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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점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1. 01. 15“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네거리에 버린 담배는/내 맘 같이 그대 맘 같이 꺼지지 않더라.” 담배꽁초 무단투기는 과태료 5만 원이라고 지적하면 곤란하다. 1950년의 그는 실연의 우수를 털어내기 위해 도시를 방황 중이다. 이 노래 <서울야곡>의 시작은 이렇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가사 속의 그는 한숨 어린 편지를 찢어버리고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 나온 참이었다. 지척이던 걸음으로 좀더 가면 안국동 네거리다. 그리고 율곡로에 접어들 것이다. 나부끼던 마로니에 잎은 낙엽 되어 떨어지겠다. 그런 계절이 몇 번, 혹은 수십 번 지나가겠다. 그렇게 어떤 공원에 이르러 그는 잠시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가 충무로를 떠났을 때 이곳은 대학캠퍼스였다. 그 대학이 관악산으로 옮기고 남은 터는 주택가로 변했다. 그 일부를 비워 만든 것이 마로니에 공원. 그 구석에 새로 지은 벽돌 건물 두 채의 이름은 <문예회관>. 공원 주변에 맥주집 한두 곳 박혀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곳의 청춘 해방구 돌변 기폭제는 대학로라는 명명에 따른 주말 자동차 통행금지였다. 대학로는 지금 전국 최고의 소극장 밀집 지역이다. 그 공연이라는 방향 설정은 대학로 명명이 아니고 <문예회관>의 존재 덕분이다. 지금 이름은 <아르코예술극장>이다. 이렇게 주변 도시를 바꾸는 핵심건물을 거점시설이라고 부른다. 건물이 잉태하고 잉태하여 도시를 바꾼다. 문화시설이 주변을 문화도시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문 닫힌 신전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면 문화적 허영심 발산·해소처거나. 문화거점시설 성공의 우선 조건은 입지설정이다. 사람들이 어슬렁거릴 주변 환경이 있는 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 성공사례 뒷면에 실패사례가 있다. 초대형문화시설인 <예술의전당> 전면은 왕복 10차선의 남부순환도로고 후면은 우면산이다. 이곳은 변화시킬 주변이 없다. <예술의전당>은 그 내재적 문화폭발력에도 불구하고 밀봉된 문화철옹성, 도시의 폐쇄회로가 되었다. <예술의전당>이 길 건너에 배치되었다면 지금 서초동은 전체가 예술도시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아직 개탄이 이르다. 우리에게는 전 세계가 경이롭게 보아 마땅한 희귀사례가 있으니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의 전면은 과천저수시, 후면은 청계산이다. 템플스테이해야 할 법한 오지에 미술관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미술관에서 굽어보면 오른쪽은 놀이공원, 왼쪽은 동물원이다. 앞뒤로 엄숙하고 좌우로 명랑한 희극적 배치다. 이런 곳에 미술관을 점지한 것은 문화는 고고·우아·고상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산일 것이다. 그래서 문화시설은 근엄·장엄·엄숙해야 하는 신전에 가까운지라 도시에서 멀어졌다. 그 덕에 여름철 애인 동반의 보행방문객들 등에 땀방울이 흘렀다. 그들의 실연 후 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흐르듯. 실연의 방랑자가 더 걷는 동안 세상이 좀 바뀌었다. 문화시설이 접근성 좋은 도심에 있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결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생겼다. 최고의 입지다. 그런데 문화시설이 곧 거점시설이 되지는 않는다. 문화시설의 도시 내 역할은 집객이다. 연주, 관람 전후에 방문객이 먹고 마시고 쉬고 구경해야 하는데 이건 주변의 도시에서 해결할 일이다. 그러면 상권이 살아나고 고고·우아·고상하게 도시가 바뀌기 시작한다. 이때 문화시설은 거점시설이 된다. 거점시설로서 문화시설이 갖춰야 할 요소는, 아니 배제해야 할 요소는 자체 내 소매점이다. 한국에서 정부 투자의 문화시설 건립 이후 요구하는 것이 독자생존이다. 이건 전 세계적으로 성공가능성이 희박한 조건이다. 입장수입 빈궁한 문화시설이 독자생존 압박하에서 선택하는 것은 내부 소매시설 확보다. 그 순간 문화시설은 주변도시와 상권 경쟁관계의 요식업 임대시설이 된다. 고립시설로서 교통체증 유발의 민폐만 주변에 끼친다. 문화시설에서 독자생존 요구보다 중요한 가치는 도시의 변화 가능성이다. 문화시설 지원금 투자보다 훨씬 더 큰 도시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범국민적 가택연금으로 이번 신년·송년음악회 거의 다 취소되었다. 그러나 마로니에잎이 피고 지고 나면 실연(失戀)의 아픔은 잊히고 실연(實演)의 음악당은 다시 활짝 열릴 것이다. 원래 송년음악회에서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필수, 신년음악회에서는 요한슈트라우스의 왈츠가 양념이다. 신년음악회에서 <라데츠키행진곡>에 맞춰 발 구르고 박수 친다고 도시가 바뀌지는 않는다. 