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임당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211 추천 수 0 2017.07.10 09:28:21

[중앙선데이, 2017. 07. 09]


신사임당


내 인생 전반전은 꽃마차였어. 별 어려움 없는 집에서 귀염 받고 자란 막내딸이 바로 나였지. 내 인생방향은 일찌감치 미대 진학으로 잡혔어. 그래서 우리 엄마 작전대로 내가 그 학교 나온 여자가 된 거야, 서양화과. 졸업하고 결혼정보회사 덕에 내과 레지던트였던 남편 만나서 아들 낳고 살았어.


지금부터 후반전. 개업 오 년 만에 남편이 죽었어. 앞이 캄캄했지. 아는 건 물감 종류 밖에 없는데. 모든 건 돈으로 결론이 나더라고. 집부터 정리해야지. 그때 분양광고를 봤어. 회사보유분 정리, 일부 잔여세대 선착순 분양, 중도금 할인 및 대출 알선, 마감 임박. 내가 꽂혔던 글자는 공원전망, 전원풍경이였어. 울적할 때였잖아. 입주하고 보니 그 공원이 추모공원이었어. 전원풍경은 주변이 논밭이라는 이야기. 나머지 단어들은 다 미분양이라는 소리야. 안 팔리니까 할인해 주는 거고. 그래도 살다보니 적응이 되더라고. 거실 창에 북망산천이 가득한 것도 나름 스펙터클이었어. 문제는 아들이지. 이 동네 애들은 중학생만 되면 무덤 뒤에 모여서 담배 펴. 남편이 폐암이었는데. 애들이 맨날 봉분 올라가서 노는 바람에 공원관리사무소에서 전화 많이 받았어. 비석 넘어뜨렸다고.


친정에 하소연을 했어. 그래서 강남 주상복합아파트로 이사를 한 거야. 아래층이 상가지. 점심시간이면 근처 사무소 직원들이 목걸이처럼 신분증 걸고 다녔어. 다 멋있더라고. 맘 속으로 자꾸 아들 목에다 신분증을 걸어보게 돼. 애 학교 보내고 브런치 먹으면서 동네 아줌마들하고 수다 떨다보면 하루가 짧아. 그런데 뭔가 와 닿는 촉이 이상해. 아줌마들이 애들 공부 이야기만 나오면, 아니지 사실 맨날 공부 이야기만 했는데, 자기 패는 감추고 있다는 느낌. 내가 바보였지. 이 아줌마, 아니 여편네들이 지네 애들은 온갖 전문입시학원 보내고 선행학습 시키면서 동네 속셈학원 보내는 척 시치미 떼고 있던 거야.


그래서 나도 여기로 왔어. 대치동. 이쯤 되면 한마디 거들고 싶어지겠지. 이거 맹모삼천지교 패러디 아니냐고. 맹추 같은 소리 말고 이야기 마저 들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딱 하나야. 본인이 돈 많고, 잘 생기고, 사회적으로 성공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애가 대학 잘 가야 해. 애가 간 대학 순위가 부모권력 순위야. 나도 마음이 바빠. 자사고나 외고는 학교에서 알아서 입시전략 짜준다는데 우리 애는 일반고 다니거든. 그래서 하루가 더 짧아. 입시경향 파악해야지, 봉사계획 짜야지, 체험활동 근거 만들어야지, 독서활동기록 채워야지, 자소서 첨삭 받아야지, 애 감시해야지.


친정 시장 입구에 떡가게가 있어. 그 집 아들이 자사고 기숙사에 들어가서 주말에 집에 오는데 우리 엄마 목격담은 무시무시해. 밤이면 불 꺼놓고 엄마는 떡 썰고 아들은 수학문제 푼대. 가끔 아들이 앞치마 두르고 떡도 파는데 이게 학생부 봉사기록에 들어가지 않느냐는 거야. 원칙은 아닌데, 모르지, 한국이니까.


오만 원짜리 좀 펴 바바. 거기 나오는 여자가 동양화과 선배 언니야. 학교 다닐 때 얼굴은 좀 갸름했는데 나이 먹고 살이 쫌 쪘나 봐. 강원도 출신인데 앞뒤 꽉 막힌 걸로 유명했어. 지금이 조선시대인 줄 알더라고. 그 언니가 거기 나온 이유가 뭐겠어. 미대 졸업하면 그 정도 그림은 다들 그려. 아들 잘 둬서잖아. 사실 그 아들이 입시, 고시 9관왕으로 유명했지. 그것도 죄 수석으로다가. 공무원 돼서 가끔 뉴스에 나오기도 했고. 그래서 지금 뭐 하냐하면, 그게 문제기는 한데, 공무원이 잘 나가면 정치바람 좀 타잖아. 줄 잘못 서서 정권 바뀌는 바람에 옷 벗었대. 그리고 지금은 경상도 가서 선배가 운영하는 입시학원 논술강사 한다고 들었어. 이름이 좀 촌스럽던데 도산서원이라든가. 요즘은 단과반이 대세인데 그 동네는 아직 다들 종합반인 거 같아. 소수서원, 병산서원. 머리는 좋아도 세상을 모르는 거지.


어휴 벌써 열 시네. 보이지? 밖에 차들 밀리기 시작한 거. 애들 태우러 온 사람들이니까 다 내 경쟁자야. 나도 나가야겠네. 커피 잘 마셨어. 참고로 학벌 좋은 아빠들 말 절대 들으면 안 되는 게 이 동네 불문율이야, 자기는 안 그러고도 대학 갔다는 둥. 너도 아무리 늦어도 애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뛰기 시작해야 해. 여기는 한국이라구. 굿럭!


http://news.joins.com/article/2174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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