전체가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 후대에 평가받기를 기대한다. 이 공모전의 진정한 심사위원은 다음 세대의 시민들이 될 것이다.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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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 한대신문 / 교수칼럼 / 2015. 03. 30이것도 질병의 종류는 아닐까. 아니면 덕후로 표현되어야 하거나. 고등학교 생기부의 희망 진로 여섯 칸이 일관된 경우다. 건축가! 물론 의사, 법관, 소설가, 경영자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런 학생들을 앞다투어 뽑으라고 한다. 전공적합성이라는 명목이다. 건축의 열정을 불태우는 이 학생들은 수시 면접불만을 인터넷에 올려놓는다. 건축과 입시인데 건축에 관한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더라고. 간혹 입학통지를 받으면 또 묻는다. 입학 전에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컴퓨터 프로그램을 공부해야 하냐고. 그리고 입학하면 바로 과내 동아리와 학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불굴의 전투의지로 건축설계스튜디오에서 꼬박꼬박 밤을 새며 건축폐인의 길을 걷는다. 건축에 의한, 건축을 위한, 건축의 대학생활이 시작된다. 조언은 간단하다. 그럴 필요 없다. 건축은 평생 할 공부다. 결연하게 대학시절 전부를 소진할 필요가 없다. 고등학교 때 건축을 공부할 필요는 더욱 없다. 네가 아는 위대한 건축가들 중 태반은 대학건축교육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대학 때 열심히 딴 짓 하던 사람들이다. 바로 그러기에 제대로 된 건축가가 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건축과가 아니고 대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이다. 대학 재학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대학 재학의 흔적은 평생 유지된다. 그러기에 그 전공이 대학생활에 군림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학은 고등학교 시절에 겪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인간들을 모아 놓는다. 대학은 그 사이를 마음대로 헤치고 다닐 온전한 자유를 제공한다. 선택한 전공이 무엇이든 세상이 얼마나 신기한 사고의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결국 더욱 큰 사고의 폭과 자유를 얻게 하는 곳이다. 지적 자유를 얻게 하는 곳. 대한민국은 일본 메이지시대의 도구적 교육관을 이어받았다. 그들은 입학하는 학생을 문과 이과로 나누고 졸업하는 학생들의 가치를 취업률로 재단한다. 그들에게 대학생은 산업체의 요구를 받들어 취업 직후 바로 전선에서 사용되다 소모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 취업생이 이십 년 뒤에 얼마나 무참히 정리해고 되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에 성공해서 위대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없다. 교육부장관이 그래서 훌륭했다는 찬미도 들리지 않는다.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대학전공은 전자공학이고 교육부장관의 전공은 법학이다. 대학은 평생 갖고 살아갈 무기를 갖추는 곳이다. 그것은 현장에 바로 적용 가능한 전공지식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고다. 그리고 좋은 친구들이다. 서로 다른 전공으로 만나서 서로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다 얻은 인연을 만드는 곳이다. 훗날 전공이 무엇이었는지의 기억은 아스라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함께 배운 가치는 여전히 가슴에 담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움이라는.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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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걷다 / 사람의 가치 / 2014세상을 떠난 건축저널리스트 최연숙을 그리는 책에 쓴 원고. 2012년에 쓴 글이 이제 출간. -------- 광화문을 걷다 이것은 어떤 행동을 서술하는 문장이 아니다. 건축 프로젝트의 제목이었다. 네 개 대학교의 대학원생들이 진행한 건축 프로젝트를 한데 묶어서 부른 이름이 바로 이것이었다. <광화문을 걷다>. 2002년의 여름은 월드컵개최와 본선 4강진출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한국 전체가 들끓던 시기였다. 별로 심심할 틈이 주어지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도 이건 좀처럼 진정이 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터득한 세대의 등장을 과시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회적으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분석도 필요했고 다음 행보가 어찌되어야 하는지도 살펴야 했다.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건축도 의외로 자유롭지 않았다. 이유는 그 열기를 담던 공간이 바로 도시였기 때문이다. 2003년의 여름 언저리에 건축저널인 <건축문화>의 최연숙 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취재자와 취재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로는 별로 만나본 적이 없고, 심심할 때 맥주집에서 만나 쓸데 없는 수다를 안주로 신체와 지갑을 축내던 사이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국민대학교의 장윤규 교수도 항상 함께 있었다. 최연숙 팀장은 여전히 즐겁게 놀 이벤트를 하나 장만하는 중이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네 개 건축전문대학원에서 광화문 앞을 주제로한 공동프로젝트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네 학교는 건국대학교, 경기대학교, 경희대학교, 그리고 한양대학교였다. 내가 전화를 받은 이유가 있었다. 외부에 내건 이유로는 여기에 연관이 있는 한양대학교 교수라는 것이었고 내부에 있는 이유는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술친구라는 것이었겠다. 