매상증가 기대로 주변 상가들도 음악회가 기다려지는 게 중요하다. <합창교향곡>의 감동에 겨운 청중들이 늦은 밤이라도 귀가하지 않고 근처 맥주집으로 향할 수 있어야 하겠다. 맥주집 주인이 그들을 <합창교향곡> 가사처럼 “오 친구여(O Freunde)!”라고 반겨주면 그게 문화도시겠다. 뒤늦게 합석한 바이올린 주자가 맥주집 주인 애창곡 <서울야곡>을 탱고 선율로 들려줄 수도 있겠다. 그때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불 꺼지지 않는 멋진 도시에서 모두 발 구르며 외칠 것이다. 앵콜! https://news.joins.com/article/23970938?cloc=joongang-home-opinioncolumn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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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 조선일보 / 당신의 리스트 / 2020. 01. 05긴 터널을 벗어나자 눈나라, 아차, 아니고 한강이다. 열차의 밑바닥이 물로 가득해지는 순간이다. 7호선 청담역을 떠난 열차는 뚝섬유원지역을 향해 질주하는 중이다. 완만하고 지루한 오르막길 터널을 지나던 열차가 갑자기 빛 속으로 솟아오른다. 뻥 터지듯, 툭 내쳐지듯, 확 달려들 듯. 그때 펼쳐지는 것이 한강이다. 아니 허공이다, 아니 초현실의 공간이동이다. 암굴벽해(暗窟碧海). 전 세계의 지하철 노선 중 이런 극적 공간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강이 아무 데나 있더냐. 열차의 오른쪽 창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너편 철로를 거치지 않고 더 생생한 한강을 대면할 수 있다. 한강 너머 펼쳐지는 도시 풍경 또한 초현실적이다. 옹기종기 아파트 군락 위로 123층 건물이 생경하게 우뚝하다. 당장 열차에서 뛰어내려 절대반지를 구하러 달려가야 할 듯하다. 지하철 가득 비루한 호빗족들의 일상을 변태 껍데기로 남겨두고. 1250원 찍히는 교통카드로 체험할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변화. 그게 서울의 지하철이다. 지하철은 도시 전경사진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도시의 광장이고 얼굴이다. 그리고 도시 일상의 테마파크다. 세상 구경 중에서 참구경이 사람 구경이라고 했다. 과연 지하철에는 생로병사, 길흉화복의 인생만사를 얼굴에 붙인 군상들이 빼곡하다. 나도 나의 하루 운세를 얼굴에 붙이고 그 무리에 밀려 들어간다. 테마파크의 필수 구비 요소는 궤도가 꼬이는 열차다. 옛날에는 청룡열차라고 통칭했다. 이게 없으면 테마파크라 부르기도 어렵다. 놀랍게 우리의 지하철에도 테마파크답게 마땅히 구비되어 있다. 도시의 기능적 구조물이 이런 장치를 장착했다면 그 연유가 기구할 것이다. 이곳은 단절된 현대사의 매듭이 공간으로 체현되어 묶인 곳이다. 뭐가 그리 기구하기에. 남쪽으로 사당역까지만 연결되었을 때 4호선은 평범한 지하철이었다. 그런데 더 남쪽으로 연장하면서 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연결해야 할 노선은 코레일 구간이었는데 그 코레일은 이전 철도청이었고 이를 더 더듬어 오르면 일제 강점기를 만난다. 그래서 그들은 좌측통행. 그런데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지하철 4호선은 우측통행.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결국 대한민국 여기저기 뿌리 내린 일제강점기의 질곡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통행방향이 다른 두 노선 연결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환승이었겠다.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위대한 엔지니어들은 상상하기 좀 어려운 방식으로 이를 돌파해버렸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방안이었다. 남태령과 선바위역 사이의 동굴 속에서 선로의 좌우를 뒤집었다. 전류공급방식 변경으로 객실 안 일부 전등이 소등되겠다며 안내방송은 담담하다. 하지만 조금 전 왼쪽을 달리던 반대 방향 노선이 문득 오른쪽으로 옮겨와 있는 것은 초현실 체험이다. 전 세계의 희귀 사례일 것이다. 이런 역사를 장착한 도시가 희귀하므로. 분식점 표현으로는 꽈배기, 기하학 표현으로 뫼비우스의 띠가 현실의 공간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건 철마교호(鐵馬交互). 그러나 지하철 탑승은 모험이나 여행 아닌 운송에 가깝다. 우리는 승차하고 하차하면 될 뿐이다. 말하자면 발 달린 짐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승객에게 각각 구비된 눈과 귀는 별 존재 의미가 없다. 열차의 창문 역시 그냥 진화에 뒤처진 흔적기관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가끔 우리의 승차가 기꺼이 여행이 되는 구간이 있다. 승객의 눈이 열리고 짐짝에서 생물체로 순간 변화하는 구간이다. 그 생물체의 서식지는 도시다. 열차가 지상으로 달리는 곳이니 2호선에서는 두 곳이 있다. 북동쪽의 성수구간과 남서쪽의 대림구간이다. 성수구간은 자연지반 위, 대림구간은 도림천 위의 구간이다. 이 차이가 크다. 성수구간은 천문학적 예산이 문제지 마땅히 지하화되어야 할 구간이다. 서울이 이리 바뀔 줄 당시의 누가 내다봤으랴. 그런 애물이니 구간 내내 방음벽이 서 있다. 그러나 대림구간은 방음벽이 없이 도시가 훤히 다 내다보인다. 