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178 추천 수 0 2017.08.21 14:40:37

[중앙선데이, 2017. 08. 20] 사도세자


왕자는 왜 뒤주 안에서 죽었을까. 어릴 때부터 나는 궁금했다. 왕자가 이 세상 대신 선택한 뒤주는 어떤 공간일까.


나는 주위가 닫힌 상자 안에 들어가서, 상자를 만들었다. 아동 발달기 현상이라고도 했다. 나는 의자 주변을 보자기로 막고 의자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불과 옷뭉치를 비집고 장롱 속에 들어가 한 나절을 보냈다. 어두운 그 안에서 눈물 나게 행복했다. 나는 왕자는 아니었으나 상자 안에서 죽어도 좋았다. 그렇게 내가 죽은들 누가 값싼 눈물 한 방울 흘려주겠는가. 뒤주는 내게 아득한 이상향의 구체적 명칭이 되었다.


왕자는 동화의 주인공이고 마법의 소유자였다. 가벼운 입맞춤으로 잠든 미녀를 깨워냈다. 알지 못하는 별에서 모르는 언어로 여우와 대화를 나눴다. 눈처럼 흰 말을 타고 구름처럼 달렸다. 왕자는 또한 고뇌했다. 죽느냐 사느냐고 번민하며 물었다. 독 묻은 칼로 원수를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장렬했다. 페르시아의 평원에서 별을 보고 점을 쳤다. 신비했다. 왕자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멋진 직업의 이름이었다.


가장 행복한 공간 뒤주는 가장 멋진 사나이가 죽기로 선택하는 필연의 목적지였을까. 왕자는 가족을 버렸다. 뒤주는 가족의 인연을 초월할 궁극의 공간이었을까. 그러나 인연을 놓을 자유도 없던 아들에게 뒤주 밖은 어떤 곳이었을까. 아비가 아들에게 남긴 것은 자신이 떼어 낸 고통은 아니었을까.


가족을 떠난 다른 왕자를 나는 안다. 그는 생로병사를 목도하고 홀연히 궁을 버렸다. 그에게 궁은 번뇌의 포박이었을 것이다. 반야의 지혜를 얻는 그는 어두운 제석굴로 들어갔다. 그는 보리수 아래서 해탈하고 사라수 아래서 열반했다. 그곳은 까마귀 울음 아득한 익명의 벌판이 아니었다. 때 아닌 잎이 돋아 어두워졌다니 숲은 규정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뒤주였고 열려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다. 왕자는 불꽃의 다비로 육체를 버렸다. 그는 환히 빛나는 극락으로 갔을 것이다. 뒤주를 선택한 왕자도 그 곳으로 갔을 것이다. 뒤주의 다른 쪽 끝은 극락으로 통할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시작도 끝도 맞닿아 있다. 무시무종(無始無終).


뒤주는 닫혀 있다. 뒤주는 탈출하지 못한 마지막 단어, 희망이 담겨있는 곳임이 틀림없다. 뒤주 안은 피안을 향한 그리움으로 밝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뒤주 밖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한 번뇌의 골짜기다. 음울한 악령으로 가득한 저주받은 공간일 따름이다. 뒤주는 속세와 내세를 연결하는 좁은 길목일 것이다. 그리하여 뒤주는 극락에 이르면 버려야 할 수레거나 나룻배일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뒤주 밖 이곳은 캄캄했다. 한치 앞을 볼 수도 없었다. 내 육신은 고통으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 고통은 신음소리로 번역되어 간신히 몸 밖으로 기어 나왔다. 나는 제대로 누울 수도 설 수도 없었다. 뒤주는 어두운 복도, 침묵의 저편에 있었다. 뒤주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도 탈출하지 못한 희망의 두 글자가 여전히 벽을 긁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둠을 기어갔다. 캄캄한 험곡인데 동물로서 부여된 감각이 내가 의지할 유일한 힘이었다. 긍휼히 여기옵소서. 나무관세음보살.


몸을 가득 메운 속세의 오물을 다 내버려야 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집착할 어떤 것도 남겨두지 않아야 했다.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끈끈한 액체가 몸을 흘러내렸다. 내 몸은 무너지는 액체의 뭉치였고 나는 그것들을 다 밖으로 분비해 버렸다. 가벼워졌다. 그러나 고통의 끝은 다른 고통과 또 맞닿아 있었다.


이번에는 온몸이 마르고 갈라졌다. 내 전생은 모래사막을 건너던 낙타였을까. 혀끝을 적실 물 한 방울에 나는 영혼을 거래할 것이다. 부활은 멀고 죽음은 가까우니 남은 것은 오열이 아니었을까. 뒤주 앞의 나는 몸을 추스르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과연 뒤주 문틈으로 극락의 미소가 번질 것인가. 그것의 이름은 과연 희망일까. 뒤주 문을 열었다.


, 정토였다. 빛이 가득했다. 향긋한 과일과 시원한 감로수가 눈 앞을 채웠다. 그것은 희망이 물질로 체화된 모습이었다. 몸을 뒤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게걸스럽게 물을 마셨다. 청량한 수분이 온몸의 세포 구석구석으로 짜릿하게 스며들었다.


냉장고문을 닫으며 다짐했다. 다시는 맥주를 마시지 말아야지.


http://news.joins.com/article/21857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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