그러나 나름 다른 근거도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시청앞 광장 현상공모에서 <빛의 광장>이라는 걸 제출하여 덜컥 당선이 되어있던 터였다. 이게 되느니 안되느니 말이 한참 많던 상황이어서 신문, 잡지, 방송에 몇 번 불려나간 일이 있으니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는 주제에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을 것이다. 서울시청앞은 어찌되었건 광장으로 바뀔 것이니 이제 좀더 중요한 공간인 광화문 앞을 갖고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 최연숙씨의 의도였다. 나는 당연히 동의했다. 여기에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내 입장에서도 나름 사연이 있었다. 1999년은 문화부에서 지정한 건축문화의 해였다. 워낙 시의적절하게 뭔가 이벤트를 계속 생산해내야 하는 일간지에서 이 이상한 문화의 해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고 여파는 내게도 밀려왔다. 서울의 길과 공간에 관해 동아일보에 연재를 하게 된 것이다. 일간지의 연재는 시작하는 시점은 있어도 마무리하는 시점은 정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독자의 반응에 따라 연재기간의 신축이 아침드라마의 방영횟수에 뒤지지 않을 정도다. 이미 쓰기로 작심한 것,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첫 주제가 중요했고 나는 첫 공간으로 광화문 앞, 세종로를 짚었다. 노련한 신문사 기자의 조언에 따라 종로가 연재 첫 회에 나가고 세종로가 두 번째 공간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내게 중요한 공간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제안도 아니지만 이곳이 자동차의 공간에서 사람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광화문 앞이 인간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대학교 졸업설계 주제로 가끔 등장하던 것이었으니 내가 첫 제안자라고 주장할 일도 없고, 첫 주장자의 의미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간지 한 면에 나오는 컬럼에서 나는 세종로에서 서태지 사인회도 개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시로서는 아무도 현실적이라고 동의하지 않는 주장을 내걸었다. 학교로 자리를 옮긴 나는 이번에는 한국의 소위 문화적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같은 주장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었다. 광화문 앞을 보행자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은 이후 내가 장비 헌칼 휘두르듯 아무데서나 꺼내놓는 안건이 되었다. 나는 당연히 이 주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다음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를 맡을 계획은 없었다. 결국 당시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튜디오를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께 의사를 타진했다. 몇 해째 시골 읍내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진행하시던 이종호 선생님은 이 서울 복판 프로젝트 진행에 흔쾌히 동의를 해주셨다. 당시 경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장윤규 선생 역시 싫다고 뺄 상황이 아니었다. 건국대학교의 제갈엽 선생, 경희대학교의 김찬중 선생께서 모두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꾸려졌다. 팀이 꾸려졌으므로 나는 여기서 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이 구도에 대해 전혀 불만도 아쉬움도 없었지만 최연숙씨는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측은하게 느껴졌는지 코디네이터의 간판을 걸어주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속 편한 코디네이터였다. 스튜디오는 광화문에서 마무리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네 학교의 작업을 전시하고 간단한 심포지움을 가졌다. 그런데 이 심포지움의 주제가 바로 옆 광화문이었으므로 사전 길놀이가 필요했다. 아직 자동차가 씽씽 내달리는 광화문를 실제로 걷기로 했다. 오후 1시에 광화문 앞에서 네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이 모였다. 소집의 일관성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저런 게스트들도 있었다. 장윤규 선생이 특유의 굵직한 필체로 그은 그림을 인쇄한 티셔츠들을 모두 나눠 입었다. 웅성웅성 모인 수십 명의 학생들은 세종로의 서쪽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사박물관이 그 방향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래야 했지만 문제는 시작하는 지점에 정부중앙청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항상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관찰하는 그 건물. 권위주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해도 관공서의 예민한 반응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이 그 앞을 지나면서 지레 더 민감하게 웅크러들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생의 상당부분을 뭔가에 대드는데 사용한 몇 분이 게스트로 참여하고 계셨다. 이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청부청사 앞에서 드러눕고 놀면서 시대가 바뀌었음을 경찰들에게 과시하셨다. 경찰들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 괴상한 집단의 등장과 행진에 대놓고 말은 못해도 꽤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확연했다.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좀 이상해 보이기는 했을지라도 결국 아무런 민폐도, 관폐도 끼치지 않고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심포지움도, 뒤풀이도 끝났다. 