천변 완충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치로 치면 당연히 대림구간이다.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구간의 참된 가치는 고가 위를 달린다는 점에 있다. 열차가 허공을 주유한다. 이 높이에서 이 속도로 도시구간을 질주하는 경험은 이전 세상의 어느 권력자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다. 그래서 이때 시선을 막는 방음벽의 존재여부가 중요하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창방향은 북쪽이다. 남쪽은 멀리 관악산 전망이 좋지만 햇빛을 마주 봐야 해서 경치가 뿌옇다. 물론 이 구간 풍광이 양쪽 다 두서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고 그런 점에서 항상 더 흥미롭다, 새로운 공사현장과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간판으로 심심할 틈이 없고 그래서 두서없는 도시. 그 도시유람을 제공하는 고상주유(高床周遊). 지하철 여행자에게 좀더 박진감 있는 풍경을 제공하는 지점은 1호선 한강철교 구간이다. 이 구간은 여의도와 노들섬이라는 두 섬 사이를 지난다. 여의도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건물들이 빼곡한 인공구조물의 도시다. 이곳은 고층건물 즐비한 도시의 매력을 철교 구조물 너머 가장 박력 있게 보여주는 곳이다. 최근 정비된 노들섬은 한가한 전원 풍경이니 이 또한 초현실적이다. 이 다리는 한강대교와 원효대교의 사이에 놓여있다. 내 평가로 한강에서 가장 잘생긴 두 다리니 어느 쪽을 보아도 좋다. 간혹 옆 철로로 늘씬한 고속전철이 지나가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나는 저 고속기계가 기계괴음을 내며 철교라는 허공 위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 강철이 만들어낸 도시 풍광이다. 이곳이 특히 더 멋진 시간대가 있으니 여의도 건물군 너머 해가 지는 석양의 순간이다. 최고의 공간과 시간과 속도가 다 맞물리는 지점. 우리 시대에 서울팔경을 뽑는다면 이 경치가 빠질 수 없겠다. 지금 겸재가 살았다면 그는 분명 노들섬에 앉아 한강철교와 여의도의 강철낙조(鋼鐵落照)를 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하철은 어둠을 달리는 숙명을 지닌 물체다. 그래서 이름이 지하철이다. 그런데 그 어둠 속의 질주를 만끽할 수 있는 노선이 있으니 그건 빨간색 신분당선이다. 이 노선이 특별한 것은 기관사의 부재다. 열차 전면이 개방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최고의 자리다. 그래서 신분당선을 타면 굳이 열차의 맨 앞자리로 갈 일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좌석 없다. 그러나 이런 질주에 그런 편의 필요 없다. 터널 속의 열차는 소실점을 향해 내달린다. 초현실적 비례의 초현실적 공간을 초현실적 기계음과 함께 질주, 계속 질주. 벽면의 등간격 조명이 알려주는 노선은 좌우로 휘어 돌며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이건 컴퓨터 모니터의 비디오게임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몰입형 공간감이다. 시속 90 킬로미터의 실제상황이며 실물공간이다. 여전히 질주. 질주무정(疾走無情)의 열차가 속도를 줄여나간다. 터널 너머 빛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달리기만 하는 열차가 어디 있더냐. 캄캄하기만 한 인생은 또 어디 있으랴. 그래도 방심하면 곤란하다. 장미꽃만 만발한 인생은 없다더라. 열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잊지 말지니 아무리 긴 암굴이어도, 얼마나 긴 어둠을 달려도 결국 우리가 내릴 곳은 저 밝은 빛 어디쯤이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1/01/05/NRM32EDJ6ZGAXCZBBNXCCZJBPU/?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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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12. 18“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구성지고 낭랑한 노래다. 서울 가는 열차창 너머에서 경상도 아가씨가 슬피 우는 중이란다. 그런데 이 노래의 탄생배경은 뭘까. 모범답안은 한국전쟁과 피난살이겠다. 그러나 입장이 다른 답도 있을 것이다. 서태지 이후 세대라면 노래 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 맥락 없는 토목엔지니어라면 무미건조하게 대답할 것이다. 경부선 준공. 조선 시대의 지도에서 부산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19세기가 다 끝날 때까지 부산은 동래성 옆의 작은 글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 바닷가 한촌이 대한민국 두 번째 규모의 도시가 되는 기폭제는 철도부설이었다. 그 철도가 지금 나그네를 싣고 떠나는 경부선이었고. 철도 시대 이전에 서양인들이 도착하는 곳은 부산이 아니고 제물포였다. 그들은 우마차에 실려 이어지는 구절양장 진창길에 넌더리를 냈다. 