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형출판사사옥

2004 조회 수 18404 추천 수 0 2004.05.20 16:13:37


효형출판사 사옥 / 2004 / 경기도 파주시 출판문화산업단지 / 시몽건축
SALT : 김호중, 김성모, 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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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건물 높이는 15m. 더 높아도 낮아도 안된다. 대지를 가로지르는 그린코리도(green corridor)는 침범할 수 없고 건물의 외벽면은 제시된 건축선에 맞추어야 한다. 그린코리도에 허용되는 것은 계단이나 연결통로 정도로 국한한다.
단지에 적용되는 설계지침은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었고 이에 의해 건물의 외곽선은 고민할 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건물은 두 동으로 나뉘었고 주차장의 위치도 당연스런 위치에 결정되었다.
건축주의 요구조건도 간단하고 명쾌했다. 350평 내외의 연면적, 지하층은 필요 없고 4층에는 직원숙소가 들어서면 된다. 효형출판에서 책을 두 권 냈으니 효형출판에 대해서 알만큼 알 것이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

아이디어

출판사를 짓는 것이다 보니 당연히 아이디어는 책 주위를 맴돌았다. 책에 관한 책, 헨리 페트로스키의 <서가에 꽂힌 책>이 아이디어를 풀어내는 단서를 마련해 주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서 잘 드러나듯 필경사가 책을 베껴쓰던 시대에 책은 꽂아놓는 것이 아니었다. 책은 책의 표지가 보이게 서가에 그냥 올려놓는 것이 책을 보관하는 방식이었다.
인쇄술의 발달에 의해 책이 대량생산되면서 서가에 책을 보관하는 방식은 첩첩이 종이를 쌓은 책의 앞마구리가 보이게 꽂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금처럼 책의 제목이 인쇄된 책등이 밖으로 보이게 서가에 꽂는 것은 서적의 대량인쇄가 가능해진 뒤의 일이었다.  
책은 수많은 글자가 쓰인 종이를 다시 수 백 장 씩 포개서 만들어 낸 것이다. 책의 얼굴은 책의 앞마구리에 있다. 소장자가 책을 사서 그냥 서가에 꽂아두기만 했는지, 실제로 꼼꼼히 다 읽은 후 꽂아 두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바로 앞마구리의 형상이다. 따라서 책의 의미, 책의 정신은 책의 등이 아니고 앞마구리에서 보이는 것이다.
책을 건물 크기로 확대하면 종이 한 장은 커다란 나무판 한 장의 크기로 확대될 것이다. 바로 이 나무판을 책의 종이 쌓듯 쌓도록 하는 방식으로 건물의 외벽은 구성되었다. 책의 앞마구리를 나무판의 중첩을 통해 건물 크기로 확대해내고 이들을 슬래브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건물은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건물의 아이디어는 건물로 구현된 <서가에 꽂힌 책>이다.

디자인

구조는 기둥과 슬래브로 이루어졌다. 슬래브는 서가가 그렇듯이 플랫슬래브로 결정되었다. 기둥이 있는 부분은 외벽을 파내서 구조형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날이 맑으면 여기 그림자가 깊이 떨어지게 된다. 건물의 명쾌함을 훼손한다는 우려에 의해 이 부분에는 난간이 없다. 당연히 이곳은 사람이 나올 수는 없는 곳이다. 환기문은 바로 이 부분의 안쪽에 설치되어 있다. 이 환기문이 열리면 회색 건물 내부의 색채가 얼핏 보인다.
플랫슬래브의 명쾌함을 외부로 강조하기 위해 창은 슬래브 하단에 바로 붙여 설치하였고 외부 조망이 필요한 곳에 수직 창이 덧붙여졌다. 이들의 조합에 의해 창은 글자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ㄱ, ㄴ, ㅡ, ㅣ 로 이루어진 야경을 외부에 보여주게 된다.
대지의 동쪽에 보이는 심학산이 없었으면 파주출판단지로 이주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건축주의 애착에 의해 4층의 직원숙소는 심학산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무심하게 보이는 심학산을 꽁꽁 숨겨두었다가 숙소의 거실에 앉는 순간 한번에 심학산의 모습을 펼쳐보이게 하는 구도가 숙소의 평면을 결정하는 일관된 기준이었다.

시공과 이후

외벽을 이루는 목재에는 일일이 톱질을 하여 홈을 판 후 이를 조립했다. 낱장의 종이로 이루어진 책을 강조하듯 폭 2.5cm 두께의 나무판 한 장 한 장을 강조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는 목수들의 의구심 속에서도 완성된 외벽의 시공수준은 만족할만한 것이었다. 외벽 시공에 에너지를 소진한 시공사는 이후의 작업에서는 별로 성과가 좋지 못했고 많은 부분에서 후속작업이 뒤따라야 했다. 거친 시공에 대한 책임은 결국 이를 다잡지 못한 건축가의 몫이다.
“우리는 우리 집이 아니고 건축가의 작품 속에 들어가 사는 것이다.”라는 건축가에 대한 건축주의 전폭적인 신뢰가 이 건물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추진력이었다. 여기저기 눈에 띄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직원 숙소의 거실에서 보는 심학산이 가장 아름답다.”는 건축주의 이야기에 그나마 위로를 받는다. 다 짓기도 전에 이미 지은 지 십년은 된 건물 같아 보인다는 이 건물이 그 십년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지은 지 십년 된 건물 같아 보일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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