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6. 04. 27] 칼럼 - 권주


권주(勸酒)


勸君金屈卮그대에게 이 잔 권하니

滿酌不須辭 잔이 넘친다 사양 말게

花發多風雨 꽃 필 때 비바람 많고

人生足離別 인생에 이별 많으니

- 우무릉(于武陵·810~?)


깡마른 문장이다. 그런데 담긴 감수성이 흥건했다. 한숨이 나왔다. 무장한 논리로는 손톱만큼의 해석도, 이해도 불가능한 세계였다. 글재주 아닌 관조의 적층(積層)이 한 길 넘게 깔려야 가능할 것이다. 거기 꽃잎 하나를 살짝 얹어 피워낸 시였다. 들여다보아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달관의 경지였다. 내게는 감탄의 한숨이 나왔다.


대학원생 시절 만난 중국 당나라 때 시다. 연구실은 옥탑방이었다. 내려다보면 성주암 계곡에도 시절의 부름대로 꽃이 폈다. 해가 지면 서편 산자락이 검어지고 능선 뒤에 노을의 휘장이 펴졌다. 거대한 빛의 향연이고 침묵의 교향시였다. 그때 이 시를 만났다. 천 년 전의 봄날에도 꽃은 피고 노을은 졌구나. 그리고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아야 할 슬픔이 있었구나.


시는 말을 건넸다. 아니 그냥 술 한 잔을 권했다. 먼저 진 꽃이 아직 거기 벌판에 얹혀 있는 꽃잎에게. 무심히, 그리고 서서히 돌고 있는 지구 위에서.


계절이 찬란하다. 하지만 사월의 표지 뒷면에는 피지 못한 꽃의 슬픔이 난만히 묻어 있다. 잔은 술인지, 눈물인지 가득하여 넘친다. 그대에게 이 잔 권하는 지금, 비바람 많은 사월이 가고 있구나.


http://news.joins.com/article/19945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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