그리고 만난 종착점 도시의 조용한 기괴함에 놀라워했다. 그게 한양이었다. 새 아침이 밝았으니 새벽종을 울리고 새마을을 만들자고 하기 전까지 이 나라는 아침에도 고요했다. 그래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도성의 고요를 처음 흔들어 깨운 건 남대문 밖 기차역의 기적소리였다. 첫 철도를 놓기로 했을 때 그 노선이 경인선이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도대체 어떤 능란한 교섭능력의 소유자였는지 알 수 없으나 미국인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낸 것이 1896년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892년부터 인천이 아닌 부산을 한양과 연결하는 철도 계획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철도의 존재가 절박했던 것은 당연히 일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대륙 진출과 교두보 확보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동치던 대한제국의 역사 따라 철도부설의 주체들도 엎치락뒤치락했다. 신의주를 한양과 연결하는 철도를 처음 구상한 것은 대한제국이었다. 철도는 대한제국에게도 대륙으로 향하는 신작로였겠다. 그러나 1905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일본군부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즉시 경의철도 부설권을 확보했다. 그들의 야망은 한반도 너머에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하나로 수렴한다. 경인·경부·경의선 모두 일본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공통점은 교행 시 좌측통행.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 시 오십 분.” 부산만큼 존재도 희미했던 대전이 핵심도시로 등장하게 된 것도 철도 덕이다. 정확히 말하면 역의 설치다. 그런데 부산역과 대전역은 다 역이지만 건축적으로 보면 영어 단어가 다르다. 부산역은 터미널(terminal)이고 대전역은 스테이션(station)이다. 굳이 구분한다면 종착역과 정거장이다. 정거장은 종착역에 이르기 위해 잠시 서는 곳이다. 그래서 서울·대전·평양역이 다 정거장이다. 대륙으로 가기 위해 잠시 서는 곳. 서울역이 정체성 혼란에 빠진 것은 남북분단 때문이다. 신의주 가는 철도가 막히면서 서울역은 정거장이 아니고 종착역이 되었다. 경의선의 종착역은 문산역으로 바뀌었으니 경문선이라 불렸어야 마땅했다. 그 사이 고속철도가 개통하면서 서울역은 아예 대놓고 종착역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을 호령하던 건물로서의 서울역은 엉뚱하게 전시관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서울역은 민자역사라는 제도 덕에 수모스럽게 백화점 부속시설로 몰락했다. 대한민국 수도 중앙역의 체면이 도대체 말이 아니다. 지금 서울역은 종착역과 정거장의 단점을 골고루 골라 담고 있다. 철도의 문제는 도시를 극단적으로 양분한다는 것이다. 철도역사의 전면은 문명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되 후면은 도시의 그늘로 남는다. 그건 서울·대전·평양역이 모두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서울역 고가도로가 <서울로 7017>로 바뀌었을 때 서울역 후면에서 벌어진 도시변화는 그 단절의 폭을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철도가 국토를 바꿨다. 그런데 지난 세기 국토변화의 관점에서 철도부설보다 큰 사건은 분단이었다. 결국 서울역의 미래 모습은 우리가 분단 국토의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는데 달려있다. 그것은 경문선이 아닌 경의선의 가치와 가능성을 묻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토 그림이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둔다면 경부선은 대륙과 대양을 잇는 동맥이겠다. 그 고리가 부산역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부선과 경의선이 바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 고리는 서울역이다. 백 년 전에 깔린 경의선은 당시의 기술 한계에 의해 지형을 따라 구절양장 휘어있다. 우리가 연결해야 할 것은 거의 열 배의 속도로 내달리는 철도다. 경의선의 기존 구간을 버리고 지하로 연결한다면 경부선과 경의선은 이어질 수 있다. 서울역도 지하화한다면 종착역과 정거장의 장점을 골라담은 역이 되겠다. 서울역 주변이 다 바뀔 것이다. 부산역도 육지 끝의 종착역이 아니고 바다를 향한 길의 출발역이 될 수 있다. 대륙과 대양을 잇는 다른 의미의 정거장이 되겠다. 그건 국토 내 어떤 도시도 갖지 못한 가능성이다. 구성지고 낭랑한 노래는 부산역이 종착역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여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https://news.joins.com/article/23948648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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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11. 