나는 광화문 앞이 보행자의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광장이 차도로 나뉘어있다고, 광장의 축이 비틀력 있다고 이야기들을 해도 나는 여전히 이 공간이 기쁘기만 할 따름이다. 다른 문제는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곳이 보행자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역할을 하였고 <광화문을 걷다>라는 이벤트도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최연숙씨의 역할도 거기 묻혀 있다고 믿는다. 내가 최연숙씨를 처음 만난 것이 1996년의 여름이었다. 광복절을 앞 뒤로 한 무더운 여름의 폐교였다. 민족이라는 단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는 지금이지만 당시에는 당당하게 <민족건축인협의회>라는 이름을 내건 집단이 있었고 이 <민건협>이라는 곳에서 주최한 여름건축학교에 학생들과 놀아주는 튜터로 초대가 된 것이다. 당시 월간 <플러스> 기자였던 최연숙씨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인상을 설명하자면 월간지 기자로는 드물게 아직도 뱃심좋게 부산 억양을 고수하고 있는 아가씨였다. 하여간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이후로 한국 건축계의 현실과 미래에 관심과 걱정이 많은 건축월간지 기자와 그런데는 도대체 아무 관심이 없던 건축가인 나, 그리고 좀 더 관심이 없던 또 다른 건축가 장윤규는 대학로 비어할레에서 만나서 공통분모와 별 안주가 없어도 즐겁게 떠들고 노는 술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좀 흘러 나는 한양대학교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최연숙씨는 또 다른 월간지인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학기의 대학원 스튜디오에서 나는 건축과에서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학기말의 크리틱이 갑자기 심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자를 초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크리틱이 끝나면 뒤풀이도 중요하므로 나는 대학로를 염두에 두고 간단하게 술친구들을 불렀다. 속으로는 술친구지만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건축가와 기자 초대라는 이런 구도가 별로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세상의 구도가 익숙치 않았던 나는 벽에 붙인 일정공고에서 최연숙씨의 이름 옆에 ‘<공간> 편집장’이라고 써넣었다. 지금은 그 막중한 차이를 이해하지만 당시 내게는 기자나 편집장이나 다 기사 쓰는 사람들이었고 실제 편집장이 아니라면 내가 하루만 편집장에 임명해주면 되는 사안이었다. 당일 크리틱이 끝나고 옮긴 술자리의 안주는 바로 이 ‘편집장’ 사칭으로 본인이 얼마나 사내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의 성토였다. 모든 죄는 내게 있었다. 최연숙씨는 곧 <건축문화>로 자리를 옮겼고 그 여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광화문을 걷자고. 시간이 한참 지났고 나는 국민대학교로 역시 자리를 옮긴 술친구로부터 최연숙씨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수술 후의 병원에서 여전히 부산억양으로 자기 병을 문병 온 남 이야기하듯 하는 환자의 문병을 했다. 그리고 또 한참 뒤 우리는 최연숙씨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 함께 앉아 있었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 했다. 그 옛날은 도시 곳곳에 담겨있을 것이다. 공간이 바뀌면서 옛날도 조금씩 지워지겠다. 대학로의 비어할레에서 지워진 모습은 이제 완성된 광화문광장의 어딘가에 새로 담겨있겠다. 그 어딘가에.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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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패 / 2018. 04. 25도시공학과 고 신기철교수님 소장도서 기증 감사패 증정. 수여는 공대 학장님. 기증하신 분께서 교수님의 사모님이시자 학부형. 2003년에 졸업한 신서원씨가 한양대 건축과 출신.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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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트 / 2018. 04. 10홍콩에 5년간 체류하다 귀국한 서진석, 이혜승 부부건축가. 개업한 사무소 이름은 스튜디오 M.U.Te. 조용히 있으라는 뜻은 아닌 이름으로 보임.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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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선배 / 2018. 04. 02최소한 10년 선배인 정대건, 이희진 선수 등장에 따라 5학년생들 번개.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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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현장 / 2018. 03. 15학부 5학년 현장 구경. 쉽게 허용되지 않는 S프로젝트 공사현장.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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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 / 2018. 03. 05이번 학기 한경대 교수로 임용된 서명수 박사 방문. 예외가 많아서 문제기는 한데 그래도 공부 잘하던 사람이 교수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례.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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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 2018. 02. 22학부 졸업식 = 5년+휴학+군대...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