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137 추천 수 0 2017.06.26 08:49:45

[중앙선데이, 2017. 06. 25]


임진왜란


나 보이냐? 하나도 안 보여? 달도 없고 정말 깜깜하네. 제대 팔 일 남은 말년병장이 매복이 뭐냐. 그래도 국방부 시계가 가기는 가나보나. 내가 일병 때 수색매복을 나간 적이 있지. 그게 뭐냐 하면 땅굴 수색이야. 일단 관짝 크기로 땅을 파. 그리고 밤새 거기 누워있어. 땅 파는 소리 듣고 북한군 땅굴 찾으려고. 그래서 사병들이 야밤 벌판에 죄 널려있는 거지. 사단 본부에 걸렸던 문구가, 땅굴 찾아 특진하고 헬기 타고 휴가 가자.


그날도 겨울에다 그믐밤이었어. 별이 총총해서 낭만적인데, 낭만은 염병, 얼어 죽겠더라고. 그런데 갑자기 뭔가 소리가 들려. 소리 나는 쪽으로 살금살금 갔지. 짚을 걷어 내니까 정말 땅굴이 있는 거야. 사단 병력이 도열한 연병장 복판에서 헬기 뜨는 그림이 막 그려지더라고. 사단에 걸렸던 다른 문구는 간첩 잡아 특진하고 헬기 타고 휴가 가자. 앞 글자만 바꾸면 돼. 하여간 이게 웬 기회야. 일타양피, 양수겹장, 일석이조.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는데 텅 비었더라고. 그래서 전진 앞으로. 한참 가니까 화살표하고 글씨가 보여. 개성. 가슴이 벌렁벌렁 했어. 더욱 전진 앞으로. 씩씩하고 용감하게. 그랬을 리가 없다고? 넌 지금 선임병을 뭘로 아는 거냐. 드디어 새 글씨가 나왔어. 평양. 종점까지 온 거지. 기도비익, 사주경계, 은폐엄폐하면서 밖으로 나왔는데 풍경이 가관이야. 뉴스에서 보던 도시풍경은 어디 가고 이상한 군대 숙영지 분위기야. 영화 세트장인 줄 알았어. 잡초는 우거지고 제대로 된 건물이 하나도 없어. 바퀴 달린 채 굴러가는 것들도 없고. 유류 사정이 정말 안 좋은 것 같았어. 병사들은 이 추위에 반바지 비슷한 걸 입고 다니고, 들고 다니는 소총 꼴도 기가 막혀.


어쨌든 얼른 하나 생포해가서 헬기 띄워야지. 하전사 말고 군관급으로다가. 그런데 말을 못 알아듣겠는 거야. 분단 뒤에 말도 많이 달라졌다는데 좀 심하더라고. 너희 군관동무 어디 있냐고 물어봐야 말이 통해야지. 손짓발짓으로 겨우 부대장 야전막사에 갔는데 명패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 육군소장 소서행장(小西行長). 어럽쇼, 이거 임진왜란이잖아. 내가 당구장 알바 할 때 저녁마다 출근하는 예비군 중대장이 있었어. 그 아저씨가 맨날 떠들든 게 무협지나 전사였거든. 기억나더라고. 고니시 유키나가. 생각나는 다른 선수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지, 토요토미 히데요시.


통역이라고 누굴 데려왔는데 말투가 사극 대사야. 그간 불법다운로드 영화 좀 본 덕에 말은 통하더라고. 기억나는 대로 막 주워 담았어. 강감찬, 을지문덕, 이순신 하고. 원래 점쟁이가 아무렇게 떠들어도 그 중 하나만 맞으면 신통해지는 거잖아. 고니시 눈이 동그래지는 거야. 이순신 아시무니까. 당연하지. 백 원짜리 동전에도 나오는데. 더 떠들었지. 너희들, 학익진전법 모르고 대들다 박살난 적 있지? 눈이 더 커져. 패전소식은 군사기밀인데 내가 꿰뚫고 있잖아. 공은 어디서 온 누구데스까. 나는 발견 플러스 생포니까 이 계급 특진, 이미 병장 단 거잖아. 다부지고 당차게 관등성명을 댔지. 대한민국 육군 병장 박, , . 참고로 소장 위가 병장이다. 대한민국도 모르는데 고니시보다 높은 군인이 등장했으니 오죽했겠어. 꽐라꽐라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났지.


그때가 왜병들이 막 평양성을 출발하려는 참이었어. 의주에 있는 선조 잡겠다고. 임금이 잡혔으면 지금 여기는 일본인 거잖아. 강 건너 갔으면 중국인 거고. 그래서 뻥을 쳤지. 너희는 잘 모를 텐데 명나라보다 덩치 엄청 더 큰 미국이라는 형아가 있다. 너희들이 의주로 움직이면 그 형아가 항공모함 갖고 올 거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우리가 사실 그거 믿는 거 아냐? 너희가 삼 백 오십 년 뒤에 그 형아한테 멋모르고 대들었다가 딱 주먹 두 방에 혼수상태 된다. 나중에 맞을래, 지금부터 맞을래?


병장 점쟁이가 예언하니 자기들끼리 또 모시모시 작전을 짜더라고. 그래서 의주를 지척에 두고 왜병이 평양에 머물렀어. 역사책에는 왜병이 의주에 안 간 게 미스터리라고 나와. 그게 다 내 덕인 거지. 그럴 리 없다고? 제자가 기어이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데 첫 닭은 울 생각이 없네. 역사는 민초들이 움직이지만 기록해주지는 않는다고. 너도 고참 되면 부사수한테 잘해줘라. 나처럼. 이제 일 주일 남았다. 럭키세븐


http://news.joins.com/article/21696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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