20덮어놓고 낳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한다. 1963년에 등장했다는 계몽표어다. 화끈하다. 지금의 최저출산율국가 타이틀은 저런 과격한 산아제한의 위대한 성취가 아닐지. 도대체 얼마나 애를 낳았기에 저리 절박한 모습으로 등장했을까. 2백만 명이던 서울인구는 1963년이 되자 갑자기 3백만 명으로 바뀐다. 서울시민들이 합심·작심하여 같은 날 덮어놓고 애들을 백만 명 낳은 건 아니겠다. 서울시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다. 경기도 광주 일부도 지금의 말 많은 서울 강남이 되는 순간이었다. 서울 인구는 1988년에는 1천만 명에 이른다. 25년 동안 7백만 명이 증가했다. 이번에는 행정구역 변화도 아니다. 굳이 따지면 은평구 북쪽 일부가 살짝 더해졌을 따름이다. 계몽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민들은 덮어놓고 저리 아이들을 낳았을까. 서울시의 모든 결혼 세대가 아이 일곱을 골고루 낳았으면 저 숫자가 성취된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의 소위 586세대들은 거의 십 인 가족의 자녀여야 한다. 서울은 거지천국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건 대한민국의 압축성장기로 불리는 시대다. 거지꼴이 된 게 아니고 오히려 졸부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서울의 인구증가가 생물체로서의 자연증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이것은 사회적 증가였다. 그걸 우리는 ‘무작정상경’이라는 단어로 불렀다, 그들이 7백만 명 증가의 대다수를 구성했다는 이야기다. 이 막대한 상경인구가 서울에서 재집결하여 만든 결사체가 재경향우회다. 다른 국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신기한 조직체다. 이들은 떠나온 고향과 도착한 서울에 각각 독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암약하는 정치집단이 되었다. 선거철이면 출마자의 정치적 배경과 공약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고 자신이 속한 향우회와의 친소관계로 투표성향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끝에 물어야 했던 문장이, 우리가 남이가? 막강했던 향우회의 결집력과 영향력 쇠퇴가 하루가 다르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이미 향우회 총회 개최가 무산되는 사례도 등장했다. 그 자리를 재경동문회가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1천만 명 이후 서울 인구집중의 양상변화를 보여준다. 즉 무작정상경이 아니고 대입상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 동력을 보여주는 단어가 대학 입시철이면 등장하는 ‘인서울’이다.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 인터넷 검색으로 줄줄이 엮여나오는 이 암호는 공고하게 자리잡은 대학의 서열이다. 이야기의 요점은 여기 지방대학이 모조리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인서울’이 낳은 것은 결국 지방인구 감소다. 상경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절대 지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서울에서 취업하고 결혼하여 어렵게 생존해나간다. 그리고 거지꼴이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출산을 포기한다. 인구가 감소하니 지방대학은 더 어려워진다. 국가균형발전의 당위성은 충분하고 정부의 의지도 여전히 강력하다. 그래서 온갖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서울인구를 지방으로 뿌리겠다고 한다. 그런데 직장 따라 뿌려져야 할 그 인구가 가족해체의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뿌려지지 않는다. 가장을 제외한 가족이 서울에 남는 이유도 결국 대학이다. 그 자녀가 대입에서 ‘인서울’하려면 결국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이 순환구도가 극복되지 않으면 국토균형발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핵심은 대학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국가균형발전’을 입력하면 죄 토건사업이 나온다. 내년 사회간접자본 예산책정의 배경에 깔린 단어도 국가균형발전이다. 예비타당성 검토도 건너뛰고 덮어놓고 토건사업에 예산을 몰아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치료의 전제는 진단이다. 수도권 인구집중은 증상이되 원인은 교육과 취업이다. 교육이 앞에 있다. 치료법은 지역안배 토건사업이 아니라 지방거점 국립대학 경쟁력강화와 육성이다. 보고서 받고 검증·선정한 후 무늬만 갖춘 사립대학들 눈치도 보면서 공평하게 몇 푼 주겠다고 하지 말고 지방거점 국립대학을 덮어놓고 지원할 일이다. 지방거점 국립대학은 명확한 공공재다. 이들이 균형발전의 거점이고 촉매가 되어야 한다. 