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주부전

중앙일보-상상력사전 조회 수 376 추천 수 0 2017.05.14 14:56:44

[중앙선데이, 2017. 05. 14] 


별주부전


용왕님, 참 좋은 분이셨지. 이 굼뜬 거북이를 성실하다고 보셔서 외교안보수석으로 오래 모셨어. 고래로 치면 큰 덩치는 아닌데 잘 생긴 한량이셨어. 술 좋아하셨지. 술 많이 마시면 술고래라고 하잖아. 그게 다 용왕님 이야기야.


덜컥 문제가 생겼어. 간경화 판정을 받으신 거야. 그때 주치의가, 좀 황당하기는 한데, 산부인과 전문의였어. 언변에 친화력이 엄청 좋았어. 그래서 대비의 적극천거로 산부인과 의사가 용왕주치의가 되는 희극이 벌어졌어. 용궁에서도 초등학교 교실 같은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져. 용왕님 건강상태는 국가기밀이잖아. 그래서 몰래몰래 내과 전문의들이 용궁에 드나들었어. 이게 뉴스에서 비선의료진이니 비선실세니 하면서 떠든 내용이야. 그런데 결국 간이식 밖에 해결책이 없다고 하더라고.


고래가 포유류잖아. 해중국에 있는 것들이 꽁치, 넙치, 가물치 이런 것들인데 어떻게 이식할 간을 찾아. 육상국으로 가야지. 의사 이야기가 토끼 간이 꼭 맞는다는 거야. 토끼 데려와서 간이식하면 되잖아. 그게 말로는 쉬운데 막상 되느냐고. 며칠 동안 계속 회의를 했지. 누군가가 토끼를 모셔오든 데려오든 잡아와야 하는데 그 누가 누구일지 결정해야지.


중요한 순간이 되니 맨얼굴들이 화악 드러나더라고. 제일 인상에 남는 게 아귀였어. 알잖아, 이마 넓적하고 방송에 몇 번 나온 친구. 용왕님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이미지 만들고 다니던 친구지. 그런데 막상 자기는 개입하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이해해 달라는 게 읽혀.


그날은 경호실장, 그러니까 문어도 참석했어. 이 친구가 군인 출신답게 앞뒤 안 가려. 자기가 나가서 무조건 토끼를 한 두릅 엮어오겠다는 거야. 토끼를 북어나 굴비의 종류로 알고 있는 거지. 그 긴 발로 상모서리를 부둥켜안고는 대머리를 쿵쿵 부딪치며 씩씩거리더라고. 말리는데 애 먹었어. 나는 결국은 그게 내 일일 거라는 감을 잡고 있었어. 내가 그 감 덕분에 그 자리까지 간 거야. 토끼 생긴 건 어떻게 알았냐고? 지금 초상화 그려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대는 아니지.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온다고.


육상국에 비선접촉점이 좀 있었어. 어둠의 경로라고 부르는 거. 적당한 토끼후보 미리 물색하고 가서 만나서 최종결정하기로 했지. 수술 후 인생은 책임지고 봐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토끼가 겁을 많이 내더라고. 수중국에서 포유류 간이식수술을 해본 적이 있냐는 거야. 당연히 없지. 그럼 수술 중에 자기가 죽으면 어쩌겠냐는 거야. 미치겠더군. 의사에게 연락하니 그러면 육상국에서 간을 잘라서 운송을 하라는 거야. 다만 이식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기증자도 같이 와야 한다고.


문제는 이게 장기기증이 아니고 장기밀매에 가까운 거야. 하필이면 그 때는 육상국이 장기밀매 때문에 국제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직후였어. 게다가 이건 용왕님이 연관된 건이니 금방 외교시비로도 발전할 수 있는 문제였지. 극도의 보안이 필요한 작전이었어.


국정원 도움을 받기로 했어. 나와 토끼는 일행으로 움직이고 잘라낸 간은 국정원 직원이 다른 비행기편으로 들고 가는 걸로 했어. 그런데 사태가 잘못된 거지. 간이 출국을 못한 거야. 출국심사장에서 멍청하게 이걸 이식용 간이라고 해버린 거지. 저녁에 끓여먹을 곱창전골 밑반찬이라고 했으면 됐을 텐데.


다음은 알고 있는 그대로야. 용왕님 돌아가시고 삼년상이 끝나니까 아귀가 판을 뒤집더라고. 용왕님 사인 규명과 관련 책임자 처벌. 새 정권에서 자기가 살아보겠다고 패를 쓰는 거지. 그래서 결국 나도 국정감사 끌려가서 온갖 수모 끝에 여기까지 왔어.


사실 가장 큰 피해자는 토끼겠지. 사건 직후에 육상국 가서 몰래 딱 한번 만났어. 간을 잘라내서 조금만 걸어도 엄청나게 피곤해하더라고. 겨우 서너 발 걷고 한참 앉아 쉬어야 했어. 그런데 아귀가 풀어놓은 끄나풀이 뒤에 붙어 있던 거야. 이 친구가 찍은 사진을 개인블로그에 잠깐 올렸던 거지. 곧 지우기는 했는데 이미 일파만파로 다 퍼 날라진 뒤였어. 그게 와전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야.


평생 가슴에 묻고 가겠다고 했었는데 이제 알 사람들은 알아야지. 무상한 세상이지


http://news.joins.com/article/2156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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