대학은 학생·교수·시설의 복합체다. 장학금·연봉·시설비 모두 예산을 요구한다. 여전히 효과여부로 논쟁이 분분한 사대강사업의 예산이면 전국 지방거점 국립대학 대학생 전원에게 25년간 전액장학금을 줄 수 있었다. 젊은 교수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인서울’해야 한다며 연봉만으로는 지방행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은퇴한 교수도 청년들이다. 이들을 석좌교수로 초빙할 수 있고 이들은 여전히 좋은 교육을 시행할 수 있다. 대학이 지역문제를 모두 해결하지 않지만 대학 빼고 한국의 지역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대한민국 압축성장의 동인으로 짚어야 할 것은 전 국민적 교육열기였다. 그 열기가 서울로만 모여 ‘인서울’이 되었다. 오래된 표어가 다시 환생해야 하겠다. 지역이 거지꼴을 면하게 하려면 지방거점대학에 덮어놓고 투자해야 한다. 그 투자는 건설이 아니고 교육이라고 부른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925476?cloc=joongang-home-opinioncolumn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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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10. 23시속 23.8km. 한강공원의 자전거 속도겠다. 변속기어 장착하고 쫄바지를 걸쳤는데 이 속도면 느리다고도 해야겠다. 그런데 이게 백 마리 넘는 말들이 힘을 합쳐 뛴 속도다. 서울시 자동차 평균 주행 속도. 2019년 서울시 등록 자동차는 312만대다. 그중 승용차가 267만대다. 일상으로 접하는 그 승용차의 정체를 가정하자. 배기량 2000cc의 현대 쏘나타라면 큰 무리는 없겠다. 이게 160마력짜리 마차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시에 4억 3천만 마리의 말이 뛰어다니는 중이다. 서울시는 전체 자동차 운행 거리 통계도 알려준다. 이걸로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산수를 하면 알기 쉬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계산하면 승용차 한 대의 연간 주행거리는 1만 1천km를 약간 넘는다. 하루에 평균 31km 주행이다. 쏘나타 마차 값이 3천만 원이라면 말 한 마리 값은 19만 원 정도다. 연비가 리터당 13km정도라니 연간 여물값은 요즘 유가 기준으로 마차당 백만 원, 말 한 마리당 6천 원이 좀 넘는다. 이전 시대에 상상 못 하던 저렴한 호사다. 그런데 이 여물이 화석연료라 재생 불가능하고 죄 이산화탄소로 배출되어 지구를 덮는 게 문제다. 마차당 하루 주행시간은 1.3시간 정도다. 마부들은 일 년이면 이십 일 정도를 마부석에 앉아 보낸다. 문제는 나머지 시간이다. 일 년의 345일간 말들이 할 일 없이 서 있다는 이야기다. 즉 4억 2천만 마리의 말들은 항상 어딘가에서 잠을 자든 여물을 먹든 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건물마다 다르나 주차장법에서는 대개 면적 150m2당 주차장 한 면 설치를 요구한다. 설계를 해보면 건물 지하에 주차장 한 면 설치하는데 35-40m2 정도가 필요하다. 진입로와 기계환기 장치 공간들이 포함된 면적이다. 자동차는 지표면에 가까운 공간을 요구하고 그런 곳은 땅값도 비싸니 마차보다 마구간 값이 훨씬 비싸다. 그래서 건물 만들 때 마구간 설치에 인색해진다. 법규 기준 이상으로 주차장 설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서울시의 주차장 보급률은 136%다. 서울시 전역이 주차문제로 골머리인데 주차장은 저처럼 여유가 있다니. 답은 마차가 이동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몰고 나갔다가 다소곳이 집에 돌아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출발지와 목적지에 주차장이 한 면씩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마차는 하나가 아니라 두 면의 주차장을 요구한다. 그래서 서울의 주차장은 64% 공급 과부족이다. 종로구·중구·용산구 합친 바닥 면적이 주차장으로 추가 필요하다. 마구간 못 찾은 마차들은 결국 길 위 어딘가에 서있어야 한다. 그곳은 후미진 골목이나 인도 위일 가능성이 높다. 인구 천만 명인 도시에서 125만대 마차를 끌던 2억 마리 말들이 마구간도 길도 아닌 어딘가를 배회하는 중이다. 그래서 서울시의 보행환경은 아주 좋지 않다. 자동차 발전은 눈부시다. 블랙박스는 물론이고 온갖 센서로 무장한 상태다. 시간과 에너지 소모를 마른 수건 짜듯 줄여준다. 연비 증진을 위해 정차 중에는 엔진이 꺼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자동차마다 장착한 저 내비게이션은 놀라운 예지로 합리적인 길을 인도한다. 인공위성들이 알려주는 위치 정보를 상대성이론으로 계산하여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최적 알고리즘으로 해석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물건이란다. 그런데 그 최첨단 기계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다 눈을 들면 가끔 엉뚱한 현실을 만난다. 빨간 신호등. 서울시의 신호등들은 시간대 실시간 제어라는 체계로 운용된다고 쓰여있다. 멋진 용어다. 요일과 시간대별로 데이터베이스를 입력하여 정해진 시간에 자동으로 빨간 불이 켜진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실시간 교통상황이 아니라 과거의 교통상황을 근거로 작동한다는 이야기. 지금 운전자들이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이 지난 통계에만 근거해 최적의 경로라고 알려준다면 그 업체는 이미 도산했을 것이다. 지난 세기 국토의 구조를 바꾼 것이 기차다. 개항 후 제물포 노량진 간 시속 20km였던 기차 속도는 300km가 되었다. 도시의 구조를 바꾼 것은 자동차다. 자동차 덕분에 도시가 커졌고 자동차 없이 도시가 작동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의 도시는 좀 이상하다. 다음 세대의 자동차는 배설물 없는 말이 끌고 마부도 필요없다고 한다. 그런데 저런 첨단 기계들이 결국 마차 속도로 돌아다니는 도시라면 구조적인 문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 도시가 불합리하고 비능률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겠다. 텅 빈 길에서도 빨간 신호등은 껌뻑껌뻑 켜진다. 악법도 법이다. 테스형이 툭 내뱉고 간 말에 수 많은 마부들은 브레이크를 밟는다. 그래서 시속 19.6km. 이건 서울시 중구의 평균 자동차 속도다. 스마트시티가 화두고 정보화에 미래가 있다는 세상이다. 과거형 자동점멸 신호시스템이 자동차 공회전 부추기고 이산화탄소발생 높인다. 백 마리 말을 몰아도 여전히 마차 속도를 내는 도시라면 테스형, 도시는 왜 이래. https://news.joins.com/article/23901621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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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020. 09. 25여름이 지났다. 참으로 기이했던 계절이다. 전례 없는 비를 쏟았다. 그래서 전례 없는 더위를 예보했던 기상청이 전례 없이 뻘쭘해졌다. 그래서 뻘쭘해진 건 선풍기도 마찬가지였다. 날개 몇 바퀴 돌려보지도 못한 채 시름시름 어딘가에 처박혔겠다. 그 선풍기를 들여다보면 의아한 것이 눈에 띈다. 왜 스위치들이 죄 바닥에 붙어있는 것이냐. 물론 리모콘 구동의 제품들도 있다. 하지만 거의 다. 그 위치를 이해하려면 우선 사용자의 자세부터 보아야 한다. 그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던 참이었겠다. 우리는 이를 좌식생활이라 부른다. 그 배경에 온돌이 있었다. 일본이라면 다다미겠다. 그들은 바닥에 붙어있던 엉덩이를 떼지 않고 끌고 가서 선풍기의 스위치를 누르고 돌렸던 것이다. 한국 주거의 방을 규정하는 것은 유서 깊은 온돌이다. 온 민족의 엉덩이나 등이 거기 밀착된 생활이었다. 아파트도 처음에는 연탄 아궁이가 있는 온돌방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서양에서 들여온 이 고급진 주거가 연탄 아궁이와 잘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곧 아파트의 조심스런 실험이 시작되었으니 거실과 주방에는 스팀 라디에이터가 설치된 것이다. 방만 온돌이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거실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바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게 곧 판명되었다. 라디에이터가 퇴출되고 거실에도 온돌이 들어왔다. 지금 대한민국의 주거 난방은 온수파이프 깐 온돌이 평정했다.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건축가들에게 선택 고민이 필요 없는 사안이다. ‘보일러’로 작동하는 ‘라디에이터’가 들어오던 딱 그 시기에 부엌에는 ‘싱크’, 거실에는 ‘소파’가 들어왔다. 이들은 이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물건임을 그 이름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방에 침대가 밀고 들어왔다. 공간과 가구의 부정교합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침대가 바닥에서 마땅히 올라올 복사열을 막기 때문이다. 이상한 조합이다. 그래서 침대와 온돌이 함께 그리운 이들을 위해 발명된 것이 돌침대니 이건 사실 논리모순의 기이한 물건이다. 기이한 현상은 거실에서도 발견된다. 진공관 시대의 라디오는 가구 크기였고 당연히 주택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놓였다. 그 주위에 가족이 반원형으로 모여 앉았다. 티비가 등장하면서 가족의 배치가 바뀌었다. 티비를 마주 보고 횡대로 앉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전 세계 공통 풍경이다. 우리에게도 아파트 거실에서 티비의 반대쪽에 소파가 놓이는 풍경이 수입되었다. 다음부터 기이하다. 소파는 분명 좌식 가구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한국인의 자세는 좀 복잡하다. 그들의 태반은 소파를 등받이로 사용한다. 방바닥에 내려와 정형외과 의사들이 혐오하는 다양한 자세로 앉는 것이다. 그러다 불편해지면 다시 소파 위로 올라가며 자세 교체를 시도한다. 게다가 한국의 소파는 앉기보다 눕는 가구에 훨씬 가깝다. 입적을 앞둔 부처님 자세로 제자들 아닌 티비를 보고 누워 열반을 꿈꾼다. 아파트에서 태어난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침대에서 자고 식탁에서 먹던 세대들이 방바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온돌 난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좌식생활을 거부하는 것이다. 게다가 밥상 위에 밥그릇을 실어나르던 세대들까지 점점 식탁에서 밥을 먹더니 이제 좌식생활의 관절염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아파트 밖에서 확연하다. 세계의 문화사가 증명하되 가장 변화저항이 강한 것이 장례문화다. 그런데 한국은 매장이 화장으로 바뀌는데 한 세대도 필요치 않았다. 게다가 장례식장 접객식당도 순식간에 입식으로 변해나갔다. 민감하고 민첩한 변화가 생존의 길인지라 바닥에 앉아 먹던 시장 식당들도 모두 식탁과 의자를 들여놓았다. 선풍기 스위치를 보면 여전히 당황스럽다. 늘어선 그것들은 각각 정지, 속도, 회전을 규정하는 다른 용도를 갖지만 그냥 같은 모양들이다. 각각의 용도를 알려면 그 아래 글자를 읽어야 한다.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맹렬히 비판하는 사례들이다. 변화한 한국인들은 변치 않는 방바닥의 선풍기 스위치를 손가락 아니라 발가락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가락이 진화한 게 아니고 생활이 입식으로 변했을 따름이다. 날개 없는 선풍기와 에어컨이 바람을 뿜는 시대다. 지난 여름 아직도 바닥에 스위치를 놓고 버티던 선풍기들의 고집이 놀랍다. 아궁이에 연탄 갈던 시대의 가치로 도도히 버텨 보겠다는 듯 보여서다. 가을이다. 계절이 바뀌었으므로 우리는 옷을 바꿔입는다. 사용자가 변하므로 아파트도 달라지겠다. 지금도 대개 거실의 설계 도면은 티비와 소파의 대면 상태로 그려지지만 현실 풍경은 다양하게 다르다. 궁금해진다. 한번 침실에 들어간 침대가 다시 나오지는 않겠고 그 생활자들이 방바닥으로 다시 내려오지도 않겠다. 그렇다고 바닥난방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파트는 미분양의 폭발력이 큰 시장이라 실험이 어렵다. 아주 느린 진화만 가능한 건물형식이다. 그럼에도 부정교합의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는 공급자들은 결국 도태될 것이다. 스위치로 표현되는 선풍기 운명처럼 그 변화가 궁금할 따름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880731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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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 2021. 01. 26영산대학교의 이성찬, 김용희 교수 방문. 작은 학교인데 두 교수 모두 건축과의 음향전공이라는 특이점. 김용희교수는 학생시절에 비해 20킬로그램의 무게를 더한 분위기.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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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 2020. 11. 30한국예술종합학교 우동선교수께서 박사학위 논문심사차 방문. 후배이면서 연구년 시절 버클리의 동네 주민이었기에 훨씬 더 흉허물 없는 존재.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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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 / 2020. 11. 24서울대 건축학과에 거액을 장학금으로 지원하는 한샘드뷰연구재단의 핵심 멤버인 서정일부장, 김희경이사, 김동건상무께서 방문. 장학금이 뒷 세대에 훨씬 큰 가치로 돌아와야 할텐데.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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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 / 2020. 11. 21수업시간 중 옛 서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서울성곽 인왕산구간 답사. 촬영은 자하문 앞.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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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2020. 11. 20서로 남의 연구실 돌아다니면서 남의 전공 이야기 듣는 교수들께서 방문. 조인호(동양화), 임동균(사회학), 박정호(고고미술사), 김도형(수학). 다양한 전공인데 배경의 공통점은 입사 동기들.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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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2020. 11. 18규모가 좀 있는 조직에 있다가 자유인이 된 김태균 소장께서 방문. 가방끈이 긴 건축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기도 하고 우려되기도 하고.서현